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흑기사 (3)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냉기가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에레즈의 입술은 여전히 자유롭게 움직였다.
“혹시 기록이 잘못된 게 아닐까요?”
분홍빛이 감도는 입술은 꽃잎같이 사랑스럽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말은 아니었다.
되도 않는 머리 굴림이 어떤 상황을 초래할지 궁금하다. 그런 이유로 순순히 응해 주던 아네타는 헛웃음을 지었다.
칼로스와 이어질지도 모르는 이에 대한 기대감은 그 생각 없는 언행에 의해 박살이 난 지 오래였다.
모든 걸 제 손에 쥐고 휘두르려 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이 구는 어린아이 같았다.
“바우터 남작.”
아네타가 실소를 머금는 사이, 그녀를 대신해 칼로스가 나섰다. 그는 서슬 퍼런 눈으로 에레즈를 응시하며 경고를 전하려 했다.
“발티모어 공작, 잠시 가만히 있어 주게나.”
에레즈 바우터는 선을 넘었다. 그것도 완벽히.
그 사실을 증명하듯 잠자코 있던 클로린 공작이 양해를 구하며 칼로스의 말을 가로챘다.
“대답해 보게, 바우터 남작. 남작은 지금 관망의 영광이 잘못된 기록을 남겼다고 말하는 겐가?”
에레즈가 보인 무례함은 그들 사이에서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노기 띤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에레즈의 녹안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이용해 살살 웃으며 말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주인공들은 항상 도가 지나친 행동을 해도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방금 남작이 생각 없이 꺼낸 말은 아데나워와 클로린에 대한 모욕이자 도전일세.”
에레즈는 살갗을 찌르듯 날 선 목소리에 입만 벙긋대었다. 어째서 자신이 비난을 듣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다른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에레즈는 더욱 다급하게 눈을 굴렸다. 그 순간 러셀과 눈이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라면 지금의 상황을 끝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에레즈가 일말의 희망을 담아 러셀을 응시하자, 그의 입매가 위험스레 휘어진다.
“클로린 공작. 그쯤 하도록.”
“하오나, 폐하.”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건 바우터 남작의 환영식을 위해서이지 않나. 그러니 오늘만큼은 내 얼굴을 봐서라도 실수를 눈감아 주게.”
러셀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수습하며 제 편을 들어주는 듯하자, 에레즈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피었다.
“하지만 무례를 저질렀으면 사과는 해야겠지.”
그러나 에레즈의 생각과 달리, 러셀은 완전히 그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안 그런가, 발티모어 공작?”
“예, 폐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칼로스가 기다렸다는 듯 힘을 싣자, 러셀은 턱짓으로 그를 재촉했다.
“어서 아데나워 후작과 클로린 공작에게 사과하도록.”
에레즈가 배신이라도 당한 듯 자신과 칼로스를 바라보았지만 러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작 각하, 공작 전하.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물러날 곳을 찾지 못한 에레즈는 결국 사과를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조연 따위에게 허리를 숙이다니. 게다가 그중 하나는 아네타 아데나워다. 그에겐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바라고 모이라고 한 것이 아닌데.”
“분위기 푸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습니다. 안으로 들이라고 할까요, 폐하?”
러셀이 혀를 차자 테르사가 분위기의 전환점을 찾아 끼어들었다.
“그게 좋겠군.”
부름을 듣고 들어온 사용인들이 술과 안주를 놓고 떠나자, 테이블 위를 바라보는 테르사의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후작, 그러다 입이 찢어지겠어.”
후작 부군의 근심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러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환영식은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정작 주인공은 지은 죄가 있어 가시방석이었지만, 자업자득이다.
늘 그랬듯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건 테르사와 헤첸 백작이었다.
수입과 수출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아네타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찾는 얼굴은 다른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지극히 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 아네타는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본 칼로스 역시 따라나서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등을 돌린 채 다른 이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던 칼로스는 곁에 있던 이들로 인해 자연스레 술잔을 손에 쥐게 되었다.
“자자, 이거라도 마시고 힘내세요.”
“아데나워 후작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로군.”
칼로스의 절절한 짝사랑을 알고 있는 가주들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아네타는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이에게 다가갔다.
“세르세.”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든 그의 어깨로 길고 곧은 적발이 흘러내렸다. 이런 자리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그의 미간은 살포시 찡그려져 있었다.
“앉을래?”
세르세 라폴리. 라폴리 자작가의 가주인 그는 데면데면한 소꿉친구에게 자리를 권했다.
“사양하지 않을게.”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던 아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흔한 인사 한 번 없는 것이 퍽 그들다웠다.
세르세는 제 앞에 앉는 아네타를 보며 분신의 영광이 끼워진 손을 들었다. 투박한 반지 위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가 빛을 발하자, 그녀의 곁에 그의 분신이 생겨났다.
세르세의 분신은 말없이 아네타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던 그녀는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너라면, 찬연의 영광에 관심을 보이며 달려들어야 했을 텐데. 어쩐 일로 이렇게 얌전해?”
아름다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였다. 그런 그가 달려들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반짝인다고 전부 금은 아니잖아.”
어깨를 으쓱여 보인 것은 본체였지만, 물음에 답한 건 그가 아니었다. 지척에 앉은 분신은 작은 목소리로 유명한 문학 작품에서 나온 말을 인용했다.
“겉만 그럴싸하면 뭐 해. 속은 시커멓게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는데.”
분신의 입을 빌린 세르세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고의로 무지를 가장했다는 걸 눈치챈 그가 에레즈를 향해 내린 평은 가차 없었다.
