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우연 아닌 우연 (1)
아네타가 선대 바우터 남작에 대해 알아보려는 목적으로 사람을 고용한 지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에레즈는 황궁 인근의 상가가 하룻밤 새에 연쇄적으로 털린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범행을 저지르던 도둑들이 황제가 진위 확인을 위해 보낸 이들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그로 인해 또 한 번 제국이 떠들썩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에레즈의 능력에 경외를 표했지만, 아네타는 예외였다.
이번 일로 찬연의 능력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상가가 털리는 건 원작에서도 있는 일이다. 그것만으로 예언하는 자라는 명칭이 붙는다면, 그녀에게도 자격이 있으리라.
아네타는 손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능력을 밝혀 낼 방책을 궁리하던 중 열리는 문이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
노크 없이 들어올 사람이야 뻔했다. 아네타는 고개를 들어 칼로스를 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
그녀가 발티모어 공작가에서 하룻밤 머무른 이후 그의 입가를 떠날 생각을 않던 미소가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걸 보면 알 거야.”
“이게 뭔데? 서류?”
아네타는 그의 굳은 얼굴에서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다. 레터 나이프로 그가 건넨 서류 봉투를 열자 또 하나의 봉투가 나왔다.
“이건…….”
아는 이들만 알고 있는 감색 봉투는 기밀문서를 뜻한다. 잠시 멈칫한 아네타는 이중으로 감추어진 그것을 꺼내기에 앞서 칼로스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선대 바우터 남작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며. 폐하께서 가져다주라고 하셨어.”
역시나. 황제가 그 수상쩍음을 그냥 넘길 리 없다. 아네타는 지극히 그다운 행동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끝난 뒤에 바로 조사를 시작했는데, 당신도 같은 걸 알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더군.”
아무리 은밀히 행동해도 황제의 손바닥 안이라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결혼과 함께 황제파로 적을 옮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마터면 일거수일투족이 문서화되어 그의 앞에 대령될 뻔했다.
“그럼 이건 정보 공유?”
“그래.”
아네타는 퍽 의외라고 여기는 것과 동시에 진의를 눈치챘다.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나더러 도우라고 할 만한 일인가 보네. 이렇게 친히 나서시는 걸 보면.”
“맞아.”
칼로스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은 아네타에게 정보를 대가로 협력을 종용하고 있었다.
아네타는 그가 내민 칼자루를 거절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좋아.”
아네타는 언제 망설였냐는 듯 거침없이 봉투의 입을 벌렸다. 기밀 취급을 하는 이유야 뻔했다.
그녀는 바우터 남작의 죽음에 무언가가 얽혀 있고, 우선은 그걸 감출 생각이라는 걸 직감하며 서류를 단숨에 읽어 내렸다.
첫 번째 장에는 에레즈가 사들인 물품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간혹 보이는 약초를 제외하고는 사치품이 주를 이루었다.
알 수 있는 건 에레즈의 대책 없는 소비 습관뿐인지라, 아네타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다음 장을 넘겼다.
그녀가 앞에서 놓친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선대 바우터 남작의 숨겨진 병력을 눈에 담는 순간이었다.
“……천식? 선대 바우터 남작에게 천식이 있었어?”
“그래. 심한 건 아니었지만.”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첫 장으로 돌아왔다. 있어선 안 될 약품의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이거구나. 바스티아.”
바스티아. 평범한 사람에겐 원기를 북돋아 주는 효능이 있지만, 천식 환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는 약초였다.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의 에레즈가 원작의 에레즈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생긴 셈이다.
“정답이야. 마지막 장은 바스티아 구매 내역이지. 전대 남작의 병이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던 때와 시기가 일치해.”
“조금씩, 자주 구매했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약초의 특성 때문이야. 바스티아는 일 년 내내 재배가 가능하지만, 가공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효능이 사라진다더군. 그러니 위험을 무릅쓰고 자주 구매할 수밖에 없었겠지.”
아네타는 껍데기만 남은 감색 봉투에 시선을 주었다.
가주의 건강 상태는 감기나 몸살 따위의 가벼운 질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밀에 부쳐진다. 숨겨 왔던 지병이 알려지는 건 대부분 당사자가 생을 달리한 후였다.
지금 그녀가 받아 본 정보는 러셀이 아니었다면 아예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한참이 지난 뒤에 간신히 얻거나.
“하지만 아무리 가주의 병력이 극비 사항이라고 해도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건 좀 이상해.”
복잡한 얼굴의 아네타는 미심쩍은 부분을 짚어 의문을 제기했다.
칼로스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범이 있었을 거야.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집사겠지.”
가주의 혈족인 에레즈를 제외하고는 병력을 알 만한 이는 그밖에 없다. 다른 이가 있다고 해도 집사가 바스티아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에레즈의 죄목은 친족 살해와 작위 찬탈이다.
“바로 처리할 수는 없겠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고, 확실한 물증도 없어 보이니까.”
바스티아를 선대 가주에게 먹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구매 내역이 있지만, 증거로 삼기엔 너무도 약하다. 죄에 죄를 더해서 함께 터트린다면 모를까.
“7대 가문에 속하게 되면서 바우터의 이름을 가볍게 여길 수도 없게 되었어.”
아네타는 혀를 찼다.
