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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26)화 (126/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외전 4화

“잠깐만. 제드가 자처해서 아르토곤의 저주를 받는다고?”

이해할 수 없던 아이리스가 미로카곤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게 말이 돼?”

카시우스도 믿지 못해 미로카곤이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되었다.

“거짓말로 우리를 속여 농락하는 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사실대로 불어.”

수호신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로카곤은 진땀을 흘리며 손사래 쳤다.

“어떤 멍청한 마물이 수호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어? 그것도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로. 정말로 제드는 메이와 디아고가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운명이었다.”

미로카곤의 눈빛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그럼 저주받은 뒤에는 어떻게 되지?”

“그의 생각대로 메이는 제드를 신경 쓰게 돼.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아르토곤을 찾아 죽이고자 하지만 찾기도 쉽지 않아.”

“찾는다고 해도 죽일 수 있는지가 문제겠군.”

S급 마물 중 가장 강한 마물을 3마리 뽑으라면 아르토곤은 무조건 그 안에 들었다. 그만큼 저주가 지닌 힘은 강력했다.

“결국 메이는 제드와 함께 아르토곤을 찾아다니다가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되고, 그들이 연애하게 된 이후에 아르토곤을 찾아서 저주를 풀곤 결혼하지. 이게 그들의 이야기다.”

제드의 계략에 메이가 완전히 넘어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제드의 저주 때문에 그를 신경 쓰다가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이니까.

진실을 보는 눈으로 메이와 제드를 봤던 미로카곤은 머릿속에 어느 장면이 그려졌다.

언젠가 마물 떼가 습격하는 바람에 메이가 위험에 처하자, 이를 목격한 제드가 그녀를 구하다가 살이 닿아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이를 계기로 메이는 제드를 안쓰럽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 안쓰러움은 사랑이란 감정으로 변질한다.

어느 날 메이는 홀로 벤치에 있는 제드 옆에 다가가 앉는다. 무언가 결심한 그녀는 그에게 이리 말한다.

‘아르토곤을 찾아서 저주를 풀 때까지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워서…… 그래서…… 하는 거야.’

메이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려 제드의 얼굴을 감싼다. 제드가 닿는 것이 아닌, 메이가 닿는 것이라 제드는 고통스럽지 않다. 그대로 메이는 그와 입을 맞춘다.

진실을 보는 눈으로 메이와 제드의 첫 키스를 본 미로카곤은 다시 입을 뗐다.

“물론 이미 메이와 디아고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이상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일어나지 않을 얘기여도 재밌네.”

“원래 남의 연애사는 재밌잖아.”

카시우스가 아이리스에게 빙긋 웃어 보이자 아이리스도 못 말린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마지막으로 메이 플로티나의 남편이 됐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있는데, 들어 볼 텐가?”

“누군데?”

“밀로 나제트. 나제트 후작의 아들이다.”

***

스물하나의 나이를 앞둔 늦여름의 메이는 스텔라와 달리 이성에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제드 이후에 그 누구에게도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지 못했기도 하고, 어차피 지금 자신이 누굴 좋아한다고 한들 페르시스와 플로아 때문에 순탄히 연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질척거리던 제드도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 이 시점에, 나제트가에서 같이 립밤을 만들던 스텔라가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넌 왜 밀로한테는 관심 없어?”

작은 통 안에 딸기향 립밤을 채워 넣던 메이는 그 질문이 갑작스러웠다.

“밀로? 갑자기 밀로는 왜?”

“네 주위에 가장 괜찮은 또래 남자는 밀로잖아.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 메이에게 다가오는 남자들 중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가장 괜찮은 사람은 밀로였다.

“밀로한테 제일 마음이 가긴 하지. 그런데 확실한 무언가는 없네.”

밀로는 충분히 매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메이는 그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메이가 글리우곤으로부터 다친 밀로를 구해 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정사를 알고, 그의 상한 몸을 봤던 메이에게 밀로는 이성적인 매력을 느낄 존재가 아닌 안쓰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밀로가 아카 대회에서 1등 한 이후로 본 적 없지? 수호 기사 되면 너한테 적극적으로 다가가겠다고 하던데. 기사단에서 만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현재 밀로는 정식으로 수호 기사가 되어 한 달간 진행하는 신입 기사 합숙 훈련 중이었다. 메이와 같은 제1기사단 소속이었다.

