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 재결합기-4화 (4/122)

4화. 틀어짐의 시작 (4)

쏟아지던 타박이 끝나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전해 줄 소식이 하나 더 있었군.”

러셀은 퍼뜩 떠오른 사실을 전하기 위해 다시 아네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데나워 후작, 그대가 쓰던 집무실은 얼마 전부터 버논이 사용하게 되었다.”

버논 케이너. 곧 등장할 크리스 데번과 함께 서브 커플이 되는 남자.

그는 아네타의 사촌이자 칼로스의 절친한 친구이며, 에레즈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렇군요.”

아네타는 주요 인물들과 긴밀히 얽힌 그가 제 집무실을 차지했다는 말에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집무실이야 언제든 바뀔 수도 있는 것이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버논과는 지나가다 인사나 하면 다행일 정도로 친하지 않으니 그에게 가 투덜댈 마음도 없었다.

“그럼 저는 어디를 사용하면 될까요?”

“칼로스가 안내해 줄 거다. 마침 시간이 좀 남았으니 의식이 시작될 때까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되겠군.”

러셀은 마치 준비된 말을 입 밖에 내듯 말했다. 뿐만 아니다. 입가에 걸린 웃음 역시 미심쩍었다.

“뭐 하고 있나. 어서 나가 봐.”

무슨 꿍꿍이일까. 상당히 꺼림칙했지만 의중을 떠보는 건 무리였다.

결국, 아네타는 축객령에 응해야만 했다.

칼로스를 따라나선 그녀는 황제의 말은 절대적이라는 이 세계의 법칙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어색한 분위기 탓일까. 사위를 둘러싼 공기마저 답답했다.

칼로스의 걸음 속도는 언제나 일정했다. 아네타에게 맞추다가 자연스레 굳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변화를 겪을 터였다. 아네타보다 키가 작고 보폭이 좁은 에레즈를 위해서.

황제궁을 나서서 행정이 이루어지는 건물, 레녹스에 들어설 때까지 두 사람의 입술은 굳게 맞물려 있었다.

짙게 녹아 있던 침묵을 걷어 낸 사람은 아네타였다.

그녀는 복도를 걷다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어 선 그를 향해 물었다.

“다 왔어?”

“그래. 여기야.”

“안내해 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당신 집무실로 가서 할 일 해.”

인사를 건넨 아네타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를 지나쳤다.

아직 명패가 달리지 않은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데, 그 위를 단단한 손이 감싸 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도 같이 들어가려고.”

“왜?”

“여기가 내 집무실이니까.”

“내 집무실이라며. ……당신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칼로스는 문고리를 잡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낸 뒤, 다른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당신과 내가 함께 사용하게 될 곳이지.”

“…….”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에 계속 이러고 서 있을 수는 없잖아.”

미간을 찌푸린 아네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의 말에 따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열린 문을 지나 내부를 살피자 그가 말한 대로 양쪽 벽 앞에 하나씩 놓인 책상이 보였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책상 중 하나는 그녀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새 것이었다.

“농담이길 바랐는데.”

“앉아 있어. 서 있으면 다리 아프잖아.”

칼로스는 아네타의 탄식을 듣지 못한 척하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곤 차를 내오겠다며 뒤돌아섰다.

아네타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중간에 놓인 화병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 꽂혀 있었다.

아네타가 화병에서 시선을 거둔 것은 맞은편에 앉은 그가 그녀 앞에 찻잔을 놓아 줄 때였다.

“이비코스 차?”

우러나온 찻물의 색과 향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즐겨 마시던 차가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새 취향이 변했나 보네. 당신 이거 별로라고 했었잖아.”

“좋아하게 됐어.”

찻잔을 든 아네타는 혀끝에 감도는 맛을 음미했다. 차의 농도는 물론 찻잔마저 그녀의 취향이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차잖아. 그래서 좋아졌어.”

“…….”

칼로스는 답하기를 포기한 아네타를 직시했다. 그녀는 유독 저와 관련된 일에 침묵을 택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봐.”

침묵 뒤에 말을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바로 지금처럼.

그럴 성격이 아님에도 그녀는 항상 그랬다. 칼로스는 그 사실이 퍽 서글펐다.

왜 나에게만. 그는 찻물과 함께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대체 왜 당신과 내가 집무실을 공유해야 하는 거야?”

“싫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우리는 이혼한 사이야. 난 당신 전 부인, 당신은 내 전남편. 한곳에 밀어 넣는 게 이상하지.”

“내가 폐하께 부탁드렸어. 당신이랑 함께 있고 싶어서.”

벽을 허물고 두 공간을 하나로 합쳤다. 그 탓에 비어 있는 집무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에 잠시나마 풀렸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굳어졌다.

“내가 말했지.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는 싫다고.”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친구로서 당신 곁에 머물러도 좋아.”

친구. 그의 입에서 나올 리 없다고 여긴 말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울림을 품은 채 그녀에게 스몄다.

“당신 말을 듣고 밤새 고민했어. 그러니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

칼로스의 말대로, 그의 표정에선 많은 고뇌를 거듭한 흔적이 묻어났다.

차마 그것만은 외면할 수 없었던 아네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리 깔끔하게 이혼했잖아.”

손잡이에 걸린 손끝이 희게 질렸다.

