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틀어짐의 시작 (5)
테르사가 불러온 시종이 바닥을 치우는 사이, 장내의 분위기를 정리한 이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입장한 러셀이었다.
러셀은 에레즈를 소개하지 않은 채, 곧바로 의식을 시작할 것을 명했다. 그건 에레즈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나기 전까진 그들 앞에서 소개를 늘어놓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였다.
“관망의 영광을 가지고 오도록.”
명을 받은 클로린 공작은 양피지가 길게 늘어진 금장 테이블 앞에 섰다.
그가 시종장에게서 건네받은 상자를 열자, 황금으로 만들어진 깃펜이 제 주인의 자부심만큼이나 반짝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깃펜, 그러니까 관망의 영광을 꺼낸 클로린 공작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은 엄숙한 목소리로 시동어를 읊었다.
“관망의 영광이여, 밤이 찾아왔을 때 낮이 화창했다고 칭송하라.”
시동어에 반응한 관망의 영광이 공작의 손바닥 위에서 서서히 몸체를 일으켰다. 이윽고 양피지 위로 날아간 그것은 춤을 추듯 움직이며 기록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관망의 영광은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은 채 금빛 흔적을 새겨 나갔다.
아네타는 이번이 겨우 두 번째인 의식의 과정을 눈에 담다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는 에레즈를 응시했다.
소개 없이 이루어지는 의식. 그에 담긴 뜻을 모르는지, 에레즈는 자꾸만 아네타와 그녀의 허리에 감긴 칼로스의 재킷을 흘끔댔다.
에레즈의 녹안에 담긴 감정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질투. 그 선연한 감정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속에서 검게 얼룩진 감정이 일렁여도 그의 겉껍데기는 여전히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아네타는 에레즈의 머리 위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응시했다. 그것의 처지는 원작의 아네타와 같았다.
아무리 화려한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 뭐 하나. 그녀는 결국 제 아래에 선 에레즈를 더욱 돋보이고 빛나게 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본인의 의사대로 자리를 떠나거나 그대로 머물 수 없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네타가 결심을 굳히는 사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칼로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표정이 좋지 않아. 혹시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래?”
“아니야.”
“그럼 왜…….”
그가 말을 이어 나가려 할 때였다. 관망의 영광이 웅웅대는 진동과 함께 움직임을 멈추자, 이유를 물으려던 그의 입술이 다물렸다.
“기록이 끝난 듯싶습니다, 폐하.”
“그래.”
클로린 공작은 저의 자부심을 거두어들였다. 그러곤 양피지를 정리해 황제의 앞에 바쳤다.
러셀이 그것을 받아 들자, 장내는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가 미동 없이 기록을 읽어 내리는 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은 양피지를 내려놓고 인장을 들었다.
황제의 상징으로 빈 공간을 채운 러셀은 고개를 들어 에레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에레즈 바우터.”
에레즈가 호명되자 헤첼 백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가 무명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어 긴장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그들과 달리, 결과를 알고 있는 아네타는 침착했다.
“사실이었군.”
예상대로 러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긍정이었다. 가주들은 술렁이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침묵을 지켰다.
“에레즈 바우터, 그대와 그대의 가문을 7대 영광의 가문으로 인정한다. 무명의 이름은 찬연(燦然)으로 하지.”
“가문의 무한한 영광입니다, 폐하.”
에레즈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며 몸을 낮추었다. 외모만큼이나 중성적인 목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찬연. 그의 목에 걸려 빛을 발하는 목걸이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무명의 본래 이름은 찬연이 아닌 통제였다. 아네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언급할 수 없었다.
“클로린 공작은 날이 밝으면 기록의 내용과 찬연의 존재를 공표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럼 의식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군.”
러셀이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하며 퇴장하자, 남은 건 가주들뿐이다.
앞서 황제의 인정이 있었기에 진위 여부를 위해 기록을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에레즈 바우터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가주들은 환히 웃으며 다가온 에레즈의 인사를 기꺼이 받아 주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에레즈를 만났던 칼로스는 제 소개가 불필요하다는 듯 차례를 넘겼다.
이제 남은 사람은 아네타뿐이었다. 에레즈는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아네타의 차례가 오자, 탐색하는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아네타 아데나워예요.”
이름을 말하자 설마하며 아네타를 대하던 에레즈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에서 의식이 통제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굳어진 얼굴로 하는 말에 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네타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있지. 아주 확실한 이유가.’
그가 불쾌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자 아네타는 헛웃음을 삼켰다.
“어, 그러니까…….”
한편, 칼로스의 물음에 아차 한 에레즈는 황급히 변명할 거리를 찾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그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그건…… 제가 아데나워 가문과 라폴리 가문이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걸 보았기 때문이에요.”
