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흑기사 (1)
“바꿨어.”
아네타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묻는 그를 보다 긍정했다. 무심함을 가장한 대답에 그의 낯빛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어떤 걸로?”
이유를 물을 거라는 짐작과는 다르게,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 게 왜 궁금해?”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아네타는 새로 바꾼 향수에 관심을 갖는 그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침구에 뿌려 놓으려고.”
“뭐?”
예상치 못한 말의 연속이었다. 아네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왜 거기다 뿌려?”
“당신 끌어안고 자는 게 습관이 됐는데, 이젠 그럴 수 없으니까.”
원작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아네타는 습관적으로 지금의 상황과 원작을 비교했다.
칼로스가 아네타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초반에 종종 나왔지만, 침구에 그녀의 향수를 뿌렸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향수라도 뿌려 놓으면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것 같잖아.”
“설마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던 거야?”
“응. 그러니까 알려 줘.”
지금 보니 이 남자, 제법 뻔뻔한 요구를 할 줄도 알았다. 아네타는 헛웃음을 짓다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래.”
방금 보였던 뻔뻔함으로 밀어붙일 줄 알았는데. 그는 한 번의 물음을 끝으로 깔끔히 수긍했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네.”
“내가 직접 알아내면 되는 거니까. 굳이 그런 걸로 당신을 귀찮게 할 수는 없지.”
능력으로 인해 후각이 예민한 그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혀를 찼다.
“변태.”
“맞아.”
칼로스는 스스럼없는 긍정과 함께 몸을 반쯤 일으켰다.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어 그녀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윽하면서도 매혹적인 향이 훅 끼쳐 왔다.
아이리스와 로즈 버드의 조화는 그의 마음을 속절없이 뒤흔들었다.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발끝마저 저릿했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건 당신 한정이지.”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각에 칼로스는 몸을 내맡겼다. 그는 아네타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뜨거운 입술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혀가 찻물로 적셔진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사방이 고요에 잠긴 채, 젖은 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아찔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미미한 맛에, 칼로스는 이비코스 차가 전보다 더 좋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탐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녀가 머금은 붉음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고 있지만, 굳게 맞물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칼로스는 마지막으로 아네타의 입술을 진득이 핥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밀어내지도, 입맞춤에 응하지도 않았다.
칼로스는 심연의 바다처럼 짙푸른 시선이 저의 행동을 좇기만 하는 것에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맞대고 있던 입술이 떨어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칼로스는 몸을 뒤로 물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거리가 벌어지자 폐부를 가득 채우던 향기가 내쉬는 숨을 타고 허무하게 흩어졌다.
아쉽고 서운한 건 사실이지만, 이전의 것보다 지금의 향이 그녀에게 더 잘 어울렸다.
칼로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하고 제 선물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당신, 나더러 친구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이게 친구끼리 할 행동이던가.”
“확실히 친구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지만, 난 당신의 연인이 되고 싶은 친구라서.”
칼로스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말했잖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그러나 아네타는 이번에도 역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 그건 유혹?”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묻는 그녀의 태도는 그보다 더 여유로웠다.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럼 아니겠네. 당신 방금 티르 같았거든.”
“티르…….”
칼로스는 아네타의 비유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르는 그가 공작저에서 키우는 반려견이었기 때문이다.
큰맘 먹고 행한 유혹이 반려견의 애교와 동일시되었다.
칼로스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 이제 하던 일이나 마저 해야겠어.”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박한 평가를 내린 아네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따라붙는 원망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체했다.
앞으로 그를 대하는 태도는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받아 주되, 받아 주지 않는다. 아네타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그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길 원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책상 한편에 쌓인 서류를 끌어온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념에 젖을 시간 따위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
두 사람의 집무실에 방문객이 찾아온 건 그녀가 오늘의 할당량을 거의 끝내갈 무렵이었다.
깃펜과 종이가 마찰하여 나는 소리만이 머물던 공간 앞에 낯선 그림자가 졌다.
“발티모어 공작 전하, 아데나워 후작 각하. 황제 폐하의 명으로 두 분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도 될는지요?”
문 앞에 선 누군가가 정중한 노크와 함께 예고 없는 방문을 알려 오자 아네타의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 마주치는 시선에 아네타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칼로스. 아는 거 있어?”
“짐작 가는 건 있어.”
칼로스는 애매한 대답과 함께 그의 출입을 허했다.
“들어와도 좋다.”
허락과 함께 들어선 이는 황제궁 소속임을 상징하는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오다가다 본 얼굴이었으니 칼로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분 영광을 뵙습니다.”
“폐하를 모시느라 수고가 많군. 그런데 전해야 하는 것이라니?”
“이것입니다”
시종은 먼저 칼로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었고, 다음은 그녀 차례였다.
금빛 인장이 찍힌 붉은 봉투.
