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우연 아닌 우연 (2)
러셀을 알현한 뒤 집무실로 돌아온 아네타는 서둘러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벌써 돌아가려고?”
잉크병을 치우고 서류를 정리하는 등 책상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보던 칼로스가 물었다.
부정이 들려오길 바랐으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반대였다.
“당연하지. 오늘은 원래 쉬는 날이었으니까.”
그에게 황제의 호출이 있을 거라는 귀띔을 듣고 평소와 같은 시간에 나와 서류를 처리한 것이기 때문에 박수를 받으면 몰라도 지탄을 들을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그림이나 보러 갈까.”
“그 취미는 여전하네.”
마지막으로 의자를 집어넣으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칼로스가 관심을 보였다.
“여전히 여성 화가들만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맞아.”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짐작 가는 이유가 있었지만, 칼로스는 부러 물었다.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질문을 이어 나가는 그를 보던 아네타는 잠시의 침묵을 거두었다.
“……현재 예술계의 정세를 봤을 때, 귀족이나 부호의 후원을 받는 건 대부분 남성 화가들이야. 여성들의 예술 활동 참여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 때문이지.”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예술은 남성 혹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다. 이미 깨어진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었지만, 어디든 시대에 맞게 흘러가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옛 시대상을 그리워하며 정체되어 있는 이들은 대개 처음부터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쥐고 있던 이들이야. 특권처럼 누려 오던 것을 그렇지 않은 자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영역에 보란 듯이 벽을 세우려 들지.”
그녀가 몸담고 있는 정계도 그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다. 아네타는 의자 모서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선 또한 그 위에 얹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닌, 더 먼 곳에 있는 무언가였다.
“당신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나는 그게 이골이 날 정도로 싫었어. 나 역시 같은 것을 겪으며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올랐으니까.”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돕는 거야. 나와 같은 이들이 더는 그 더러운 수에 놀아나지 않기를 바라서. 내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군.”
칼로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모를 수 없었다.
“마담 리페의 갤러리라고 했던가. 나도 그곳에 가 보고 싶어졌어.”
“왜?”
“당신이 마음 쓰는 곳이니까. 괜찮다면 동행해도 될까?”
“아니. 거절할게.”
아네타는 눈짓으로 그의 앞에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저걸 두고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신은 일해야 하잖아.”
단칼에 거절한 아네타는 문을 향해 걸었다. 문고리를 돌리기에 앞서 인사를 남긴 그녀는 그대로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럼, 먼저 갈게.”
그녀가 떠나가자 덩그러니 남은 칼로스는 러셀이 보내온 서류 더미를 노려보았다.
“하아. 왜 하필 오늘…….”
경애하는 형님이지만, 오늘따라 조금 원망스러웠다.
***
목적지를 말하고 마차에 오른 아네타는 마담 리페의 갤러리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그곳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그림이 아닌, 마담의 품에 안겨 오열하는 여인이었다.
“나는, 나는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 뿐인데……!”
절망으로 점철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헐떡이는 그녀의 숨은 타인에 의해 모든 걸 빼앗긴 자의 그것이었다.
알아본 결과, 레일라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어느 졸부에게 후원을 대가로 정부 역할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리를 놓은 것은 그녀의 부모였다.
가난한 집안에 보탬이 되라는 말로 압박을 받아 온 그녀의 모습에서, 아네타는 어머니 엘레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만큼 두 사람의 상황은 흡사했다.
엘레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에게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여아는 돈 들여 가르쳐 봤자 쓸모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은 모두 하나뿐인 아들에게 쓰였다. 딸을 아데나워가에 팔아넘기며 받은 돈도 마찬가지였다.
엘레나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는 이들이 없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어머니와 같은 뜻을 품고 있던 아네타가 레일라를 첫 번째 후원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지극히 자명한 일이었다.
그 이후, 아네타는 여성 화가의 그림만 받는 마담 리페의 갤러리에서 피후견인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이 살던 세계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설움을 토해 내며 흐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녀들은 저마다의 강인함을 품고 있었다.
쏟아지는 차별과 무시는 그녀들의 심신을 내리치는 망치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의지와 목표는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려졌다.
가해지는 충격에 수없이 휘어지고 아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그녀들을 보며 아네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통감했다.
차별적인 사회에 맞서겠다는 그 고결한 의지를 지켜 주어야 한다.
아네타는 그들 위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구도 감히 그녀들의 투지를 막아설 수 없도록.
가슴에 박힌 그녀들의 눈물 조각이 아릿한 통증을 자아내던 찰나,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땅에 발을 디딘 아네타는 지체 없이 갤러리에 들어섰다.
예고 없이 방문한 그녀를 맞이한 이는 마담 리페였다. 휴식을 목적으로 마련된 공간에서 누군가를 상대하고 있던 리페는 당혹감이 묻어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각하.”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리페 곁에는 갤러리 공동 소유주인 베넛 남작과 기자로 추정되는 남녀가 함께 있었다.
“각하를 뵙습니다.”
아네타는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오는 그들의 인사를 받은 뒤 물었다.
“이쪽은?”
“취재를 위해 오신 기자분들이에요. 각하께서는 그림을 보러 오셨나요?”
