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틀어짐의 시작 (1)
<이 밤을 넘어>.
자신이 전부인인 아네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던 남주인공 칼로스가 여주인공 에레즈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이야기다.
그 속에서 아네타는 철저히 작가의 손끝에서 놀아난 인물이었다.
엄연히 남주인공의 계약 결혼 상대였으니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설정을 부여했지만, 그뿐이었다.
작가는 아네타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칼로스가 그녀로 인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조연들의 입을 빌려 아네타와 에레즈를 비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작품은 아네타라는 존재로 인해 괴로워하는 에레즈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었다.
정작 그녀는 그 어떤 악행도 꾀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갔음에도.
다른 인물의 눈으로만 간간이 묘사되는 조연과 감정선이 세세하게 드러나는 주인공.
둘 중 독자의 공감을 보다 쉽게 얻어 낼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후자였다.
아네타 아데나워는 두 사람 사이에 낀 불순물이다. 그러한 공식을 세우기 위해 주인공들의 만남과 관계 발전은 그녀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이루어진다.
철저한 배제.
그것이 아네타로 태어나 자신이 환생했음을 깨달은 그녀가 이혼 직후 의사와 상관없이 제국을 떠나야 했던 이유다.
하지만 갑자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날아들었다.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바로 그 변수였다.
손끝을 물들일 것 같은 붉은 종이, 그 위에 스며든 금빛 잉크가 전하는 바는 명확했다.
「후작 아네타 아데나워는 하루속히 제도로 돌아와 황실의 일정에 따를 것.」
그 외의 다른 내용은 없었다. 아네타는 필요 이상으로 간략한 서신을 보며 황제가 참석을 요구해 온 일정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영광이라는 이름의 보물을 하사받은, 이른바 7대 영광의 가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의식과 그 전날 의식에 참가할 수 없는 귀족들을 위해 여는 연회.
불참 의사를 밝혀도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던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황명을 받은 이상 불복하기란 불가능했다.
원작은 황제가 귀환 명령을 내린 순간부터 어그러졌다. 현실을 직시하니 결단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이 우선인지 판가름한 아네타는 결국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제도로 돌아왔다.
‘막상 돌아오니 나쁘진 않은데.’
원작을 거스르려 할 때마다 그녀를 우악스레 짓누르던 압박감은 온데간데없다. 그 말인즉, 틀어짐의 원인이 그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마냥 안심하기에는 왠지 모를 찝찝함이 감돌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네타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샴페인 잔을 들었다. 반쯤 비워 낸 잔은 내려놓기 무섭게 가득 채워졌다.
그것은 그녀의 복잡한 심경과도 같았다.
채 비워 내지 못했음에도 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차오른다.
아네타는 투명한 벽을 타고 넘실대는 그것을 응시하다 자조했다. 별 볼 일 없는 것이라 여겼으나 숨 막힐 듯 차오르는 그것에 당장이라도 익사할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샴페인 병을 내려놓은 금발의 영식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느새 곁을 차지하고 앉아 아양을 떨던 영식 중 하나인 그는 그 건조한 시선마저 열렬히 반겼다.
“각하, 예술의 도시 리테아로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네타가 오늘 막 제도로 귀환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가장 만만한 화젯거리를 찾아 물었지만, 이어진 것은 아네타의 음성이 아니었다.
“여행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후작 각하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화가들이 궁금합니다.”
“그걸 굳이 여쭐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훌륭하신 각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니 분명 특출한 인재들일 겁니다.”
영식의 적극적인 태도는 다른 이의 경쟁심에 불을 지폈고, 그들은 저들끼리 막고 막히는 신경전을 벌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몇몇 인사들이 부럽다는 듯 눈을 빛냈지만, 정작 아네타 본인은 그들이 귀찮기만 했다.
‘이제 그만 쫓아 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제국의 자비로운 태양,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제 러셀의 입장과 함께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분에 걸맞는 화려한 등장이었다.
장내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태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아네타는 그에 맞추어 몸을 낮춘 뒤 자세를 바로 했다.
뒤이어 들려올 이름이야 뻔했다.
“창공의 영광, 칼로스 발티모어 공작께서 드십니다!”
칼로스 발티모어.
그를 호명하는 목소리와 함께 수군거리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아네타는 제 이름이 그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것을 무시하며 여독에 찌든 몸을 더욱 꼿꼿이 가누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그러고 보니, 부부에서 남이 된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자리였던가.’
시들해졌던 화제가 다시금 달아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네타는 칼로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오랜만에 보는 전남편의 표정은 웃음기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다.
‘공식 석상에서 날을 세우는 건 여전하네.’
냉막한 분위기를 두른 채 나아가는 걸음은 거침없었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실수인 척 소지품을 떨어뜨리는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겨우 그런 얕은 수에 놀아날 이가 아니다.
‘무참히 짓밟고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오래 지나지 않아 러셀이 단상에 올랐다. 뒤따르던 칼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 앞을 지키고 섰다.
그는 곧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덕분에 아네타에게로 향하는 시선은 배가 되었다.
그들의 시선은 지표가 되었다. 분위기를 읽어 낸 칼로스는 어렵지 않게 아네타를 찾아냈다.
시리게 빛나던 금안은 그녀의 눈동자에 새겨진 심해와 마주한 순간 따스한 벌꿀처럼 녹아내렸다.
그 적나라한 온도 차는 그녀에게 퍽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제 선 안에 들인 사람에 한하여 한없이 유순해지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나 한순간 찾아왔던 봄의 기운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사내들을 발견함과 동시에 처참히 바스러졌다.
