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흑기사 (5)
아네타는 린든을 도와 칼로스를 부축한 채 복도를 걸었다.
그녀가 청을 들어준 것은 슬며시 고개를 든 호기심 때문이었다. 칼로스가 정말 침구에 자신이 쓰던 향수를 뿌리고 잠을 청하는지 궁금해서.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거라 여겼던 발티모어가의 저택은 여전했다. 이곳을 떠난 지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없이 걷던 와중에 갈림길이 나왔다. 아네타는 당연하다는 듯 왼쪽으로 가려 했지만, 린든의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붙잡았다.
“마님, 전하께서는 이쪽 침실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린든은 손으로 오른쪽 길을 가리켰다.
“아직도 부부 침실을?”
아네타가 가려고 했던 쪽에는 칼로스가 혼인 전에 사용했던 침실이 있었다. 집무실이 바로 옆에 있으니 편의상 그곳을 쓰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그곳에서만 잠을 청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청소를 제외하고는 손도 못 대게 하시어 침실뿐만 아니라 마님의 드레스룸이나 집무실 역시 그대로지요.”
린든은 칼로스를 위해서 답지 않게 말을 늘어놓았다.
전하께서는 당신의 자리를 지우지 않았으니 언제든 돌아오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그였다.
아네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지만.
침실에 도착하자 아네타는 칼로스를 침대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 큰 도움은 못 되었음에도 진이 빠졌다.
‘이제 남은 건 드레스 자락을 빼내는 일인데.’
가위를 가져다 달라고 할까. 문득 든 생각에 고민했지만,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돈이 썩어 난대도 멀쩡한 드레스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산 넘어 산이네.’
아네타는 침대 옆에 서서 칼로스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에 반응한 칼로스의 손이 움찔했다. 이거다 싶어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그의 손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렸다.
아네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 드레스 자락을 무리 없이 빼낼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뒤로 물렸다.
정확히 말하면 물리려 했었다.
그가 손목을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아네타는 딱딱한 손이 손목을 감싸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중심을 잃었다.
허물어지듯 그의 위로 쓰러진 아네타의 시야가 또 한 번 반전되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눕게 된 아네타는 단단한 몸 아래 자신을 가둔 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가지 마.”
정말이지 귀신같은 남자였다.
그의 몸과 함께 그녀의 몸을 뒤덮은 건 익숙한 향기였다. 설마 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네타는 무겁게 내리누르는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헤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게 빠져드는 늪 같았다.
“가지 말아 줘, 아네타.”
취기가 달큰하게 묻어나는 숨이 목덜미를 때렸다. 살갗에 스치는 숨결이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스며들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날 떠날 거잖아. 영영 내 손에, 잡혀 주지 않을 거잖아. 그러니 가지 마.”
아네타는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엉겨 붙는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네타, 사랑하는 아네타.”
슬픔에 젖은 음성이 파도가 되어 밀려들었다. 서글픈 일렁임은 아네타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했다.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준 상처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사실을.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애처롭게 애원하는 모습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차라리 둘 중 하나가 맨 정신일 때 하는 말이라면 떨치고 가 버릴 수라도 있을 텐데.
그녀 역시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마셔서 그런지 쉽게 거절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리는 주인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린든이 넌지시 물었다. 그 물음에는 미약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사랑 없이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관계였다. 그런 관계 속에서 연모의 감정을 품는 건 반칙이었다.
반칙을 범한 건 엄연히 칼로스였다. 그러니 아네타를 원망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고, 린든은 그녀가 칼로스 곁에 남아 주길 바랐다.
“요새 통 잠을 못 이루셨습니다. 마님께서 함께 있어 주시면 숙면을 취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본디 아네타는 이사벨을 연상케 하는 린든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는 갓 공작부인이 된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돕기까지 한 이가 아니던가.
그런 이의 부탁은 쉬이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네타는 한숨을 뱉었다. 어차피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결국 백기를 흔들었다.
“사용인들 입단속 잘 시키고, 이사벨에게 소식을 전해 줘.”
***
벌어진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 눈가를 어루만지는 아침.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칼로스는 믿을 수 없는 일과 마주했다.
그는 제 품에 안겨 잠든 아네타를 보며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네타 성격에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을 내린 그는 꿈에서라도 벅차오르는 행복을 만끽하고자 그녀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깼으면 이제 이 팔 좀 치워.”
연신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그에 불편함을 느낀 아네타가 단잠에서 깨어났다.
눈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어제 했던 고생이 줄지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날의 고생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 아네타는 엄지와 검지로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가볍게 당겼다.
허리에 두른 팔을 풀지 않고 버티던 칼로스가 아프네, 꿈이 아니었네 하고 중얼거리는 걸 듣던 그녀는 그를 밀어냈다.
다행히 그는 어제와 달리 순순히 밀려 나 주었다.
“그런데 당신이 웬일로 여기 있어?”
“당신이 가지 말라고 떼썼잖아.”