익숙한 물건이 책상 위에 올라오자, 아네타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애써 감추었다.
처음 그것을 받아 든 시점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꺼려질 만도 했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어야 했을 친필 서신을 두 번씩이나, 그것도 며칠 간격으로 받다니. 감읍하기는커녕 황공함에 짓눌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네타는 시종이 물러간 후에도 봉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먼저 봉투를 뜯었다.
“……폐하께서 에레즈 바우터의 환영식을 열어 주신다는군.”
익숙한 필체로 쓰여 있는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묘한 표정으로 운을 떼었다.
“날짜는, 사흘 뒤. 내게 말씀하셨던 것보다 일정을 앞당기셨어.”
“장소는?”
“황궁. 영광의 주인들만 부르실 모양이야. 참석에 대한 선택권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것 같고.”
아네타는 뒤늦게 봉투로 손을 뻗었다. 내용은 모두 같은지 그가 말한 것 외에 다른 내용은 없었다.
“전원 참석을 명하시다니. 이례적인 일이네.”
의식 때도 보내지 않는 서신까지 보내며 영광의 주인들을 불러 모은다. 이는 필히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대우의 목적은 뻔했다. 아네타는 서신을 도로 접어 넣으며 물었다.
“의식이 끝난 뒤에 있었던 일 때문이지?”
“정확해.”
칼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환영식은 특별 대우를 가장한 시험이 될 거야.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폐하께서 주의를 기울이고 계시지.”
에레즈의 환영식은 원작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계기 자체가 다르다.
러셀은 마음에 드는 인재를 환영하는 의미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가, 에레즈가 칼로스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이곳의 러셀은 에레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거기에 미심쩍은 모습까지 보였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순수한 의미로 환영식을 열어줄 리 없었다.
뼛속까지 지배자의 기질을 타고난 러셀이라면 아마 에레즈를 낱낱이 관찰할 터였다.
불 보듯 뻔한 짐작을 끝낸 아네타는 손끝으로 봉투의 각진 모서리를 매만지길 반복했다.
그 무의미한 움직임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는 첫 번째 챕터의 막을 내리는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술에 취한 칼로스와 그에게 충동적으로 입맞춤하는 에레즈.
그때까지만 해도 입맞춤 상대라고는 아네타밖에 없었던 그는 에레즈를 그녀라고 착각하고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처럼 에레즈를 몰아붙였다.
독자들이 실망하며 아우성쳤던 두 사람의 키스를 떠올린 아네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내 입술에 미련이라도 남은 건가?”
너무 대놓고 바라본 탓일까. 그는 금세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눈치챘다.
휘어진 눈매 아래로 기대를 품은 금안이 반짝였다.
“정말 그런 거라면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줘. 행동으로 옮기는 건 내가 하지.”
“내가 보기엔 미련이 남은 사람은 당신 같은데.”
받아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네타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턱을 괴었다. 들켰으니 대놓고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긍정하는 순간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를 보이는 그가 낯설지 않았다. 저런 얼굴을 하고도 지금껏 키스 상대가 그녀 하나뿐이라니.
아네타는 알면서도 믿기지 않아 물었다.
“당신,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키스해 본 적 있어?”
그가 어찌 반응할지 궁금했다.
“없어. 그러니 내 정조를 의심하진 말아 줘, 아네타.”
당황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 역시 예상한 바는 아니었다.
정조라니. 더는 그런 걸 지킬 관계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은데.”
“전혀.”
돌아오는 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신이 뭐가 아쉬워서 내게 이러는지 모르겠어.”
아데나워 후작가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력가 가문이라고 해도 그는 아쉬울 것 하나 없었다.
발티모어는 100여 년 전 템퍼 공작가가 2황자와 함께 반역을 꾀하다 멸문된 이후 제국에 둘밖에 남지 않은 공작가 중 하나다.
거기에 건국 공신 가문으로서 영광을 소유하고 선황후를 배출한 가문이기까지 하니 그 권위와 이름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를 지경이었다.
칼로스는 그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이였기에 아네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있어. 아쉬울 게 왜 없겠어. 그런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을 원하는데.”
“…….”
“아네타. 나는 당신이 사랑을 해 봤으면 좋겠어. 물론 그 상대는 내가 되길 바라고.”
칼로스는 아네타가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건 그녀의 눈이었다.
그는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보았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지금 당장 이 감정을 이해해 달라고 하지도 않을 거야.”
사랑이란 감정은 그녀에게 미지의 세계와도 같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감정을 깨닫기 전, 제 눈에 비친 사랑이 그러했으니까.
“당신에게 내 사랑을 증명하는 것도, 당신이 날 사랑하게 하는 것도 모두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러니 당신은 그냥 이대로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칼로스는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을 얻으려면 그 정도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