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틀어짐의 시작 (3)
아네타가 식사를 마친 건 완연한 아침의 기운이 창밖을 가득 메울 때였다.
의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황제를 알현해야 하는 그녀에게 한가롭게 식후 차를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아네타는 단장 준비가 한창일 드레스룸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치 길고 거추장스러운 무언가가 발목을 휘감은 듯 무거운 걸음이었다.
좋지 않은 표정의 아네타를 따르던 이사벨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연일 무리한 일정을 소화해 내는 주인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사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네타는 그저 의무적인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아.”
굳게 맞물려 있던 입술 새로 짧은 감탄사가 밀려 나온 건 어느 복도를 지날 때였다.
화려하게 번쩍이는 장식물조차 붙들지 못한 시선을 사로잡은 건 수십 점의 그림이었다.
“그새 많이 늘었네.”
아네타는 복도 벽을 따라 늘어진 그림 수를 세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감상할 요량이었다.
“각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에도 꾸준히 보내오셨습니다.”
이사벨은 아네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드레스룸의 문을 열어 주며 답했다. 주어는 빠졌지만 어떤 이들을 칭하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아네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여성 화가들. 저택에 있는 그림은 모두 그녀들의 작품이었다.
“그분들은 각하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림 한 점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은인이라…….”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쓴웃음과 함께 뒷말을 삼킨 아네타가 자리에 앉는 사이,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다가왔다.
“서둘러 단장을 시작하거라.”
“네, 이사벨 님.”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될 만큼 시녀들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그 일사불란함은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의 결과물이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노력하는 자는 언제나 어여쁜 법이다. 이사벨의 입가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렇게 각하의 단장을 돕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바보, 너 어제도 그 말 했잖아. 그렇죠, 각하?”
아네타 역시 들뜬 기색의 시녀들을 보며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조곤조곤한 투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비로소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기분이었다.
***
황궁에 도착한 아네타는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바삐 움직이는 사용인들을 지나쳤다.
그녀가 잠시의 지체도 없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황제궁이었다.
교차한 창으로 입구를 막고 있던 기사들은 아네타가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길을 터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하. 제가 폐하께서 계신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아네타를 맞이한 이는 러셀의 언질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황궁의 시종장이었다.
아네타는 안내를 자처하는 그의 뒤를 따라 익숙한 길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황제가 있는 곳이 짐작되었다. 러셀은 집무실에 있으리라. 그리 확신하며 주위를 살피는 것도 잠시, 그녀는 이제껏 놓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에 배치된 기사가 한 명도 없네요.”
“폐하께서 모두 물리셨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송구하오나 각하, 저는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아네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충직한 심복조차 모르는 일이 무얼까 머리를 굴렸다.
나오는 답은 없었지만, 대략적인 추론은 가능했다.
‘어쩌면 원작이 틀어진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아니더라도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될 것임은 틀림없었다.
“폐하께서는 이곳에 계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수고했어요.”
예상대로 황제는 알현실이 아닌 집무실에 있었다. 그 앞에 홀로 남은 아네타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폐하, 아네타 아데나워입니다.”
“들어와도 좋다.”
허락과 함께 문을 열자 유순하게 풀린 얼굴로 황제 곁에 서 있던 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오른팔인 그가 이곳에 있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존재에 동요하지 않고 몸을 낮추었다.
“제국의 자비로운 영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서둘러 자리에 앉도록 해. 중요한 소식이 있으니 말이야.”
“네.”
아네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칼로스의 시선이 제게서 떠나지 않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지. 후작이 제도를 떠나 있던 사이, 에레즈 바우터가 자신이 무명(無名)의 주인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녀의 태연함은 러셀이 입을 떼는 순간 산산이 조각났다.
“이건 영광의 주인들만이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거구나. 원작이 비틀린 이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일 줄이야. 아네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릿한 손끝이 현실감을 앗으려 징징 울어 댔다.
아데나워가의 ‘이적의 영광’처럼 알려진 것이 전무한 ‘무명’의 주인은 에레즈가 맞았다.
‘관망의 영광’조차 존재 유무를 몰라 이름은커녕 소멸되었다고 결론지어진 그것은 에레즈와 함께 등장하여 ‘통제의 영광’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그 존재를 가장 먼저 알게 되는 사람은 에레즈나 그녀의 조부가 아닌, 황제와 의식에 참가한 7대 가문의 가주였다.
관망의 영광이 남긴 기록으로 선황제 대에 있었던 일을 확인하던 그들은 뒤늦게 영광의 등장을 알게 된다.
칼로스와 에레즈의 만남도 이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러셀의 명을 받고 바우터 남작가의 영지로 떠난 칼로스는 막 숨을 거둔 늙은 남작과 그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에레즈를 발견한다.
바우터 남작의 피붙이는 손녀인 에레즈뿐이었기에, 작위와 영광은 그녀에게 계승된다.
