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외전 2화
메이는 사냥하는 동안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이 디아고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를 봐 주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남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우린 인연이 아니니까.’
섣불리 단정 지으며.
그렇게 자신이 사냥을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그를 신경 쓰다가 밤이 찾아왔다.
정규 사냥 때는 항상 사냥터에서 야영을 해야만 했다. 메이는 호수 근처에 천막을 설치해 밤새 머물 곳을 만들었다.
야영 때마다 쓰는 간이침대도 설치하곤 씻을 차례가 올 때까지 앉아서 쉬었다.
그러다 오늘 사냥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불편해……. 아이리스 님께는 죄송하지만 2기사단으로 이적할 방법을 찾아야겠어.”
구애인과 한 공간에 있는 게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후 기사 한 명이 천막 입구를 열곤 차례가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공녀님, 이제 씻으셔요! 남자들 다 씻고 여자들도 다 씻었어요.”
“응. 고마워.”
야영 때 씻을 공간이 하나일 경우, 남자와 여자 한 명씩 대표로 나와 가위바위보를 한 뒤, 이긴 쪽이 먼저 씻는 게 룰이다. 오늘은 여자 쪽이 져서 나중에 씻게 되었는데, 메이는 혼자 씻고 싶은 마음에 제일 마지막에 씻겠다고 일러뒀었다.
메이는 천막에서 나와 근처 호수로 걸어갔다. 호수엔 모두 다 씻고 나가서 메이 혼자뿐이었다.
잔잔한 바람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메이는 혼자임을 확인하곤 옷을 하나씩 벗었다.
나신이 된 그녀는 벗어 둔 옷을 두고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호숫물은 앞서 사용한 수호 기사들이 마력으로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
처음엔 허벅지에 닿았던 수면이 메이가 앞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위로 올라왔다.
배꼽을 지나, 봉긋한 가슴 바로 아래에 닿을 그때.
첨벙―
뒤에서 누군가 호수에 침범한 소리와 함께 익숙했음에도 낯설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피하는 거야.”
메이는 순간 놀라 걸음을 멈췄으나 몸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그와 필연적으로 마주쳐야만 할 상황이 닥치니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만 생각했다.
사과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미 그에 대한 마음 접은 상태잖아.
그렇다면 우린 인연이 아닌 게 아닐까?
메이의 무정한 생각과는 달리 디아고의 목소리는 한껏 청승맞았다.
“난 너 보려고 돌아온 건데.”
하얗게 피어나는 물안개에 가려져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표정엔 분명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을 보는 표정이었다.
메이는 매끄러운 두 팔로 몸의 굴곡을 가리며 몸을 틀었다.
“목욕 중이에요. 가 주세요.”
그러나 디아고는 미간을 구긴 채 입술만 짓씹고 그녀에게 보란 듯이 다가갔다.
“네가 감히 내게 명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란 걸 모르나 보군.”
다가올수록 몸에 닿는 시선이 더욱 짙게 느껴져 메이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소리 지를 겁니다. 오지 마세요.”
“소리 질러. 상관없으니까.”
어느새 코앞에 다다른 디아고는 거칠게 메이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자신의 옷이 돌이킬 수 없이 젖어 버렸고, 제 앞 여인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사실은 그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많이.
갖은 욕망을 억누르고 마물의 피만 한껏 누리다 보면 메이 플로티나 따윈 쉽게 잊을 줄 알았다.
4년이나 되지 않은가. 무려 4년. 그러니 잊을 수 있다 믿었는데, 결국 잊지 못했다. 자신한테 그녀가 뭐라고.
디아고와 달리, 그를 올려다보는 메이의 눈빛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를 본 디아고는 입술을 뒤틀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보지? 알잖아. 나 원래 이런 사람이란 거.”
잔인하게도, 그는 온전히 따뜻한 말은 건넬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러다 그녀가 자신을 제드 블로체를 내치듯 내치면 미쳐 버릴 게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너도 내 마음을 가볍게 생각했었던 거고. 아니야?”
메이는 가볍게 생각했을 수밖에 없었다. 망나니 황자라 불리던 그에게 진실한 사랑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소모품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가 애처로운 낯을 하며 떠난 후에야 진정으로 좋아했었다는 걸 알았지만.
“……유흥거리를 원하신다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건, 자신과 그는 인연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후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돌아온 답은, 상처 입은 듯한 목소리였다.
“거봐, 너는 지금도 내 마음을 그까짓 유흥 찾는 거로만 여기고 있잖아.”
“…….”
“난 아직도 널 잊지 못해서 미칠 것 같은데.”
물안개가 짙다 해도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는 건 메이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왜 키스했어? 괴롭혔던 것에 대해 복수하려고? 내가 이렇게 미쳐 날뛰는 꼴 보고 싶어서?”
“……분위기에 휩쓸렸었어요. 내리는 눈이 너무 예뻐서.”
