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흑기사 (2)
아네타는 에레즈의 환영식이 열리는 날까지 정신없이 바빴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출근해서는 복지부 서류, 퇴근 후에는 집안 서류 처리에 몰두했다.
능률은 날이 갈수록 줄어 갔다. 그녀 역시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밀린 일을 해 나갔고, 결국 보다 못한 이사벨이 나섰다.
“이러다 정말 쓰러지실까 겁이 납니다.”
환영식 당일까지도 어김없이 집무실에 틀어박힐 예정이었던 아네타는 멈칫했다. 여상한 투로 하는 말에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아직 버틸 만해.”
“억지로 버티고 계신 것이겠지요. 다른 이들은 속여도 저를 속이실 수는 없을 겁니다, 각하.”
시치미를 떼 보아도 그녀의 집사는 강경했다.
아네타의 체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사벨은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해 온 이였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도로 돌아오신 후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무리한 일정을 강행하시니 제 걱정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이 이사벨을 봐서라도 환영식 전까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환영식이 시작되는 건 저녁이었다. 이사벨의 청은 오늘 하루 서류를 보지 말라는 뜻이었고, 아네타는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럼 믿고 있겠습니다.”
믿겠다는 말과 달리, 이사벨은 사용인을 불러 서류를 집무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두라고 지시했다.
“믿겠다면서 서류는 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야?”
“믿음을 이어 가기 위해서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사벨은 아네타가 세상에 난 순간부터 그녀를 겪어 왔다. 쉬는 척하다가 자신이 자리를 뜨면 다시금 서류를 손에 쥘 것을 알기에 미연에 방지한 것이었다.
“내가 졌어.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쉴게.”
아네타는 이사벨의 철저함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수를 궁리하는 것보다는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게 이로울 듯했다.
결국 오전 내내 눈을 붙인 아네타가 저택을 나선 건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잔잔히 부유하던 붉음이 더욱 아릿하게 스며드는 저녁. 아네타는 황궁에 들어서기에 앞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낮게 가라앉자, 낮과 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 위로 경계 없이 흐드러진 색색의 빛깔은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잔상을 더욱 짙게 물들였다.
추억 속에 존재하는 미완의 그림. 그 안에도 눈앞에 있는 것과 같은 일그러진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어린 날의 그녀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림이 완성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림이 화려한 빛으로 물들고 현실감을 더해 갈수록, 어머니 엘레나의 낯빛은 희게 질려 갔다.
마치 그림 속의 황혼이 어머니가 지닌 색과 숨을 앗아 가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병을 얻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완성되지 못한 그림이 맞이한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가 되어 버린 그것은 이승을 떠난 어머니의 살갗과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붉게, 붉게 타오르던 그것의 끝은 되돌릴 수 없는, 그리고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무의 색이었다.
황혼. 세상의 질서가 어그러지는 찰나의 순간. 그 안에서 아네타는 속절없이 헤매었다.
사위를 둘러싼 붉음은 이제 그녀마저 붉게 물들이려 너울댔다.
그때였다.
“아네타?”
칼로스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네타는 어둠에 물들어 있는 그를 보았다. 빛을 등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칼로스 발티모어라는 남자가 제게 어떤 존재가 될지 가늠할 수 없어 막연하기도 했다.
지금 그와 그녀는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 서 있었다.
***
환영식이 열리는 스테렌 궁은 본래 황제의 직계 혈족이 다과회를 여는 장소였다.
더불어 러셀의 대에 들어선 뒤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기에 칼로스를 제외한 다른 가주들은 발 한 번 들인 적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런 곳의 문을 특정 인물의 환영식을 위해 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특별 대우라고 여길 만도 했다.
‘바로 그런 점을 노린 거겠지.’
아네타는 힐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명시되었던 시간에서 20분쯤 흐른 지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는 한 명뿐이었다.
그 한 명은 황제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러셀은 상석에 앉아 시계를 보고 있었다.
“바우터 남작이 늦는군.”
주인공이 없어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는 꼴이 우습다. 러셀이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자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바우터 남작가를 제외한 영광의 가문은 이미 5년 전에 아데나워 후작가를 마지막으로 세대교체를 끝냈다.
앞으로 오래도록 얼굴을 마주하게 될 관계인만큼 서로 간의 신뢰를 쌓으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상책인데, 에레즈는 그걸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본 중의 기본인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시간을 내어 준다는 것의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하물며 황제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니 좋게 생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주인공은 언제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는 소설 속의 정설을 흉내 내듯, 에레즈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수분이 흐른 뒤였다.
“빨리도 오는군.”
“죄송합니다, 폐하.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다 보니 그만…….”
에레즈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거짓을 말했다. 그 말이 황제의 명보다 다른 일을 우선시했다는 뜻과 같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였다.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러셀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더는 이에 대해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넘겨 버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좋게 넘어갈 줄 알았다는 듯 활짝 웃어 보인 에레즈는 많고 많은 자리 중 칼로스의 옆자리를 택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주들이 그를 질책하지 않은 건 황제가 먼저 이 일을 넘겼기 때문이었다. 주군이 넘긴 일을 신하인 그들이 물고 늘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네타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착각에 싱글벙글한 낯을 하고 있는 에레즈를 훑었다.