“너 왜 갑자기 나랑 밀로를 미는 거야? 수상해.”

메이가 의심의 눈초리로 스텔라를 바라보자 스텔라는 별 뜻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또 제드 블로체같은 나쁜 놈을 좋아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괜히 그런 나쁜 놈 좋아하지 말고 우리 밀로를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어. 뭐, 달리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응원해 주겠지만.”

그러나 메이의 주변엔 딱히 자신의 남편감으로 괜찮다고 칭할 남자가 없었다.

“그래도 네가 밀로랑 결혼하면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자주 볼 수 있잖아.”

스텔라가 속마음을 드러내니 메이는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게 목적이었구나?”

스텔라는 쑥스러운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친해도 결혼하면 사이가 멀어지는 법이랬어. 난 그러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아무래도 스텔라는 엊그제 사교 모임에 갔다가 무언가 주워들어 온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아빠랑 후작님도 여전히 절친한 사이잖아.”

비록 하인드에게 가정이 생긴 이후 전보다는 자주 못 만나게 되었다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친우였다.

페르시스와 하인드를 떠올리니 스텔라는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아무튼 밀로도 잘 생각해 봐. 밀로랑 결혼하면 좋은 시누이가 되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메이는 스텔라가 시누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밀로는 더 고심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그러던 메이가 생각을 바꾸게 되는 데엔 두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밀로는 메이와 검술 대련을 마친 후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서 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따라 앉았다.

“항상 오늘 같은 날을 꿈꿔 왔습니다. 공녀님과 함께 땀을 흘리고,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는 평화로운 날이요. 꿈을 이뤄서 행복합니다.”

“오늘 같은 날이 행복한 날이면 앞으로도 행복할 날 많겠네. 나, 더는 지지 않을 때까지 너랑 대련할 거거든.”

역대 아카 대회 1등들이 그러했듯, 올해 열린 아카 대회에서 1등 한 밀로는 무척 강했다. 강하기로 손꼽히는 메이였음에도 밀로를 쉽게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봐 드리지 않고 더 열심히 대련에 임해야겠군요.”

밀로는 메이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다가 시선을 그녀의 입술로 옮겼다.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르셨습니까? 앵두처럼 붉고 윤이 납니다.”

“아, 립밤 발랐어. 저번에 스텔라랑 함께 립밤을 만들었거든.”

밀로는 메이의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순간 메이는 움찔했으나 당황한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가까이서 입술의 향을 맡았다.

“공녀님의 입술에서 달콤한 향이 납니다.”

“……딸기향을 첨가해서 그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밀로는 시선을 올려 메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체리색 눈을 마주한 메이는 심장이 빨리 뛰는 듯했다.

“맛도 딸기 맛입니까?”

“맛은-”

맛은 나지 않는다고 답하기도 전에 밀로는 메이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문댄 후, 직접 맛을 보았다.

당황한 메이는 놀라 토끼 눈을 하며 물었다.

“너 뭐 하는 거야?”

밀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하게 굴었다.

“딸기 맛은 아니지만 달콤하군요.”

메이는 당황스럽고도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밀로가 이리도 능글맞고 뻔뻔했나 싶었고, 그런 그에게 자신이 이리도 설렐 수 있었나 싶었다.

그날 밤, 메이는 잠들기 전까지 머릿속이 밀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밀로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떻게 입술에 바른 립밤을 맛볼 수 있지?’

분명 밀로는 연애 경험이 없을 텐데. 갑자기 선수가 된 그가 이상했다.

‘물론 싫진 않았지만.’

메이는 잠이 오지 않아서 오늘 낮에 밀로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해서나 추리해 보기로 했다.

‘아직도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걸까?’

4~5년 전. 스텔라가 말하길 밀로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얘기해 줬었다. 꽤 오래된 얘기지만 밀로가 계속 메이를 좋아하는 티를 냈으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나와 결혼하면 후작 작위를 받을 수 없잖아.’

메이는 나중에 플로티나의 가주가 될 테니,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플로티나의 성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나제트가의 후계자인 밀로는 메이와 결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작위야 밀로가 아닌 스텔라가 대신 받으면 된다지만…… 스텔라가 가주 자리에 관심 있나?

예전엔 가주엔 흥미 없다고 했었으나 지금은 또 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지……?’

생각에 잠겨 있던 메이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상상을 하나 싶어 퍼뜩 정신을 차리곤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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