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틀어짐의 시작 (2)
칼로스는 몸을 돌려 아네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직 그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네타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연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느 누가 제 곁에 함께 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는 아닐 터였다.
칼로스는 지금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의 실체는 연민과 우정이 전부였다.
아네타는 기억을 더듬어 어느 한 장면을 떠올렸다.
확신을 얻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에레즈에게 용서를 구하는 칼로스의 모습이 눈으로 본 듯 생생했다.
칼로스는 에레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아네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착각이었음을 고한다.
그의 뒤늦은 깨달음과 후회를 기억하는 아네타는 엉망으로 엉켜들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당신은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아네타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깨달음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 시선을 모르는 척 넘기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내게 볼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평온함을 가장하며 말머리를 돌리는 건 그 다음이었다.
명백한 회피였다.
그녀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의 눈동자에 원망이 깃들었다.
“칼로스.”
그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얼어붙은 강물 위로 돌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일렁이는 물결조차 보일 수 없는 그녀는 제 위로 쏟아지는 것들의 무게를 견디며 대답을 종용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종이 울리는 즉시 돌아갈 거야.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이지.”
아네타는 어둠 너머로 보이는 시계탑을 보며 말했다. 종이 울리면 돌아갈 사람들은 돌아가고 밤을 지새울 사람들만 남게 된다. 그녀는 전자의 대열에 낄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약 30분.
“할 말이 있다면 어서 해.”
아네타가 자신에게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칼로스는 한숨을 뱉었다.
“폐하께서 내일 있을 의식에 참석하기 전에 알현을 청하라고 하셨어. 나는 그 명을 전하러 온 거고.”
“그걸 굳이 당신이?”
“그래. 그걸 굳이, 내가 전하러 왔지.”
“…….”
아네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자신만 곤란해질 거란 판단이 앞섰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칼로스가 물었다.
“이유는 묻지 않을 거야?”
“……딱히 궁금하지 않아.”
아네타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
“더 할 말 있어? 없으면 그만 나가 줘.”
“아네타.”
이름을 불러 오는 그는 작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금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갈 생각이 전혀 없구나.”
아네타는 그 뜻을 읽어 내곤 회장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그곳은 이곳과 다른 세계인 듯했다.
투명한 창으로 흘러나오는 빛은 그 경계였다.
“당신이 안 나가면 내가 나갈게.”
아네타는 그 경계를 넘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칼로스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네타가 그러했듯이, 칼로스 또한 그녀의 바람에 응해 주지 않았다.
칼로스는 아네타가 빛에 발을 들이기 전에,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를 열기가 손목을 감싼 그의 손에서 옮겨붙었다.
“내가 시종장을 대신해서 황명을 전하러 온 건, 당신이랑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였어.”
이혼 직후, 뿌리쳐질 것이 두려워 힘없이 잡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랐다. 그에게 전과는 다른 감정이 깃든 지금, 그녀는 그의 손을 풀어 낼 수 없었다.
“이거 놔.”
“아네타, 당신은 우리 관계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거야? 우리 나름대로 괜찮은 관계였잖아.”
없을 리가. 아네타는 잡히지 않은 손을 그러쥐었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를 배려하고 존중해 주었으니까.
그랬기에 부부 관계를 맺고 짙은 스킨십을 나누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원작만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유지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으니.
‘그래, 원작. 문제는 언제나 그 놈의 원작이었지.’
어차피 그는 곧 에레즈와 만나게 될 운명이다. 내일 소멸된 줄 알았던 영광의 존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그는 그녀를 찾아 제도를 떠날 테니까.
‘그리고 사랑에 빠지겠지.’
그래서 아네타는 그에게 부정을 말해야 했다.
그가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도록.
“칼로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아.”
퍽 희망적으로 들릴 수 있는 서두에도 칼로스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는 그 뒤에 나올 말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만났더라면, 나도 모르는 새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가진 것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혼인까지 감행했어.”
애석하게도 그의 감은 정확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야.”
잠시 숨을 고른 아네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못을 박았다.
“나는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원작의 아네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부모의 영향으로 정략혼이나 계약혼 따위에 부정적인 관념을 지닌 그녀의 진심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아네타는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그가 자신의 말을 거짓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원작의 칼로스 또한 그러했으니까.
누구보다 견고하고 단단해 보였던 그는, 그녀의 짐작대로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손목을 잡은 손이 가련하다 싶을 정도로 떨려 왔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올수록 그녀는 냉정해져야 했다.
“이혼 한 번 했다고 당신과 내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
“내가,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리 와 닿지 않는 말이라는 걸, 그는 알까.
아네타는 에레즈와 혼인하여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들의 모습이 선명한 만큼, 그녀는 단호히 부정했다.
“아니, 그럴 수 있어.”
***
아네타 아데나워와 칼로스 발티모어는 거래 기간 4년을 계약 결혼 유지 기간으로 정한 뒤 혼인했다. 주선자인 황제를 사이에 두고 양가 가주인 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 일이었다.