잠시나마 온기를 머금었던 얼굴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변질된 감정의 끝은 선명한 적의, 혹은 질투였다.
칼로스는 금방이라도 가까이 다가올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의 발길을 붙든 것은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울려 퍼진 목소리였다.
“연회를 시작하지.”
러셀은 잔을 들어 올리며 축배사를 시작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황제의 상징이자 ‘자비(慈悲)의 영광’인 커타나가 그 위용을 드러내며 빛나고 있었다.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황제가 내일 있을 의식에 대해 언급하는 동안, 맹금의 것과 같은 칼로스의 금안은 사나운 기세를 더해 갔다.
“거봐요, 내 말이 맞다니까.”
“역시 공작께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 거예요.”
“이혼당한 사람이 아데나워 후작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그의 노골적인 표정 변화를 목격한 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아네타는 칼로스가 그들의 입방정에 반박하길 바랐으나, 그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영락없이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럴 바에야 먼저 자리를 뜨는 게 낫지 않을까.
결정을 내린 아네타는 축배사가 마무리되는 것과 동시에 잔을 비워 냈다. 그러자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칼로스가 반응을 보였다.
아네타는 몸을 돌리기에 앞서, 따라오려는 낌새를 보이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칼로스는 그 모습을 보고 자연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빛의 파편을 흩뿌리는 샹들리에. 그 아래에 그를 남겨 둔 채, 아네타는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오롯이 지키고 선 달 하나.
이지러진 그것을 눈에 담던 아네타의 코끝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뿌려 댄 향수 냄새가 진득이 눌어붙었다.
“아이참, 후작 각하.”
칼로스를 떨어뜨려 놓고 왔더니, 웬 여우가 하나 붙었다.
아네타는 은근히 몸을 붙여 오며 교태를 부리는 베르먼 영식을 무감한 눈으로 훑었다. 살살 눈웃음을 치는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지만, 그가 무엇을 노리고 접근했는지 모를 수가 없는 그녀였다.
“혼자가 되셨으니 외로움을 달래야 하지 않겠어요?”
어느 누가 여성만이 권력자를 유혹하려 달려든다 하던가. 남성들도 다를 바 없다는 걸 증명하는 단적인 예가 눈앞에 있었다.
어디까지 할까 싶어 내버려 두었는데, 역시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아네타는 헛웃음을 삼키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글쎄. 아직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실망하는 기색을 보일 줄 알았으나, 의외로 그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속으로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가능성을 점쳐 보고 있으리라.
“그럼 각하께서는, 곁에 둘 남성을 택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시하세요?”
영식은 무엇을 말하든 그 기준에 맞출 수 있다는 듯 굴었지만, 그를 보는 아네타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일뿐더러, 그런 게 있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이가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남자라면 몰라도.’
자연스럽게 칼로스를 떠올린 아네타는 눈앞의 영식을 응시했다.
이 겁 없는 애송이를 어쩌면 좋을까. 일단 터무니없는 조건을 늘어놓아 볼까 싶어 궁리하던 순간이었다.
“그 질문에는 내가 대신 답해 주지.”
귓가에 와 박히는 음성에서 묻어나는 온도와 울림은 지독히도 낮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본 곳에는 예상했던 이가 서 있었다.
‘기어코 따라왔구나.’
아네타는 한숨을 삼켰다.
저 안에서 무슨 말이 오가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내 전 부인은 집안은 물론 품성이나 외모까지 본다더군.”
어둠에 물든 그의 눈동자는 더욱 짙은 감정의 물결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상대를 가차 없이 짓누르는 압박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오직 아네타뿐이었다.
“칼로스.”
그녀는 퍽 익숙하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칼로스는 부름에 답하는 대신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 가벼운 움직임과 함께 찾아온 변화는 아네타가 아닌 다른 이에게서 나타났다.
“어어!”
아네타와 긴밀한 관계라도 된다는 듯 붙어 있던 영식이 무언가에 떠밀리듯 뒷걸음질 쳤다. 그것을 본 아네타는 텅 빈 허공을 훑었다.
칼로스의 능력이 실체 없이 머물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알랑거리며 아부하는 것들은 딱 질색이라던데.”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칼로스의 손목에 닿았다.
둥글게 말린 깃털 모양의 커프스 팔찌, ‘창공(蒼空)의 영광’이 주인에게 공명하듯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영식이 선택받을 일은 없다는 뜻이지.”
칼로스는 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비어 버린 공간을 간단히 차지한 그는 아네타에게 등을 보이며 두 사람의 시야를 차단했다.
“알아들었다면 자리를 피해 주었으면 좋겠군. 보다시피 내가 그녀에게 볼일이 있어서.”
감출 필요 없다는 듯 대놓고 드러낸 목적은 뚜렷했다. 영식은 자신을 내쫓으려 하는 칼로스에게서 위기감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흉흉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영식은 아네타가 자신을 붙잡아 주길 바랐으나, 건장한 몸에 가려진 그녀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베르먼 영식?”
“지,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어서 나가지 않고 뭐 하냐는 뉘앙스의 부름이 자의와 상관없이 미련을 버리게 했다.
겁에 질린 사슴처럼 헐레벌떡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네타는 더는 영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전남편님?”
“무슨 짓이냐니.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전 부인님.”
“내가 그런 말을 당신에게 했던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당신에겐 그런 사람이 어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