이번에도 진심이 아닌 말이었으나 디아고에겐 참담한 답변이었다.
끝내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메이의 팔을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으나 이내 결심했는지, 디아고는 다시 메이를 붙잡았다.
“……그럼 이번에도 분위기에 휩쓸려.”
나를 위해서.
그는 단단히 쥔 팔을 밀어 메이가 호숫물에 자빠지게끔 했다.
풍덩, 이내 큰 물소리와 함께 메이가 물 안으로 빠지더니, 디아고가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디아고는 순식간에 메이의 입술을 덮쳤다.
따뜻한 물속에서의 차가운 감촉이 메이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읍……!”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메이가 숨을 들이켜고자 입을 열면, 디아고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안쪽 살을 탐했다.
‘숨 막혀……. 이러다가…….’
이러다가 죽지 않을까. 의식이 흐릿해질 무렵 디아고가 메이를 수면 위로 꺼내 올렸다.
“웁, 하아- 하아-”
물을 내뱉곤 힘겹게 숨을 들이쉬는 메이는 몸에 힘이 없어 디아고가 양팔을 붙잡아 부축해 주는 상태였다. 디아고 또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차츰 숨소리가 안정된 후,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메이였다.
“……난 아무하고 키스하지 않아요. 그땐 정말로 황자님이 좋아서 했던 거라고요. 당신이랑 연애하고 싶어서.”
“…….”
“황자님의 애인이 되고 싶은 거였지, 결혼 목적으로 키스한 게 아니었다고요. 전 당시에 겨우 열여섯이었고, 아직 플로티나가에서 자리 잡지도 못했을 때라 결혼을 밀어붙이는 말들은 부담스러웠어요.”
잠수 키스 덕인지 정신이 든 메이는 그제야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갔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황자님이 원하는 걸 말하기 전에 내가 뭘 원하는지, 뭘 원하지 않는지 알아볼 생각은 안 했어요?”
가슴 한편에 묻혀 두고 잊으려 했던 본심을 꺼내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메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안해. 앞으론 네 마음을 헤아리는 걸 우선으로 할게.”
그는 메이를 자신의 품 안으로 이끌었다.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둘은 4년 만의 재회를 감격해했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메이가 설치해 뒀던 천막 안에 들어갔다.
할 얘기가 많다는 핑계로 같이 자겠다는 그가 속보여서 웃음이 나왔으나 메이는 아량을 베푼다는 듯이 허락해 줬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이불 덮은 그들은 4년간 못했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장기훈련 어땠어요?”
“처음엔 최악이었는데, 하다 보니 적응했어.”
“거기엔 유흥거리가 없어서 심심했겠어요?”
“그럴 리가. 더욱 멋있어져서 돌아와 너를 유혹할 생각에 들뜨기 바빴지.”
그에 메이는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디아고는 자기애가 넘쳤다.
“제가 넘어갈 거라곤 어떻게 확신했대요?”
“이래도 안 넘어오게?”
그가 갑자기 메이의 손목을 잡고는 그의 복부에 가져다 댔다. 뜨겁고 단단한 근육이 손에 닿아 움찔했다.
“너, 내 몸 좋아하잖아.”
메이는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내빼고는 짓궂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으나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일단은 그의 몸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물어보는 게 먼저일 듯했다.
그러다 디아고는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몹쓸 짓을 했어.”
이번엔 메이가 짓궂게 굴었다.
“확실히…… 씻고 있는데 들이닥치는 건 몹쓸 짓이긴 하죠. 그런데 처음 본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
“!”
훅 들어오는 말에 디아고는 놀라 눈을 크게 뜨다가도 피식 웃었다.
“나 없는 동안 더 대담해진 것 같군. 아니다, 원래 대담했었나?”
원래도 메이는 불의를 참지 못해 상대가 황자임에도 불구하고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당돌하게 표현했었다.
“그게 제 매력이죠.”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디아고는 메이가 방심한 사이 그녀의 위로 올라가 덮쳤다. 도망칠 수 없게 허리는 두 다리로, 머리는 양팔로 가둔 상태가 되었다.
그가 거친 손으로 메이의 뺨을 끈적하게 쓸어내리자, 메이는 긴장하여 절로 침을 삼켰다.
“너의 그 순백한 얼굴이 자꾸만 나를 시험에 들게 만들어.”
내가 너를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
가져야만 할지. 가져선 안 될지.
메이는 굴복하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올려 디아고의 뺨을 어루만졌다.
“황자님께서 정하는 쪽이 답이겠죠.”
“이러지 마. 네가 이러면 나 착각해.”
디아고는 메이의 손을 가져와 손등에 키스했다.
“가져도 되는 줄 알고.”
심박수가 가파르게 올라 귓가엔 쿵쿵대는 소리만 가득하다. 메이는 미소를 보이며 용기 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 허락을 끝으로 디아고는 메이의 목을 삼키듯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