“그럴 예정이었지만, 선객이 있으니 여기 앉아서 기다릴게요.”
아네타는 리페가 있는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마침 신문 한 부가 놓여 있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신분으로 따지면 그녀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터였지만, 애초에 기별을 넣고 왔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기다림을 자처했다.
“바쁘신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오늘은 한가해요.”
저들에게는 저들의 일이 있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 세상에 그녀 하나뿐인 건 아니었기에 아네타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정 지루하면 취재하는 모습이라도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아네타는 당치 않다는 듯 반응하는 리페를 안심시키기 위해 신문을 펼쳐 들었다. 더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반응하자 리페는 한숨을 쉬면서도 못 당해 내겠다는 듯 웃었다.
“그럼, 시작, 하겠습니다.”
앞에 있는 마담 리페나 베넛 남작도 귀족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아네타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녀가 손에 쥔 재화가 막대하다는 걸 알고 있는 기자는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지에 닦아 냈다.
“먼저 베넛 남작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기자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안정되었다. 아네타는 그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무감한 눈으로 신문 기사를 훑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어느 머저리가 기사랍시고 휘갈긴 글이었다. 요즘 한창 인기 있다는 레스토랑에 관한 기사였는데, 취재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남성 요리사에게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한 것에 반해, 여성 요리사에게는 지극히 사적이거나 혹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질문들이 이어졌다.
아네타는 아름다운 외모를 언급하며 추파를 던지는 이가 없었는지를 묻는 것을 끝으로 신문을 접어 버렸다. 차라리 리페에게 말한 것처럼 취재 구경이나 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네타는 깨닫지 못했다. 신문 기사나 취재 구경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이 갤러리는 두 분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베넛 남작께서는 어떤 이유로 운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흠흠. 당연히 여성 화가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지요.”
아네타는 은근슬쩍 저를 흘끗거리며 답하는 베넛 남작의 행태에 코웃음을 삼켰다.
그는 원래 이곳을 팔아넘기지 못해 안달이었던 자였다. 태도가 돌변한 것은 아네타가 갤러리 화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지금부터는 마담 리페께 질문하겠습니다.”
투명하게 비치는 속내에 질려 가는 사이, 차례는 리페에게로 넘어갔다.
“피부가 굉장히 좋으십니다. 평소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채소와 과일로 만든 팩을, 애용하는 편이에요.”
기자가 입을 떼는 순간 단번에 느낌이 왔다. 리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리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나신 마담의 드레스에 관심을 갖는 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의상실을 주로 애용하시는지요?”
드레스부터 구두, 머릿결 관리법까지.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리페의 표정이 굳어질수록 좌불안석이 된 것은 상대적으로 경력이나 나이가 적어 보이는 여성 기자였다.
“선배,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너는 아직 햇병아리야. 그러니 끼어들지 말고 잠자코 지켜보고나 있어.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결국 보다 못한 후배 기자가 나섰지만, 그녀의 노력은 눈치 없는 선배 기자에 의해 묻히고 말았다.
실소를 머금은 아네타는 읽다가 만 신문을 흘겨보았다. 묻어나는 느낌이 같았다.
‘아무래도 동일인물인 것 같은데.’
과연 갤러리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인가. 아네타는 말없이 상황을 주시했다.
“그럼, 취재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운영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선배 기자는 선호하는 색을 묻는 것을 마지막으로 취재의 끝을 알렸다.
인내를 반복하던 리페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간신히 누르고 있던 화가 폭발하려는 듯하자, 아네타가 그녀를 위해 개입했다.
“기자분,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제 이름은 제임이라고 합니다, 아데나워 후작 각하.”
“역시나.”
이름을 듣자마자 탄성을 뱉은 아네타는 확인 차 아까 본 신문의 발행사를 언급했다.
“허마이오니의 제임 기자?”
“예, 맞습니다. 제 소속을 각하께서 어찌 아시는 겁니까?”
아네타의 존대에 놀란 제임은 그녀가 평민인 자신의 이름을 묻는 것에 이어 소속된 신문사까지 알고 있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걸 보고 알았어요. 당신 기사에는 남다른 특색이 있더군요.”
아네타는 신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가는 것이 흡사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했다.
물론 특색이라는 말은 고도의 비꼬기였지만, 제임은 앞서 지은 웃음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다.
“방금 진행한 취재에서도 같은 느낌이 묻어나서 설마 했는데, 역시 본인이 맞았네요.”
“예, 뭐. 제가 그런 말을 많이 듣기는 합니다. 다들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입니다, 하하하.”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후배 기자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네타는 수준을 알 만하다고 여기면서도 호의적인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직업과 직무에 대한 열정이 뛰어나 보이네요. 신문사에 연락해서 두 사람 이야기를 해 볼까 하는데, 그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궁금한 게 많다는 뒷말에 제임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하문하셔도 좋습니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그녀의 비호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세워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신문사 하나쯤은 우습게 제 발아래 둘 수 있으리라. 제임은 돈더미에 앉은 제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제임이 기꺼이 승낙하자, 아네타는 마담 리페에게 눈짓을 보냈다. 소리 없는 신호의 뜻을 눈치챈 리페는 빠르게 화를 가라앉혔다.
리페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눈에 보일 듯 선연한 신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