13화. 우연 아닌 우연 (3)
“우선 이쪽 기자분에게 먼저 질문할게요.”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응하겠습니다.”
제임보다 먼저 지목을 받은 후배 기자 리타는 아네타의 의도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배에게 알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기에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허마이오니에 입사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5개월 조금 넘었습니다.”
허마이오니. 전령이라는 뜻을 가진 신문사에 입사한 그녀는 지금껏 선배 제임의 지시로 온갖 잡일을 맡아서 처리했다.
“이제 막 배우고 있는 견습 단계예요.”
솔직히 말하면 견습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했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은 모두 사수를 잘 만나 하하호호 즐거운 분위기로 일을 배우는데, 그녀는 그런 일들을 꿈에서나 그릴 수 있었다.
제임이 시키는 일은 언제나 같았다. 마실 것을 요구하거나, 제 자리를 청소하게 하는 등 업무와는 조금도 관련 없는 것들만 지시하는 탓에 리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여자는 남자가 하는 일을 돕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먼지 묵은내 나는 사고방식이었다.
“아까 보니 받아 적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던데.”
“취재 나오면 하는 일이 그것뿐이라, 자연히 그쪽으로 능력이 발달된 것 같아요.”
질문 독점과 더불어 배려 없는 진행 속도 탓에 일취월장한 것이라고는 속기 하나뿐이었다.
하나라도 놓치면 대체 잘하는 게 뭐냐, 그동안 내 밑에서 배운 게 뭐가 있냐, 라는 등의 타박이 쏟아졌던 까닭이다.
가르친 것이 있기나 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간의 설움이 떠오르자 욱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모두 제가 잘 가르친 덕분이지요.”
끼어들 타이밍을 재던 제임이 생색을 내자, 아네타의 입매가 또다시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푸른 눈동자만은 날카로운 검에 서린 예기와 닮아서, 금방이라도 그를 향해 쇄도할 것만 같았다.
리타는 눈앞에 있는 권력자가 그의 우스운 콧대를 짓눌러 주길 바랐다. 그리한다면 앞서나가는 동기들을 따라잡기 위해 발악했던 지난날의 자신에게 자그마한 위로라도 될 것 같았다.
“참 괜찮은 후배를 두었네요.”
당신 밑에 두기 아까울 정도라는 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네타는 진즉에 리타의 언행에 담긴 진의를 읽었다. 리타는 너무도 익숙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 깃든 감정은 그녀가 수없이 마주했던 것이다.
지금껏 마주했던 색색의 눈동자와 리타의 눈동자가 겹쳐 보인다. 아네타는 그녀들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결코 악하다 칭하지 않았다.
썩을 대로 썩어 악취를 풍기는 것은 따로 있으니.
아네타는 제임이 눈치채지 못할 시선을 슬쩍 흘렸다. 그러곤 질문을 이어 나갔다.
“기자로서 지켜야 할 사명이 뭐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낸 기사에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오로지 진실만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언론을 통해 퍼지는 말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뒤늦게 당사자가 해명을 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져도 그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는 사람의 수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단순히 의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죠.”
리타의 대답은 막힘없었다. 준비된 말이 아닌, 진심을 드러내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따라서 저희 기자들은 항상 자신의 펜 끝을 경계하고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훌륭하네요.”
그에 아네타가 진심 어린 감탄을 내었다. 마담 리페나 베넛 남작의 반응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한 것은 제임뿐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아네타의 호감을 얻어 내는 것이 전부였고, 기자로서의 사명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제임은 아네타의 질문에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답을 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귀족들은 화려하고 장대한 걸 좋아하니 자신이 받은 질문과 더불어 후배의 답변까지 더 장황하게 설명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럼 자신의 유능함을 알아줄 테니까.
제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제임의 몸이 달았다. 초조하게 눈을 굴리자, 그의 상태를 살피던 아네타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 대상을 바꾸었다.
“이제 다음 분에게 질문할게요.”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임은 최대한 흥분한 기색을 감추고자 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눈빛만은 숨기지 못해서, 아네타는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고 단정 지었다.
“돌아가는 즉시 기사를 작성할 예정인가요?”
“그럼요. 당장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건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 그때 어떤 옷을 입을 예정이죠?”
“네?”
갑자기 질문의 궤가 달라진 듯한 느낌에, 제임은 의아함을 느끼며 반문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예요. 대답, 안 할 건가요?”
아네타는 리타를 바라보던 것과 사뭇 다른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은근히 고압적인 투로 말하자, 제임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최대한, 편한 옷을 입을 생각입니다.”
“편한 옷이라…… 좋죠. 그런데 콧수염이 아주 멋지네요. 따로 관리를 받는 건가요?”