에레즈는 자신의 변명이 퍽 그럴듯했다고 여겼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는 횡설수설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볼 수 있는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제 입으로 알리고 말았다.
아네타는 힐끗 칼로스를 보았다. 그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공통적인 생각을 하며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할 것이다.
***
무명의 주인이 나타났다.
동이 터오는 것과 함께 퍼지기 시작한 소식은 발이 달린 듯 빠르게 퍼져 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명은 영광의 이름을 가문 이름 앞에 새기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 은연중에 품고 있던 기대를 산산이 조각내는 존재의 등장이니 파급력이 클 것이다.
모두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은 등장. 그것이 에레즈가 바랐던 것이라면, 훌륭히 성공했다고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진정으로 박수 쳐 주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 그가 변화를 가져온 덕분에 원작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느껴지던 압박감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도 완전히.
여러 변수와 함께 찾아온 변화.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와 같았다.
아네타는 간신히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놓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레즈에 대해 더 많은 걸 파악해야 했다.
우선순위는 당연히 이른 죽음을 맞이한 선대 바우터 남작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었다.
에레즈가 조부의 죽음과 함께 존재를 드러냈다는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은 아네타는 이 일을 맡길 만한 이를 머릿속으로 꼽으며 귀걸이를 귀에 걸었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익숙한 모양의 향수병을 향해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그녀가 습관처럼 뿌려 오던 향수는 칼로스가 준 선물이었다.
향수를 시작으로 그가 주었던 선물, 그가 건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했었다.
그 추억이 짙게 베인 향이 바로 이것이었다.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코끝에 맴돌며 칼로스 발티모어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
그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그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 이 향수 때문이 아닐까. 아네타는 미루어 짐작했다.
‘바꿔야겠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른 향수를 집어 들었다.
낯선 향이 제게서 풍기자,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만큼 저 향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뜻이겠지.’
선택받지 못한 채 덩그러니 놓인 향수병을 보던 아네타는 이내 출근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
마차를 타고 도착한 황궁은 어제와 다른 이유로 소란스러웠다.
별 볼 일 없던 바우터 남작가가 실은 무명의 주인이었고, 찬연의 영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 편의 극과 같은 상황을 떠들어 대기 바쁜 그들의 표정은 같은 주제를 논하고 있음에도 각양각색이었다.
레녹스 내부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던 아네타는 흘끔대는 시선을 느끼며 혀를 찼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한 상대였다면, 저들은 주저 없이 다가와 질문을 쏟아 냈을 것이다.
아네타는 질린 기분으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녀를 반기는 건 창을 등지고 서 있던 칼로스였다.
“어서 와, 아네타.”
그는 투명한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휘감겨 있었다. 마치 그 자신도 빛인 것처럼.
그녀마저 집어삼킬 듯 따스하게 빛났지만, 그뿐이었다. 손을 뻗는다 해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막연한 기분이었다.
아네타는 빛무리에 휩싸인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빛은 잡을 수 없고, 잡혀서도 안 되는 존재야.’
그녀의 이성이 날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에레즈의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도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확률이 낮아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네타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성별을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사랑하게 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왜 거기 그러고 서 있어?”
칼로스는 아네타가 미동 없이 저와 동떨어진 무언가를 보듯 자신을 보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어?”
걱정이 담긴 물음에 아네타는 잔여물처럼 남은 감정을 잠시 묻어 두었다.
“일은 없고, 조금 피곤해서 그래.”
“그럼 잠깐 눈이라도 붙여.”
칼로스가 널찍한 소파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아네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녀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향해 고갯짓했다.
“저걸 보니 지금 당장 책상 앞에 앉아야 할 것 같거든.”
밀린 서류가 이룬 탑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했다. 아네타는 제도로 돌아온 뒤 하루도 쉬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자리에 앉았다.
여유 없이 바쁜 하루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나마 한 달 가까이 자리를 비운 결과 치고는 양호한 편이네.”
비록 원치 않는 여행이었을지라도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원작이라는 원망의 대상은 실체가 없으니 뒤처리는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겠어.”
깃펜을 손에 쥔 아네타는 서둘러 서류 검토를 시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서류 처리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아데나워 후작, 발티모어 공작부인, 복지부의 장관.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내던 그녀였기에 서류는 빠르게 줄었다.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아네타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은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잠깐 쉬었다 해, 아네타.”
“좋아.”
차를 준비해 둔 칼로스가 휴식을 권하자, 아네타는 순순히 응하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한계를 느끼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다.
아네타가 눈 부근을 지압하며 소파에 앉자, 칼로스는 적당히 우러난 차를 잔에 따랐다.
이윽고 그것을 그녀 앞에 놓아 주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데, 그의 코끝에 낯선 향기가 스쳤다.
그 향기의 출처는 아네타였다.
“향수, 바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