어딜 봐도 서류보다 단장에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는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 오늘을 위해 브렌델 지방의 술을 사들이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좋다고 할 수 없는 분위기를 환기한 사람은 테르사였다. 그녀는 부러 술에 죽고 술에 사는 술꾼의 면모를 드러냈다.
“사실이다. 로펠락 후작은 항상 이런 일에만 소식이 빠른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칭찬이 아니야. 후작에게는 배우자와 동반 참석을 명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하, 하하. 부디 그것만은…….”
뻔뻔하게 응수하던 테르사는 로펠락 후작 부군이 언급되자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술에 취해 들어갈 때마다 싸늘한 음성으로 당분간 각방이라고 말하는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두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네타도 잘 알고 있었다. 각방만은 안 된다고 처절하게 외치던 테르사를 목격한 적이 있기에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미미한 변화에 반응을 보이는 이는 셋이었다. 그녀를 주시하던 칼로스는 안심하며 시선을 돌렸고, 테르사는 찡긋 윙크를 날렸다.
그 장난스러움에 아네타의 웃음이 더욱 짙어지자, 그 모습을 남몰래 아니꼽게 바라보던 나머지 하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에레즈는 자신이 받아야 마땅한 관심을 아네타가 받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 자리의 주인공으로서 그들의 관심을 끌어 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반짝 떠오른 술수를 이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술을 들이기 전에 여러분들이 지닌 영광의 능력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에레즈도 그들의 능력쯤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러 묻는 건 아네타에게 무안을 주고 가주들의 관심을 받길 바라서였다.
아네타는 그 얕은 술수를 눈치챘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제 무덤을 파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바우터 남작, 혹시 폐하께서 소유하신 자비의 영광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겁니까?”
헤첸 백작이 아무리 몰라도 이건 알겠지, 하는 심정으로 물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네. 제가 시골에 있는 영지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시골 영지에서 지내왔다는 말로는 영광에 대한 무지를 이해받을 수 없다. 교육 환경이 열악하다 알려진 마을의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것이 영광의 능력이었으니까.
보아하니 무지와 순수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 선상에 둔 듯한데, 어림도 없는 짓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러한 무지를 기껍게 여길 자들이 아니었다.
“……그럼 당연히 알려 주어야죠.”
헤첸 백작은 느낀 바를 드러내지 않고자 노력했다.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레즈를 제외한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폐하, 제가 바우터 남작에게 자비의 영광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되겠습니까?”
“좋다.”
러셀은 총대를 메게 된 헤첸 백작을 안쓰럽게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헤첸 백작은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시작했다.
“자비의 영광이라고 불리는 커타나는 건국제의 검이자 황제의 상징입니다. 의장용 검이라 끝이 뭉툭하고 날이 없지만, 검의 인정을 받는다면 강한 위력을 낼 수 있습니다.”
자비의 영광을 제대로 다룬 이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극소수였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황제들은 이 검을 의장용으로만 사용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그들의 황제는 달랐다. 러셀은 역대 황제 중 가장 완벽하게 자비의 영광을 다룰 줄 알았다.
“제가 가진 수호의 영광은 주인의 몸을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합니다. 하지만 보호의 범위는 가주 본인에게만 한정됩니다.”
헤첸 백작은 자비의 영광에 이어 자신이 가진 수호의 영광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가슴에 달고 있던 방패 모양의 브로치를 보인 그가 눈짓하자, 이미 관망의 능력을 보인 클로린 공작을 제외한 다른 가주들이 설명을 이어 갔다.
독수리로 모습을 바꾸고 공기의 파동을 다룰 수 있는 창공의 영광, 시위를 당기면 하나의 화살이 수백이 되어 비처럼 쏟아지는 관통의 영광, 주인의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신의 영광.
차례대로 발티모어의 팔찌, 로펠락의 활, 라폴리의 반지가 소개되자 남은 건 또다시 아네타뿐이었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인사를 나누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남은 건 이적의 영광인가요?”
아네타와 눈이 마주친 에레즈는 어서 말해 달라는 듯 웃었다. 그건 그녀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자의 웃음이었다.
“이적의 영광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건 없어요. 능력은커녕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
이적(異蹟)이라는 이름은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원작 후기에서 언급된 말에 따르면, 아데나워 후작가가 영광의 가문 중 하나라는 건 작가가 칼로스와 급을 맞추기 위해 급조한 설정이었다.
명색이 남주인공의 전 부인인데 그만한 구색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에서 기인된 그것은 자세히 다루어질 가치도 없다는 듯 불명으로 설정되었다.
아네타가 지금껏 이적의 영광을 찾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 봤자 헛수고일 테니까.
“네에?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요?”
“그래요. 아데나워는 관망의 영광이 영광의 가문이라는 걸 증명해 주었기에 명예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에레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반쪽짜리 영광이네요?”
순하게 처진 눈매 아래로 감춘 것은 분명한 적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