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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27)화 (127/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외전 5화

밀로가 입술에 발린 립밤을 맛본 이후 메이는 밀로가 자꾸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이가 흘끗흘끗 몰래 쳐다보면 밀로는 때를 놓치지 않고 눈웃음을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좋아하는 티를 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이젠 그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런 티를 낼 때마다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게 되기까지 했으니.

큰 키와 수려한 외모. 강하지만 오만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고운 품성까지. 현재의 밀로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메이와 눈이 마주친 밀로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요새 공녀님께서 저를 자주 바라봐 주시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당황한 나머지 거짓말이 나와 버렸다. 메이는 티가 날 정도로 밀로를 의식하고 있었기에 그도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나 밀로는 일부러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거였다면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의식 안 하는 듯 보이면 제가 얼마나 속상한지 아십니까? 이래 봬도 저, 남자입니다.”

그녀가 더 자신을 의식했으면 해서.

“다른 누구도 아닌 공녀님께 만큼은 더욱 남자로 보이고 싶고요.”

이내 입가에 띤 미소를 보아 메이 또한 밀로가 자신의 마음을 일부러 흔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퍽 진지해져선 손을 꼭 쥐었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고 있는지…… 공녀님은 모르실 겁니다.”

메이는 제게 닿는 눈빛을 계속 봤다간 홀리기라도 할 것 같아 눈을 피했다.

밀로는 메이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손깍지를 꼈다.

메이는 그동안 그의 매력을 몰라봤던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혹으로 다가왔다.

곧 그녀는 마음을 숨기는 게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솔직히 의식 안 한다면 거짓말이지.”

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데 어떻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겠어.

감추는 건 하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우리에겐 서로 이끌어야 할 가문이 있는데 어떻게 결혼해?”

메이는 진심으로 걱정돼서 묻는 것이었지만 밀로는 걱정 따윈 없이 기쁘기만 했다.

“저와 결혼까지 생각해 주신 겁니까?”

눈웃음을 짓는 그는 덧없이 순백한 여우 같았다.

“아니, 그건 네가 먼저…….”

“제가 만일 공녀님의 반려가 된다면, 누님께서 나제트를 맡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정말로?”

“정말입니다.”

아무래도 스텔라가 최근 들어 가주에도 관심을 가진 듯했다.

“그러니 저와 공녀님의 결혼을 막는 현실적인 문제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밀로는 미소를 보이며 메이의 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물론 뭐든 공녀님의 선택에 달렸지만요.”

집으로 돌아온 메이는 흔들의자에 앉아 아주 오래전 르라트 해변에서 선물 받은 소라를 꺼내 보았다.

밀로와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그땐 차갑지만 따뜻한 소년이라고 생각했었지.’

표정도 차갑고, 목소리도 차가웠지만 보여 주는 행동은 따뜻했다.

소라가 예쁘다고 하니까 바로 손에 쥐여 주며 가지라고 했었으니까.

“이렇게 예쁜 소라를…….”

분홍빛, 보랏빛, 하늘빛이 섞인 파스텔 색감의 소라. 자세히 보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잃지 않을 반짝임이었다.

여전히 밀로는 웃지 않을 땐 차갑지만 웃을 땐 한없이 따뜻하다. 그것이 밀로만이 가진 매력이고, 그를 안 좋아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좋아할 수 없는 이유……?”

안 좋아할 수 없는 이유라니.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나 또한 그를 안 좋아할 수 없다는 건가?

“나 설마…… 밀로 좋아하나?”

그리 생각하니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로를 좋아하는 게 맞다면, 아주 오랜만에 이성을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며칠 후, 기사단에서 밀로를 다시 만난 메이는 한 가지는 확신했다.

적어도 그에게 설레고 있는 건 맞다고.

그런 메이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메이를 발견하자마자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밀로는 결정타를 날렸다. 그가 마주 보고 서선 메이의 손등에 키스했다.

“제게 기회를 주세요, 공녀님.”

갑작스러운 손등 키스에 움찔한 메이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쑥스러움 가득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한다.

“기회는 이미 잔뜩 주고 있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조금 떨려 밀로는 살풋 웃으며 손깍지를 꼈다. 제 앞의 여인을 귀여워하는 눈빛으로.

“그럼 이것도 기회로 알겠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다가가 입을 맞췄다.

***

미로카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땐 따뜻했던 차가 이미 다 식은 후였다.

“만일 디아고도 제드도 메이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연애하다 결혼하게 되었을 거다. 하지만 제드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지금으로선 현실성 없는 얘기지.”

하지만 마치 로맨스 소설 내용을 들은 것처럼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에게는 여운이 크게 남았다.

