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흑기사 (4)
아무리 아네타가 알아주는 주량을 가진 이라 해도 제 얼굴만 한 잔을 비워 내기란 쉽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배가 불러 힘이 들었다. 그나마 안주를 덜 먹은 게 다행이라고 여기며 잔을 비워 내자 테르사가 박수를 쳤다.
“역시 아네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니까. 대신 마셔 준 대가로 소원 들어 달라고 해.”
“나중에 알아서 할게요. 보다시피 이 사람, 인사불성이라 기억도 못 할 테니까.”
아네타는 칼로스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움찔대며 반응했다.
“일어나, 칼로스.”
깨우기만 할 생각으로 그를 다시 한번 건드리자, 엎드려 있던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칼로스는 용케도 아네타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했는데, 뒤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친 아네타는 흠칫 놀랐다.
몽롱하게 풀린 그의 눈을 보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신, 설마.”
아네타의 직감은 정확했다. 칼로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두 팔을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해 줄 생각이 없었고, 그가 비틀대는 사이에 자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 허공을 더듬었다.
손끝에 누군가의 옷자락이 걸린 것도 그때였다. 아네타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빼며 손에 잡힌 무언가를 제가 있던 자리로 끌어왔다.
술이 들어간 터라 그녀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인 일이었다.
“잠깐, 아네타!”
아네타에 의해 희생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한 채 끊긴 목소리는 칼로스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낸 아네타는 칼로스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받고 있는 이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세르세?”
정확히 말하면 그의 분신일 터다.
세르세의 본체가 있는 자리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칼로스의 품에 있던 분신이 사라졌다.
“아네타, 너!”
마시고 있던 술이 떨어져 분신을 보냈던 세르세는 갑작스러운 봉변에 펄쩍 뛰었다.
분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본체의 몸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는 분명 능력을 해제하는 것과 동시에 잠시나마 칼로스의 입술을 느꼈을 터였다.
아네타는 멀리서 들려오는 접촉 사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충격을 받아 여기까지 올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당분간은 그를 피해 다녀야 할 것 같다.
“공작 전하, 괜찮으세요?”
세르세의 분신이 사라지자 바닥에 주저앉은 칼로스에게 다가간 이는 에레즈였다. 그는 드디어 고대하고 있던 일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제가 공작 전하를 마차까지 부축해 드려도 될까요?”
러셀은 노리는 게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눈동자를 읽어 내지 못할 이가 아니었다.
“아니. 오늘의 주인공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건 도리가 아니지.”
단번에 고개를 저은 그는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다른 이를 지목했다.
“공작을 마차까지 데려다주는 건 아무래도 로펠락 후작에게 맡겨야 할 것 같은데.”
에레즈는 자신과 칼로스 사이에 긴장감을 형성하는 전개가 흔적도 없이 부스러졌음을 느꼈다.
그나마 아네타의 이름이 불리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며 분한 마음을 삭이는데, 이어진 말은 일말의 안도마저 앗아 갔다.
“그럼 발티모어 공작과 아데나워 후작을 잘 부탁하지, 로펠락 후작.”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날벼락을 맞은 건 에레즈뿐만이 아니었다. 동의 없이 이름이 언급된 아네타는 테르사가 술잔을 내려 두고 다가오자 미간을 좁혔다.
“폐하, 그게 무슨…….”
목소리를 내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서 데리고 가. 러셀의 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아네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를 마차에 태운 뒤 자신 역시 저택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발티모어가의 마차는 돌려보냈다. 요즘 세상이 흉흉하니 아데나워 후작이 공작을 저택까지 잘 데려다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한탄을 삼킨 아네타는 칼로스를 가뿐히 부축한 채 나아가는 테르사의 뒤를 따랐다.
문을 닫고 나가는 과정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나도 도울게요.”
“됐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둘이서 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움직이기 불편하기도 하고.”
밀린 일 처리하느라 피곤할 테니 따라오기만 하라는 말에 아네타는 수긍했다. 그나마 그가 반쯤 정신을 잃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빨리 끝내고 가서 마시던 술이나 마저 마셔야지.”
테르사는 엉망으로 비틀대는 칼로스를 안정감 있게 붙들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라일이 또 각방 쓰자고 하면 어쩌려고요?”
“……들어갈 때 꽃다발이라도 하나 사갈까?”
“미리 말하지만, 꽃집 문이 열릴 때까지 마실 생각이라면 그만둬요.”
더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뻔해 미리 못 박아 두었다.
“칼로스가 없으니 폐하께서도 그리 오래 자리를 지키시지는 않을 거예요.”
아네타는 금방 자리가 파할 거라고 추측하며 마차 앞에 멈추어 섰다.
“문 정도는 열어 줘도 되죠?”
“마음대로.”
아네타가 마차 문을 열자 칼로스는 곧장 그 안으로 옮겨졌다.
부하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난 테르사는 장정 하나를 옮겼음에도 힘든 기색은커녕 숨결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임무를 마쳤으니 나는 이만 실례.”
손을 설렁설렁 흔들며 부리나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던 아네타는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각하. 그런데 어째서 공작 전하를 마차에……?”
대기하고 있던 마부는 주인이 술에 취한 전남편과 함께 나타난 것에 대한 당혹감을 감추며 차분히 물었다.
“폐하께서 데려다주라고 명하셨어. 그러니 먼저 발티모어 저택으로 가 줘.”
아네타는 그 말을 끝으로 마차에 올랐다. 문을 닫고 고개를 돌리자 마차 벽에 기대어 잠든 칼로스가 보인다.
아네타는 잠시 뒤 그에게 두었던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공작저와 후작저는 황궁을 기준으로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지만, 이 길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후작저로 향하는 길만큼이나 익숙했다. 이렇게 보니 4년이라는 세월이 짧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아네타.”