아네타의 입에서 어린아이에게나 쓸 법한 표현이 나오자, 칼로스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아네타가 세르세에게 가 버리고, 러셀과 가주들이 위로주라는 명목으로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이후로 암전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억 안 나?”
“전혀.”
칼로스는 오묘한 표정의 아네타를 보고 의문을 느끼며 제 몸의 변화를 살폈다.
훤히 드러난 상체에 이어 엉망으로 뜯긴 셔츠가 보이자, 그는 급히 앞섶을 여몄다.
“셔츠 단추가 왜…… 설마 당신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거 당신이 뜯었어. 내가 한 거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잠깐, 왜 실망하는 건데?”
“아니야?”
“아니래도.”
아네타는 이상야릇한 오해를 하고 있는 그를 보다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눕혔다. 오랜만에 단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나른했다.
“돌아가야 하는데, 조금 귀찮네.”
그동안 쉬지 않고 일했던 만큼 축적되었던 게으름이 둑 터진 댐처럼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여기서 다시 살아도 돼.”
“됐네요.”
“당신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거절에도 굴하지 않은 칼로스는 그녀에게 가까이 붙었다. 자연스럽게 뻗은 손이 익숙하다는 듯 그녀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가 일어나기 힘들어할 때마다 이렇게 해 주곤 했다.
아네타는 몸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느끼며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문득 그와 세르세의 입맞춤이 떠올랐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지.’
그녀가 배려 아닌 배려를 해 주는 사이, 담백했던 처음의 움직임은 점차 변해 갔다.
주무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갗을 쓸거나 지그시 누르기도 하는 등 사심을 채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묻어났다.
“칼로스. 은근슬쩍 사심 채우지 마.”
아네타는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티 났어?”
“많이.”
아네타는 이제 슬슬 아데나워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려고?”
“가야지.”
“조금만 더 있다 가. 식사는 하고 가야지.”
“아침은 저택에서 먹으면 돼.”
술김에 충동적인 선택을 했다며 후회하고 있던 그녀였기에 거절은 쉽게 나왔다.
“이사벨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아쉬움으로 점철된 칼로스의 눈동자를 외면하자, 때마침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마님, 아데나워가에서 의복을 보내왔습니다.”
린든이 문 너머에서 전해 온 말에 아네타는 그제야 제 옷차림을 살폈다. 밤새 그의 품에 안겨 있던 탓에 드레스 이곳저곳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확실히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네.”
“내가 잠깐 나가 있을 테니까 여기서 갈아입어.”
이미 서로 몇 번이고 본 몸이라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 싶었지만, 아네타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알았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칼로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문을 열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보였다.
린든은 칼로스가 복도로 나오자 눈짓으로 시녀들을 들여보냈다.
그는 칼로스의 배려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별다른 말없이 문을 닫았다.
“저희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마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린든이 들여보낸 시녀들은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공작가의 사용인 중 아네타를 전담하던 이들이었다.
덕분에 아네타는 편안한 마음으로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린든과 칼로스의 배려로 환복을 마치자, 시녀들은 서둘러 물러갈 채비를 했다.
전 안주인을 보는 그녀들의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졌지만,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린든의 당부가 있었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했어.”
홀로 남겨진 아네타는 정성스레 접힌 드레스를 보다 경황이 없어 살피지 못했던 침실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대체로 하얀 가구들이 주를 이루는 이곳은 린든의 말대로 사라진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다만, 빠져나간 것은 없어도 달라진 것은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향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책상. 둘 중 가장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후자였다.
처음엔 침실에 웬 책상을 두었나 싶었다. 그런데 찬찬히 훑어보니 그것은 그녀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
아네타는 가까이 다가가 책상을 살폈다. 기억에 남은 부분을 더듬자, 익숙한 흠집이 만져졌다.
책상을 새로 들인 날, 그녀가 실수로 낸 흠집이었다.
“쓰던 것은 어디에 두고 새것을 가져다 두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아네타는 기척 없이 문턱에 기대어 선 칼로스에게 말했다.
“제법 음험한 면이 있었네, 당신.”
아네타는 손으로 매끈한 상판을 쓸었다. 이 책상은 그녀가 떠나기 직전까지 황궁 집무실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대로 옮기려다 흠집이 나 있는 걸 발견하고 같은 걸로 사다 뒀어.”
칼로스는 하얀 손이 의미 없는 움직임을 반복하자 멈추었던 걸음을 뗐다.
“그건, 당신이 쓰던 거라고 생각하니 버리기 아까워져서 내가 가지고 왔고.”
지척에 다가온 그는 아네타의 손이 얹어진 상판 위로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종착지는 그녀의 손이었다.
손등을 살살 어루만지다 그 손을 그대로 제 뺨에 가져다 댄 그가 물었다.
“칭찬은 안 해 줘?”
“받고 싶어?”
아네타는 그가 했던 것처럼 조금은 거칠해진 뺨을 어루만졌다.
“해 줄 건가?”
칼로스가 부드러운 손길에 취한 듯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아네타는 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어림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