“디아고의 이야기가 현실적이라면 제드의 이야기는 비극적이고, 밀로의 이야기는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겠네. 현실적인 사랑은 갈등을 유발하고, 이상적인 사랑은 풋풋함을 잃지 않으니까. 솔직히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로맨스 소설 내용이었더라면 밀로의 이야기를 선호했을 것 같아.”

카시우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4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지.”

사랑하는 사람과 4년간 만날 수도 없고 편지도 주고받지 않는다니. 그런 상황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교제 중에 마음이 갈라서는 걸 원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어쩌면 메이가 이 세 이야기를 들으면 디아고를 사랑한 걸 조금 후회할 수도 있겠어.”

아이리스의 말은 짓궂은 구석이 있지만 카시우스도, 미로카곤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듣는다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바뀌진 않을 것 같아. 4년을 기다리다가 재회할 정도면…… 많이 사랑하는 것 같거든.”

영생하는 수호신이면 모를까, 언젠가 죽는 인간에게 4년은 아주 긴 시간이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미로카곤의 말을 끝으로 카시우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두어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메이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더니 몸이 뻐근했다.

“자, 이제 궁금증이 풀렸으니 미로카곤을 살던 곳에 돌려놓고 와야겠네.”

미로카곤은 쉼 없이 얘기하느라 힘들었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제발 빨리 집으로 보내 달라, 수호신. 마물한테도 체력이란 게 있다고.”

“알겠으니까 보채지 마.”

아이리스는 고고하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렴.”

카시우스가 미로카곤을 붙잡으니 그들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

얼마 후 수호 기사들의 정규 사냥 날이 되었다.

모임 장소는 페인트 공원역. 겨울이라 그런지 플랫폼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기사들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역에 도착한 메이는 디아고를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떨렸다.

‘괜히 떨리는 거 티 내서 어색한 상황 만들지 말자.’

이사벨라의 생일 파티 직후였다. 그들은 오늘 호숫가에서 키스한 후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날의 키스는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책임감 없게 말하자면,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할 수 있겠다.

내리는 눈이 예뻐서.

그러나 그녀가 들어선 플랫폼엔 곱고 흰 눈보다 더 예쁜 남자가 있었으니.

메이를 이미 발견했지만 쑥스러워 다가가진 못하고 멀찍이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 디아고 스타시아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메이는 순간 그의 얼굴이 키스 장면 때와 겹쳐 보여 흠칫하다가도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길엔 설레어 양 볼에 닿는 찬바람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와 계셨네요?”

코앞까지 다가온 짧은 머리의 소녀가 묻자 망나니 황자라는 타이틀을 지닌 사내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워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그의 귀가 붉었다.

“왜 눈 안 맞춰 줘요?”

짓궂은 물음에 디아고는 ‘우리 키스했었잖아.’라고 답할 수도 없어 머리칼만 헝클였다.

그런 디아고를 보니 메이는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그를 더 놀려 주고 싶었다.

“키스한 뒤에 딱히 사귀자는 말이 없어서 삐졌던 건 아니죠? 아, 설마 지금도 삐진 상태인가?”

“그, 그럴 리가 있나!”

삐진 게 아니라고 부정하려다가 큰 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제야 디아고는 메이의 푸른 눈과 마주 보았다. 기분 좋은 듯 보이는 그녀를 보니 어째서인지 위축되었다.

“……물론 편지 하나 오지 않아 서운했지만.”

“사겨요, 우리.”

갑작스러운 고백에 디아고는 숨이 멎는 듯했다.

“사귀자고?”

“네.”

이 얼마나 바라 왔던 말인가. 실제로 디아고는 키스 후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드디어 메이와 사귄다니……!’

그런데 너무 좋은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동료들이 몰려와 메이를 데려갔다.

“공녀님! 저희 기차 타야 해요!”

“그래.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자.”

메이가 동료들과 함께 기차 안에 들어가도 디아고는 기뻐서 그 자리에서 실실 웃기만 하였다.

메이를 지켜보던 아이리스는 흡족해했다.

“전엔 메이가 동료들이랑 잘 못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러게. 밝은 모습 보니 좋다.”

카시우스는 홀로 서 있는 디아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엔딩도 괜찮은 것 같아. 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조금 가엾지만 결국엔 해피엔딩이니까.”

수호 기사 한 명이 곧 기차 출발한다며 디아고를 데리고 기차에 올랐다. 이 모습 역시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메이가 행복하다면 무엇이 중요하겠어. 난 메이가 어떤 길을 걷든 응원할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마지막으로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도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메이와 함께 기사들의 떠들썩한 대화 소리,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얼마 안 가 기차는 문이 닫히고, 다음 역을 향해 출발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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