에레즈는 바로 그때 영광의 존재를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게 뭔가. 엉망진창이었다. 아네타는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을 자각할 새도 없이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그래. 죽은 조부의 작위를 승계 받자마자 폐하께 알현까지 청해 가며 그리 말하더군.”
아네타의 고개가 황제 대신 질문에 응한 칼로스에게로 돌아갔다.
“당신도 거기 있었어?”
“어.”
모든 게 앞당겨지고 말았다.
아네타는 이제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어디까지 비틀린 것인지 파악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근거는 있어?”
“오늘 있을 의식에서 증명될 거라고 했어. 관망의 영광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모습을 봤다고 했거든.”
“봤다고?”
“영광의 능력으로 종종 미래를 볼 수 있다더군.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말이야.”
통제의 영광이 가진 능력은 그게 아니다. 아네타는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능숙하게 삼켜 냈다.
“사실이라면, 대단한 능력이네.”
어디까지나 사실이라면 말이다.
아네타는 영혼 없는 감탄과 함께 확신했다. 변화를 가져온 장본인은 분명 에레즈일 거라고.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원작이 비틀려 능력이 바뀐 것일지도 모르지만, 진짜 능력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에레즈가 그녀처럼 원작을 알고 있다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아네타는 언젠가 그에 대해 확인해 보리라 다짐했다.
“그럼…… 이제 그만 제게 귀환을 명한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폐하?”
새로운 영광이 등장했다는 이유로 부른 건 아닐 터였다. 정말 그런 이유였다면 원작의 아네타 역시 귀환 명령을 받았을 테니까.
“앞서 말한 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제게만 필참을 명하신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아서요.”
라폴리가의 가주에게 불참 승인을 내어 준 것을 알고 있다. 그에 대해 언급하자 러셀은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런,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했는데 들켜 버렸군.”
역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네타는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사실 후작을 부른 건 에레즈 바우터의 낌새가 조금 수상쩍어서였다.”
“어떤 점이요?”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지녔다는 에레즈에게서 수상한 동태를 읽었다니. 역시 사람이 바뀐 건가 싶어 귀를 기울였으나, 들려오는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칼로스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먹잇감을 노리는 여우 같았달까.”
“…….”
아네타가 할 말을 잃자, 칼로스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민망한 듯 어느 한구석에 시선을 두는 걸 보니, 그 역시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던 모양이다.
“그런 이에게 친애하는 사촌 아우를 넘길 수는 없지. 그러니 수비수를 하나 세워 두어야 하지 않겠어?”
“그 수비수라는 게 설마…….”
“후작이지.”
단언하는 모습이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혼한 전 부인이 수비수라니. 굴러오는 공을 모두 골대 안에 넣어 주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물론 후작은 내 아우를 홀대했지만.”
“……홀대하지 않았어요.”
“한 달 내내 고심해서 고른 선물을 받아 놓고 보답으로 뭘 줬더라?”
황제에게 칼로스와 자신의 관계를 상기시킬 필요성을 느끼던 아네타의 입이 고이 다물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녀는 분명 금화 주머니를 주었더랬다.
“생일 땐?”
이때도 금화 주머니.
“결혼기념일 땐?”
이번에도 역시 금화 주머니.
“별로 안 친한 친구라던 라폴리 자작의 생일에는 꽃과 브로치를 보냈다지. 이래도 홀대한 게 아니라는 건가?”
정을 주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이 언급되자 몹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느끼는 게 많은 것 같은 표정의 칼로스를 보니 더더욱.
문제는 그의 정성을 모르는 척 넘겼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걸 황제는 알고 있을 터였다.
지난날을 돌아본 아네타는 이제 그가 자신에게 우정을 느끼는 것마저 의외라고 느껴졌다.
그 본인이나 주변인이 그녀를 향해 똥차라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 없으리라.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처럼 눈먼 사람은 없지. 안 그런가?”
러셀은 입을 다문 아네타를 보며 혀를 찼다. 그녀가 칼로스를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던 그였다.
“그래도 그대보다 나은 사람은 없더군.”
“……네?”
“제국 최고의 재력가를 상대로 기를 펼 수 있는 자는 드물 테니까.”
넘치는 재력을 높이 사 수비수로 간택했다는 덧붙임에도 아네타는 양심상 아무런 반발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봤자 득 볼 것 하나 없다. 그러한 판단은 지금껏 러셀을 겪어 오며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더 괜찮은 상대가 있었다면 진작 그자와 붙여 주었을 텐데.”
“폐하.”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 미간을 좁히는 칼로스의 모습에, 러셀은 또 한 번 혀를 찼다.
“아우 키워 봤자 하등 소용없다는 걸 이렇게 실감하게 되는군. 후작이 전남편 하나는 잘 뒀어.”
러셀의 심중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알고 싶지 않아도 절로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아네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에레즈가 황제의 마음에 들었더라면, 자신은 원작의 아네타처럼 그의 부름을 받지 못했을 거라고.
덕분에 그녀는 에레즈의 변화를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