“나는 외면의 아름다움만큼 내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저런 거엔 관심 없어.”
날이 선 말에 아네타는 웃었다. 세르세는 지금 그녀를 위해 화를 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넌 화내는 모습도 예쁘네.”
진심을 담은 말에 누구보다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칼로스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는 선명히 들린 아네타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제게는 한 번도 해 준 적 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배신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아네타는 그의 시선을 가뿐히 외면했다.
“저기서 네 전남편이 배신당한 얼굴로 보고 있는데.”
“알고 있어.”
“왜 뜬금없이 그런 칭찬을 하는 거야?”
순간 심장이 덜컹거린 것도 같다. 우스운 감상에 헛웃음을 지은 세르세가 묻자 아네타는 무료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네가 예쁜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여전하네, 넌.”
“나야 항상 그렇지.”
“그러고 보면 넌 어릴 때부터 항상 내게 예쁘다는 말을 해 줬어.”
“네가 예쁘지 않았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영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닌지라 세르세는 그녀의 칭찬을 안주 삼아 브랜디를 머금었다. 잔을 쥔 손끝에 뜨거운 열기가 맺히는 것은 모두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술 때문이리라.
“그중에서 가장 예뻤을 때가 언제인데?”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드레스 입고 있었잖아, 너.”
“아아, 기억나. 어머니께서 억지로 입히셨었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던 그는 혀끝에 쓰디쓴 세월의 흐름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가끔은 그때가 그리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을 만큼.”
어머니께서 자꾸 드레스를 입히려 드는 게 유일한 고민이었던 시절. 불만에 차 두 볼을 퉁퉁 부풀리던 어린 날의 제 모습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허탈함이 번졌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참 좋았는데.”
너무도 커 버린 지금은 어깨에 진 짐이 무거워도 달려야 했고, 뛰다가 지쳐도 멈출 수 없었다.
무엇 하나 포기하는 순간 낙오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세상은 지독히도 잔혹했다.
내달림의 끝은 있을까, 그 끝은 결국 낭떠러지가 아닐까.
온갖 불안에 사로잡힌 채 방황하던 기억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라, 세르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는 어때. 돈 잘 쓰는 아버지는 여전하셔?”
“여전하지.”
아네타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그녀가 질문할 차례였다.
“그러는 네 철없는 형님들은 어때?”
“이쪽도 여전해.”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애초에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들의 알량한 친목으로 시작되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너나 나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건지.”
“글쎄. 너는 몰라도 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세르세는 진담을 농담으로 치부했고, 아네타는 그러려니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높은 도수의 브랜디를 넘기자 목구멍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난 추억이 남긴, 희미하기 짝이 없는 단맛조차 이제는 가치를 잃었다.
“얼간이 같은 형들은 아직도 내가 어머니의 사업을 가업으로 택한 걸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야.”
온갖 더러운 꼴은 다 보고 자란 아네타가 보기에도 그의 인생은 평탄하다 할 수 없었다. 막내인 그가 가주 자리에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기들이 물 쓰듯 쓰던 돈이 다 망해 가는 사업을 억지로 붙들고 있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나왔는데도 말이야.”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쪽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어. 잘 선택한 거야.”
“너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무덤덤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세르세는 위안을 얻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듣기 좋은 소리만 해 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에 미친 누구 씨가 퍽 처량해 보여서 말이야. 네가 만드는 드레스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아네타는 자작을 이어 나가는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았다.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시면서도 자세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대화 주제는 어느새 세르세의 작업 이야기로 넘어가 있었다.
“최근에 역작을 만들어 냈는데 남 주긴 아까워. 차라리 내가 입을까.”
“그러던지. 오랜만에 어린 시절 생각나고 좋겠네.”
어차피 사람 입으라고 만든 옷에 성별이 어디 있겠는가. 아네타는 네 맘대로 하라며 그의 분신에게 잔을 내밀었다.
“예쁘게 생긴 애가 예쁜 걸 좋아하는 거, 보기 좋아.”
키도 테르사와 엇비슷하고 드레스를 걸쳐도 위화감이 없는 미모이니 감쪽같기는 하겠다. 아네타는 드레스를 입은 세르세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상상하지 마. 농담이었으니까.”
“이미 늦었어.”
두 사람이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 뒤쪽에 모여 있던 이들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
아네타가 칼로스를 발견한 것은 그가 완전히 취해 버린 뒤였다. 술꾼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가장 약한 주량을 가진 이가 바로 그였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저쪽으로 갈 거지? 나는 됐으니까 혼자 가.”
“미안. 먼저 실례할게.”
이대로 그는 에레즈와 키스하게 될까.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과는 달리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몸은 흔들림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그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그는 잠든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엉망으로 취할 때까지 말리지 않으셨네요.”
“말려 주길 바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내버려 뒀지. 그런데 아무래도 그 사람이 너무 늦은 것 같군. 저리도 몸을 못 가눠서야.”
아네타는 이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걸 느꼈다. 주축이 된 이는 높은 확률로 러셀일 터였다.
“저택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아직 공작께서 마셔야 할 술이 남아 있는데?”
테르사가 짓궂게 웃으며 그의 앞에 놓인 술잔을 가리키자, 아네타는 한숨을 쉬었다.
“흑기사?”
대신 마실 거냐는 뜻을 담아 헤첸 백작이 묻자, 아네타는 망설임 없이 잔을 집어 들었다.
“다들 그러길 바라는 것 같은데,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