새삼스러운 감상을 느끼는 사이, 달밤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짙게 깔린 어둠처럼 낮은 음성과 함께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소원이, 뭐야?”
술에 취해 몸도 못 가누던 와중에 용케 그 말을 들었구나 싶었다.
“없어.”
소원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듯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 하지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거짓말.”
“있어도…… 당신이 들어줄 수 없는 거야.”
어린 날의 눈물로 얼룩진 체념을 감추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그녀의 감정을 세세히 살필 겨를이 없다는 거였다.
“난,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뭐든지?”
“응. 내 몸을 원한대도 기꺼이.”
정확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꼬인 발음이었다. 아네타가 이제 그럴 일 없다고 대꾸하려는데, 그보다는 그가 머리의 통제를 벗어난 몸을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칼로스는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앞섶을 쥐고 아무렇게나 힘을 주었다.
표현 그대로 쥐어뜯은 탓에 그 힘을 버티지 못한 단추가 튕겨 나갔다.
“당신, 취한 거 아니지.”
발치에서 나뒹구는 단추를 보던 아네타는 미심쩍은 눈을 하며 물었다.
이 남자가 지금 수 쓰는 건가 싶은 그때,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덜컹거렸다. 그 충격에 여전히 앞섶을 붙잡고 있던 칼로스가 중심을 잃었다.
아네타는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지는 그의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끌어안은 몸에서 피어난 열기가 서늘한 살갗에 맞닿았다.
“하아…….”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깊은 숨을 토해 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지, 칼로스는 저를 안은 품에 파고들었다.
“사랑해, 아네타.”
불편한 자세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칼로스는 웅얼거리듯 속삭였다.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그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사랑해.”
처음 듣는 고백은 아니었지만, 그를 밀어내려던 손이 멈칫했다. 칼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쪽,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간 입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로 다시 얹어졌다.
“내 몸도 마음도, 이미 당신 거야.”
그 마음만은 절대 변치 않을 거라는 장담과 함께 그의 눈이 반쯤 감겼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걸 보니 잠들기 직전의 상태인 것 같았다.
“알았으니까, 이제 당신 자리로 가서 제대로 앉아. 불편하잖아.”
“안 불편해. 이대로 있게 해 줘.”
“날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며.”
“지금은 취해서 안 돼.”
“취했다는 자각은 있구나.”
칼로스는 그녀를 제게 옭아매듯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더했다. 술 냄새와 뒤섞인 향기마저도 달게만 느껴졌다.
“어지러워. 머리도 아프고 속도 좀 안 좋은 것 같군.”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질투 나서 그랬어. 당신 때문이니까…… 책임져.”
말을 이어 나가던 순간마다 아슬아슬하더니 그는 결국 수마에 잠겼다. 이 틈을 타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허리에 감긴 팔의 힘은 그대로였다.
가주들 중 테르사 다음으로 술이 센 그녀지만, 적은 양을 마신 게 아닌지라 몇 번의 시도 끝에 지쳐 포기하고 말았다.
아네타는 괘씸한 마음에 그의 볼을 찔렀다. 손끝에서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작은 미동을 보이자 이미 흐트러진 옷차림이 더욱 엉망이 됐다.
깔끔한 디자인의 베스트 아래로 반쯤 입을 벌리고 있는 셔츠는 그의 단련된 상체를 은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속살이 보이자 아네타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조심성을 좀 길러야 할 것 같아.”
그의 몸을 보니 이혼 전에 그와 보냈던 밤들이 떠올랐다. 어쩐지 야릇한 기분이 들어 아네타는 힘겹게 그의 앞섶을 여며 주었다.
단추가 떨어져 나간 탓에 별다른 소용은 없었지만.
칼로스는 잠든 와중에도 느껴지는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 것처럼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배부른 맹수와도 같은 얼굴이 얄미워지려던 찰나,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익숙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각하, 발티모어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문 좀 열어 줘.”
마부의 알림을 들었지만, 칼로스에게 잡힌 상태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네타가 난감한 투로 말하자, 곧이어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린든.”
문을 연 이는 마부가 아닌 공작가의 집사 린든 메이거였다. 아네타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이전의 호칭 그대로 그녀를 칭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님.”
“호칭이 그대로네.”
“공작 전하께서 이번 대의 발티모어 공작부인은 오직 아네타 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마님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아네타는 호칭 정정을 요구하려다, 이내 관두었다. 린든은 이사벨만큼이나 제 주인에게 충직했고 칼로스의 뜻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지지하고 따를 이였다.
“그런데 전하께서 상당히 취하신 듯합니다.”
티 나지 않게 마차 내부를 훑던 린든은 흐트러진 칼로스의 모습을 보고 상태를 파악했다.
“오늘따라 조절을 못 하는 것 같았어.”
아네타는 자세한 언급을 피했지만, 린든은 알 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필시 아네타와 관련된 일일 거라 짐작하는 그의 얼굴에 확신이 서렸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주인이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셔 댈 일은 없을 테니까.
“어서 데리고 들어가.”
“예, 알겠습니다.”
린든은 조심스레 마차에 올랐다. 칼로스가 아네타와 밀착하다시피 붙어 있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아네타는 그를 돕기 위해 움직였고, 그 덕에 린든은 한결 수월하게 칼로스를 떼어 낼 수 있었다.
단 하나, 아네타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은 손을 제외하고는.
아네타는 칼로스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애썼지만, 그는 절대 손을 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억센 힘으로 움켜쥐는 것을 본 린든은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님, 송구스러운 청입니다만, 침실까지 동행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