누구 하나 손해 보지 않을 거래였다. 그렇기에 혼인을 바라지 않았던 아네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다이아몬드 광산과 철광산을 가진 아네타는 황가와 발티모어 공작가에 철의 가격을 낮추어 공급하는 대신 연마된 다이아몬드가 무사히 거래될 수 있도록 인력을 제공받았다.
또한 그는 아네타와의 혼인으로 입지를 다지는 것은 물론 든든한 자금줄을 얻었고, 아네타는 공작가의 힘을 빌려 아버지를 견제하고 위태롭던 가주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가주로서 미처 배우지 못한 것들을 가르쳐 준 사람도 칼로스였다.
물론 그녀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혼인을 한 건 아니었다. 아네타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원작의 아네타가 그러했듯 황제조차 이혼을 막을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즉시 이혼을 감행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덕분이었다.
‘그래, 그렇게 이혼했는데…….’
기억을 더듬던 아네타는 어제의 그를 떠올렸다. 차오르는 숨을 그대로 뱉는 것도 잠시, 그녀는 창을 가린 커튼을 걷어 냈다.
그 너머에는 어슴푸레 밝아 온 새벽의 정취가 어지러이 번져 가고 있었다.
똑똑.
“각하, 이사벨입니다.”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들어와.”
아네타는 출입을 허하며 잡념을 떨쳤다.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책상 앞으로 가 앉자, 안으로 들어선 이사벨이 예를 갖췄다.
“각하를 뵙습니다.”
다시 고개를 든 이사벨은 곧바로 준비해 온 서류를 그녀 앞에 정중히 내밀었다.
“중요한 서류만 추려 내었습니다. 찾으실 것 같아 준비해 두었습니다만, 피곤하시다면 내일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 안 그래도 가능한 빨리 확인할 생각이었어.”
아네타는 거리낌 없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피로에 절은 몸이 휴식을 요구하며 비명을 질러 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다행히 광산 쪽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네.”
“각하께서 관리자 선정에 신중을 기하신 덕분이지요.”
아네타는 두 개의 광산이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음에 안도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음은?”
“영지 쪽 지출 내역입니다.”
“이번엔 또 얼마를 써 댔을지.”
아버지 데릭은 아네타가 성인이 되자마자 가주 자리를 팽개치고 영지로 내려갔다. 그런 주제에 그곳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저가 내던진 가주의 권한을 들쑤시거나 재산을 축내는 게 전부였다.
여자와 술을 한시도 멀리하지 않는 난봉꾼이니 안 봐도 뻔했다. 적은 액수가 아닐 거라는 데에 가진 재산을 전부 걸어도 좋았다.
“어쩜 이리 한결 같을까.”
역시나 그는 이번에도 다른 영지 예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액수를 사용했다. 아네타는 자세히 들여다볼 가치도 없는 지출 사유를 훑으며 혀를 찼다.
“선대 가주들이 축적해 온 재산이나 광산만 없었더라면 아데나워는 진즉에 파산했을 거야.”
아네타는 데릭이 돈을 물 쓰듯 써 대도 사용할 수 있는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한도를 정하면 돈을 끌어오기 위해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조부의 충고 탓이다.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 바에야 차라리 돈을 쓰게 내버려 두는 게 낫다. 아네타는 제 아들에게 질려 버린 조부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한 소식을 알아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떨떠름한 표정을 본 이사벨의 물음에 아네타는 고려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에게 붙여 둔 사람이 있으니, 알아야 할 소식이 있다면 그쪽에서 전해 올 터였다.
“아비 같지도 않은 자의 소식 같은 거, 들어 봤자 내 속만 뒤집어지지.”
“…….”
아버지를 칭하는 호칭이 불손했지만, 충직한 집사는 주인의 거친 언사를 못 들은 척 넘겨 주었다.
시녀에서 집사로. 30년 가까이 아데나워가에 몸담고 있는 이사벨은 젊은 주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데릭 아데나워는 어떤 관계로 얽히든 최악의 상대였다.
만약 숨이 다하기 직전의 안주인에게서 아네타를 지켜 달라는 부탁만 받지 않았더라면, 이사벨은 전 집사 로일처럼 진작 이곳을 떠났으리라.
“여기. 확인 끝냈어.”
이사벨은 아네타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전 가주에 대한 생각을 말끔히 밀어냈다. 내밀어진 서류를 갈무리하고 깔끔한 책상 위를 한 번 더 정돈하는 손놀림은 능숙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네타는 친애하는 집사의 이름을 불렀다.
“이사벨.”
“네, 각하. 말씀하시지요.”
“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어. 이사벨이 있어서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었던 것 같아.”
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색할 수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녀 자신이 원해서 떠난 여행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네타는 태연하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노고를 치하해 주시니 기쁘기 이를 데 없지만, 다음은 사양하고 싶군요.”
“왜?”
“각하의 귀환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경험은 이번 한 번으로도 족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간의 심경을 고백하는 모습에 아네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곁을 떠나지 않을, 온전한 제 사람.
아네타는 그녀만큼은 제 곁에 오래도록 남아 주기를 바라며 곧 참석하게 될 의식을 떠올렸다.
마음이 천근보다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