러셀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일단 러셀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각자의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정보 공유의 값을 치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나의 사건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어떻게 그 사건을 잊고 있었지?’
깃펜을 쥐고 있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아네타는 서둘러 얼마 남지 않은 서류 뭉치를 끌어왔다. 한참을 뒤적이고 나서야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있었어.’
러셀은 지방 곳곳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게끔 했는데, 그중 하나가 폴터 자작의 영지에 있는 모단 고아원이다.
아네타가 발견한 서류는 바로 그 모단 고아원에서 보내온 청원서였다.
영지 주민의 혼인율이 급감하고, 그에 반비례하여 고아원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급증했다.
그로 인해 러셀의 현명한 복지 정책과 아네타의 노력으로 넉넉한 살림을 유지하고 있던 그곳은 여유가 있을 때 모아 두었던 돈마저 바닥나고 말았다며 예산 인상을 청해 왔다.
갑작스러운 현상의 표면적 이유는 결혼세를 대폭 인상한 것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영주인 폴터 자작이 결혼세를 내지 못하는 이에게 프리마 녹테(Primae noctis, 초야권), 즉 신부의 첫날밤을 요구한 것이다.
첫밤의 권리라는 웃기지도 않는 뜻을 지닌 그것은 옛날엔 그랬다더라, 하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허구였지만, 폴터 자작은 실제로 행했다.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니 혼인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이들이 늘었다. 그러다 낳은 아이는 그대로 혼외자가 되었다.
서류상 아무런 흔적도 없는 관계이니 정리하는 것도 쉬웠다. 그 과정에서 호적 없는 아이가 버려지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그러니 신원도 없이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들이 급증한 거겠지.’
이 사건은 본래 여행을 떠난 아네타 대신 에레즈가 처리해야 한다. 새로운 영광의 주인을 시험하기 위해 러셀이 맡긴 일이었다.
하지만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네타는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나서야 해결되는 일을 미리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피해자의 수가 늘어나는 걸 막고 에레즈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네타는 이 사건과 다른 일을 함께 처리하는 것으로 눈가림 혹은 변수의 대비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면 왜 하필 이 일에 중점을 두었냐는 물음 또한 나오지 않을 테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두 가지 목적을 단번에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불가피했다. 러셀의 허락이 있어야만 폴터 자작을 처벌할 수 있는 데다, 그는 이런 일에 특화된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던가.
아네타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칼로스.”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아네타는 보고 있던 서류를 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폐하의 직속 정보원들이 한 번 더 나서야 할 것 같은데.”
***
“왜 하필 이 일에 중점을 두었던 거지, 아데나워 후작?”
조사가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호출된 아네타는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는 러셀의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 냈다.
미연에 방지했다고 여겼던 질문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들려왔지만, 생각보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시치미를 뗄까, 하는 고민도 잠시였다. 그에게 그런 얕은 수가 통할 리 없었다.
“복지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니까요.”
아네타는 테이블 위에 늘어진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러셀이 보여 준 조사 결과는 원작과 같았다.
“예산은 당연히 올려 줄 예정이지만, 아무런 조치도 없이 줄 수는 없죠.”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변명 중 가장 이상적이고 적합한 말을 골랐다.
“당장은 상황이 나아질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그래서 원인부터 파악하고 제거하자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흐응.”
타당한 근거를 댔지만, 러셀은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럼 폴터 자작이 결혼세로 폭리를 취하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정치판에서 구르다 보면 싫어도 느는 게 눈치잖아요. 썩은 내가 진동하는 걸 느끼지 못할 리 없죠.”
이어지는 질문에도 아네타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예상대로 이 일은 파급력이 큰 사건이었고, 저희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이게 제가 드리는 정보의 값이에요.”
“바우터 남작을 말하는 건가. 그가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지?”
러셀은 꼬았던 다리를 풀어내며 물었다.
“관련은 없지만,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가에서 생길 일까지 보았으니 이번 일도 볼 수 있을지 몰라요.”
“주기가 일정하지 않다고 들었어. 언제 어디서 볼지 모른다고도 했고.”
잠자코 있던 칼로스가 끼어들자 아네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바로 그게 중점이라고 생각해. 이 일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의 능력은 과거를 보는 게 아니야. 폴터 자작의 처벌만 확실히 은폐한다면 프리마 녹테에 대해 알려질 일은 없지. 하지만…….”
아네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모든 게 끝난 후에 그가 이 일을 예언이라는 식으로 언급한다면…….”
“능력에 대해 감추고 있는 게 있다는 뜻이로군.”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리자 원하는 답이 돌아왔다.
“네.”
“좋다. 제법 괜찮은 생각을 했어.”
러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네타는 태연한 척하며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일단 폴터 자작의 처벌을 극비리에 진행해야겠군. 발티모어 공작, 이 일은 공작이 맡아서 처리하도록.”
“예, 폐하.”
러셀은 날카로이 벼려진 칼날 같은 기세를 보였다.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고요를 찢었다.
당장이라도 폴터 자작을 잡아와 도륙을 낸다 해도 이상치 않을 것 같았다.
러셀이 황제로서 지닌 자비는 오직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한 것이지,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 날붙이를 겨눈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추악한 일을 벌인 순간부터, 그는 러셀의 백성이 아닌 처단해야 할 피라미 따위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