그 뒤로도 아네타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입고 있는 건 어느 의상실 작품이죠? 평소 식단이 궁금하네요. 체중을 줄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나요?
제임은 준비한 말들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일단 참았다.
유능한 내게 관심이 많아서 그래. 사소한 걸 먼저 물어보고 이 뒤에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거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던 찰나였다.
“질문은 여기까지 하죠.”
그리도 애타게 차례를 기다렸건만, 그에게 건네지는 질문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앞서 리타에게 보였던 태도와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에 황당함과 분노를 느낀 제임이 반발했다.
“각하, 어째서 업무에 대한 질문을 제 후배 아이에게만 하시는 겁니까? 저 아이는 아직 견습일 뿐, 맡아서 처리하는 일은 제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했나요?”
“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엄연한 차별이지 않습니까!”
“그럼 애초에 당신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
아네타는 언제 미소를 머금었냐는 듯 싸늘한 얼굴로 제임을 응시했다. 존대를 사용하던 말투는 어느새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공적인 목적으로 찾아왔다면 이곳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고, 실질적인 운영자가 누구인지 모를 수도 없을 텐데.”
아네타는 첨예하게 벼려진 푸른 시선을 그에게 겨누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곳을 마담 리페의 갤러리라고 불렀다. 공동 소유주가 또 한 명 있음에도 그리 부른 이유는 분명했다.
베넛 남작이 운영에 아무런 손도 보태지 않는, 이름뿐인 동업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성인 베넛 남작에게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한 것에 반해, 여성인 마담 리페에게는 차별적인 질문들을 이어 나갔지.”
이런 일은 한 번만 행해도 큰 문제가 되는 일이다.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행했으니 변명할 여지가 있을 리 없다.
“그건 오해…….”
“변명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아네타는 입술을 달싹이는 제임에게 경고하며 턱짓으로 대충 놓아두었던 신문을 가리켰다.
“저걸 보니 질문에 차이를 두는 기준이 명확하던데, 제법 더러운 특색을 지녔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이따위 대우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명백한 조롱에 제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늘 그대가 보인 무례, 잊지 않도록 하지. 그대도 지금 느낀 불쾌함, 잊지 않고 잘 기억해 두기를 바라.”
화로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번엔 허옇게 질렸다. 그녀가 제게 어떤 압박을 가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선을 거둔 아네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죠, 마담 리페. 그동안 못 봤던 그림들을 보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 같네요.”
“네, 각하.”
리페는 아네타의 말에 답하며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제임을 향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건 그녀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실례하죠, 베넛 남작. 그리고 제임, 당신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리페는 지금껏 보인 적 없는 서늘한 음성으로 그에게 일갈했다.
아네타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화를 참지 못하고 리페 본인이 직접 나섰을 터였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가 갤러리에 대해 어떤 기사를 쓸지 모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화가들에게 돌아왔을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아네타가 나서서 막아 주었을 테지만, 아까 리타가 말했던 것처럼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언론에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위험했다.
만약 아네타가 이곳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까맣게 물드는 것 같아, 보이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네타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말 그대로 잠시일 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네타가 저런 자에게 당할 리 없었다.
마담 리페가 안도하는 사이, 아네타는 열린 문을 지나 취재가 이루어졌던 휴식 공간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어디선가 짝짝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또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이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세르세?”
아네타가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가자, 탐스러운 적발을 한쪽으로 모아 늘어뜨린 그가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몸을 바로 세웠다.
“다 들었어. 멋지던데?”
“덕분에 살았어요.”
기자를 보기 좋게 물 먹인 것에 대한 칭찬에, 뒤따라 나온 리페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는 언제나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내가 내켜서 벌인 일이니까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마담. 정 미안하면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해 줘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하는 말은 미안해하는 리페를 위한 배려였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리페의 마음이 미안함에서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그나저나, 넌 언제 온 거야?”
아네타는 리페가 또 같은 말을 꺼낼세라, 세르세에게 주의를 돌렸다.
“방금. 선객이 셋이나 있어서 기다리려고 했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 너와 함께 움직여도 괜찮겠지, 아네타?”
세르세는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 여기는 투로 물었다. 그 뻔뻔한 태도에 아네타는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거절해도 그럴 생각인 것 같은데, 너.”
“정답이야. 하지만 바우터 남작의 환영식이 있던 날, 내게 진 빚을 기억하고 있다면 허락해 줄 거라고 믿어.”
칼로스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그녀 역시 잊고 있던 일이 언급되자 가슴이 뜨끔했다.
“거봐. 결국 내 의사는 반영되지 않는 거잖아.”
“그래서 대답은?”
“……좋아. 지은 죄가 있으니 바라는 대로 해 드려야지.”
아네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