“당신은 내가 거부해도 계약서를 이용해 이혼했을 거잖아. 강제로 이혼했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고, 이렇게 기회를 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겠지.”

칼로스는 그녀에게 진심만을 보여 주고 진실만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약속을 지켰다.

긍정적인 관계는 언제나 신뢰에서 시작되고 신뢰로 유지되는 법이니까.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선 거라고?”

“그래. 그런데 당신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훌쩍 떠나 버렸지.”

칼로스는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슬픔과 허무함이 보이지 않는 형체를 이루어 심장을 거세게 옥죄었다.

“아네타, 나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이건 경고라는 걸 기억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더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짙게 물든 눈동자를 빛냈다.

“당신이 날 밀어내려고 해도 난 끊임없이 다가갈 거니까.”

***

창공(蒼空)의 영광 발티모어.

이적(異蹟)의 영광 아데나워.

분신(分身)의 영광 라폴리.

관통(貫通)의 영광 로펠락.

관망(觀望)의 영광 클로린.

수호(守護)의 영광 헤첸.

그리고 무명(無名).

7대 영광의 가문 가주들이 과반수 이상 한 자리에 모이는 건 3년에 한 번 있는 의식 때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의미가 깊고 무거운 행사를 이끌어 가는 건 언제나 클로린 공작이 소유한 관망의 영광이었다.

진실한 역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관망의 영광이 깨어나 선황 대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면, 그것은 황제의 승인을 거친 뒤 고스란히 제국의 역사가 된다.

그렇기에 의식은 항상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예고 없이 떨어졌던 벼락같은 소식의 진위가 오늘 이 자리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 사실에 가주들의 마음은 어수선했다.

“정말 무명의 주인이 맞을까요?”

“곧 관망의 영광이 증명해 주겠지.”

헤첸 백작과 클로린 공작의 대화에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굳이 그들 사이에서 감출 만한 감정은 아니었기에, 누구 하나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마실래?”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전장의 영웅이라 불리는 로펠락 후작, 테르사였다.

“고마워요.”

아네타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인 그녀가 내미는 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어쩐지 다들 심란해 보이네.”

그리 말하는 그녀는 호기로운 성정의 소유자답게 지금의 상황이 퍽 흥미로운 듯 보였다. 입가에 걸린 여유는 꾸며 낸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는 가졌으나,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바라보던 아네타는 대꾸했다.

“익숙지 않은 존재의 등장이란 원래 그런 법이죠. 무명의 주인이라는 것만 밝혀지면 모두 반갑게 맞아 줄 거예요.”

혼란을 보이는 건 한때일 것이다. 아네타의 말에 테르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장 어린 영광의 주인은 바우터 남작이 되겠네.”

“그렇겠네요.”

“옛날 생각나지 않아? 너도 그 남자처럼 성인이 되자마자 가주가 되었었잖아.”

“딱히. 별로 떠올리고 싶은 과거는 아니라서요.”

아네타는 심드렁한 얼굴로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다 뒤늦게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급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잠깐, 지금 ‘남자’라고 했어요?”

너무 급하게 놓은 탓일까, 그게 아니면 말하던 도중 열리는 문에 시선을 빼앗긴 탓일까. 테이블 끝에 걸쳐졌던 잔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날카로운 파편이 거칠게 튀어 올랐지만, 누구 하나 그녀의 안위를 물을 수 없었다. 파열음이 장내에 울리는 것과 동시에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가주들은 모두 에레즈 바우터로 추정되는 이를 눈에 담고 있었다. 제 발치에서 나뒹구는 유리 조각을 까맣게 잊어버린 아네타마저도.

손대면 사르르 녹아 버릴 것 같은 분홍빛 머리카락과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요정 같은 외모.

원작에서 에레즈를 묘사했던 것과 일치하는 생김새였지만, 그는 남자였다.

툭 튀어나온 목젖이 그의 성별을 증명하고 있었다면, 그 아래 걸린 화려한 목걸이는 그가 정말 에레즈임을 증명했다.

첫 등장에 이어 성별까지 바뀌어 나타난 그를 보자 아네타는 혼란스러워졌다. 이곳이 정말 제가 아는 그 세계가 맞을까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아네타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또 다른 누군가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에레즈를 뒤따라오던 칼로스였다.

칼로스는 희게 질린 아네타의 얼굴과 엉망이 된 발치를 발견하곤 그녀를 향해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에레즈가 뒤늦게 그의 팔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 손에 스치는 건 그가 이룬 바람결뿐이었다.

“아네타.”

아네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이름을 불러 오는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축하듯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날뛰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는 듯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없어.”

아네타는 차게 식었던 손끝을 매만지며 답했다. 그러나 칼로스는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녀의 상태를 세세히 살폈다.

드레스에 검붉은 얼룩이 지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하아. 다행이군.”

제 눈으로 직접 확인을 마친 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내는 건 그다음이었다.

“이거라도 두르고 있어.”

칼로스는 거부할 새도 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킷을 둘러 주었다.

허리를 감싼 그것을 내려다보던 아네타는 다시 에레즈를 떠올렸다.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마주한 것은 싱그러운 녹음이었다.

그 안에 담긴 놀라움의 의미는 뚜렷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리 묻는 듯한 표정을 보고 아네타는 깨달았다. 그녀, 아니.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네타 아데나워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