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22화
내 위로를 끊고 지겨운 질문이 들어왔다.
“디아고를 좋아하게 돼서 내 고백은 받아 줄 수 없는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더 직설적으로 말해야 알아듣는단 말인가.
“아니. 너 때문이야.”
네 행실로 인해 너를 좋아할 이유가 사라졌어. 네가 바뀐다고 해도 과거의 일이 떠올라 너를 좋아하게 될 순 없을 거야.
이 이상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제드는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허한 표정을 하다가 다시금 반론하려 했다.
“하지만 디아고는-”
“적어도 황자님은 내게 항상 진심을 보였었지.”
이번엔 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자꾸 황자님과 비교하지 마, 제드. 그럴수록 네가 못나 보여.”
“…….”
내 말이 심했나 싶었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질척거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만해. 우린 인연이 아닌 거야.”
친구도 뭣도 아니었던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당연하지만 후회는 없다. 설령 그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지라도.
“……갈게.”
자리를 벗어나고자 복도를 걷다가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디아고가 몇 걸음 앞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찾다가 제드와의 대화를 듣게 된 것 같았다.
“너는 왜…… 말도 없이 사라져. 찾았잖아.”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가요.”
디아고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도 내 뒤에 있는 제드를 보고는 미간을 구겼다.
“저 자식이 억지로 데려온 거야?”
“아니에요. 사과하고 싶다길래 제가 따라갔어요. 안 그러면 계속 다가올 것 같아서요.”
“……다음엔 따라가지 말고 나를 불러. 내가 족쳐- 아니, 혼쭐 내줄 테니까.”
말을 순화하려고 노력하는 그를 보니 괜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네, 알겠어요.”
그는 귀가 붉어지더니 어색한 시선 처리를 하며 뒷목을 문질렀다.
나는 문득 무언가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
“아, 부탁할 거 있어요.”
그는 그게 무엇이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들어줄 거죠?”
***
황녀님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황궁에 저녁이 찾아왔다. 겨울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해가 빨리 졌다.
나를 제외한 모든 하객들은 돌아간 상태. 나는 디아고와 함께 남아 꿈의 호수에 당도했다.
호수를 앞두고, 내가 온몸에 마력을 두르니 디아고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들어가려고? 도대체 뭘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내 부탁은 내가 호수에 들어가면, 10분 후 나를 꺼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발끝까지 젖지 않게 마력을 감았다. 몸에 마력을 두르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합숙 훈련 때 배웠었다. 사냥 중에 물에 들어갈 일이 있을 때, 몸이 물에 젖으면 체온이 낮아져 위험한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마력으로 몸이 젖지 않는 방법을 알려 줬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준 사람이요.”
“지금의 너를 있게 해 준 사람……?”
디아고가 턱을 짚고 조용히 있는 게, 그 사람이 누군지 추리하는 듯했다. 그사이, 나는 호수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들어갈게요.”
나는 망설임 없이 호수에 뛰어들었다.
첨벙―
“메이!”
뒤에서 다급히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캄캄한 호수 안. 간신히 내 육신이 보일 정도로 어두운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파동이 모여들었다.
파동과 함께 사방에서 뿜어지는 희미한 빛은 내 눈을 멀게 하기 충분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낯설지만 익숙한 세상. 전생에서나 봤을 법한 현대식 건물, 어느 소아과 진찰실 안이었다.
처음 보는 의사는 마지막 환자를 응대하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배탈 나지 않게 땅에 떨어진 음식 주워 먹지 말아요, 알았죠?”
“네,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보호자로 추정되는 이가 아이를 데리고 의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진찰실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밖에선 진찰료를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컴퓨터를 보며 타자를 치고 있는 의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로…… 소아과 의사가 됐구나.
메이를 보고 싶어서 꿈의 호수에 들어왔다. 꿈의 호수는,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꿈을 꾸게 해 주니까.
어디 아파 보이지도 않고, 표정이 밝은 걸 보니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안심되었다.
그때, 메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는 듯이.
“나 보러 왔구나.”
나는 놀라서 크게 움찔했다. 그녀에게 내 모습이 보이고, 그녀가 내게 말을 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얼떨떨해서, 나도 모르게 말이 바보처럼 나갔다.
“나한테 새로운 삶을 준…… 메이 맞지……?”
“응. 여기서는 은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새로운 삶을 줬다고 하는 걸 보니 파사베아를 만난 모양이네.”
의사 가운을 입은 여자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당시 나에겐 없었던 긍지와 용기가 너에겐 보였거든. 파사베아한테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메이 역할을 내가 다시 맡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차마 다시 메이로 살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에게 닥칠 시련들을 이겨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며.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려주었다. 스텔라에 대한 얘기가 나오니 그녀는 스텔라 또한 빙의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나를 대신하여 메이 역할을 맡을 사람을 고를 때, 스텔라도 함께 있었어.”
그녀의 말에 따르면 스텔라는 원작 내용 이후, 제드와 이혼한다고 했다. 사유는 제드의 외도. 이혼 후 스텔라는 슬픔을 못 이겨 그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도 알려 주었다.
소설에선 스텔라의 삶이 마냥 좋아 보였는데 아니었다니. 그래도 지금의 스텔라는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듯했다.
“나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한 번 안아 볼 수 있을까?”
나는 과거 메이였던 이를 안아 주었다. 아버지에게는 버림받고 나중에는 노예가 되어 맞아 죽는 결말을 맞이했던 그녀를.
꿈임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행복해 줘서 고마워.”
내가 먼저 건넨 말은, 다시 따스한 말로 보답받았다.
“나야말로 행복해 줘서 고마워.”
내 형체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우리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잘 있어.”
“잘 가, 메이.”
그대로 시야는 암전이 되었다. 꿈에서 깨려고 발버둥 칠 때쯤, 누군가 나를 끌어안았다.
곧바로 상승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데리고 호수 밖으로 나가려는 듯했다.
그의 품과 내 허리를 꽉 붙잡은 팔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촤악―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물속에서 나를 데리고 온 디아고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부탁 하지 마. 부탁해도 안 들어줄 거니까.”
그는 인상을 쓴 채로 경고하듯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가 화났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안다. 디아고는 지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것이라는 걸.
그를 보고 있자 하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알겠어요.”
우리는 땅으로 올라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에 마력을 두른 덕에 옷도, 머리카락도 젖지 않았다. 디아고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지금의 너를 있게 해 준 사람이 누구길래 직접 보지 않고 호수에 뛰어든 거야?”
“그래야만 볼 수 있는 사람이라서요. 화내는 거 아니죠?”
“……아니야.”
그때, 디아고의 코에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후 어깨에도, 손등에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 내리네.”
나도 그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와아- 첫눈이네요.”
우리는 잠시 살랑살랑 내려오는 눈송이를 감상하니 지나온 나날들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올해 많은 일들이 있었지. 정식으로 수호 기사가 되기도 했고, 글리우곤을 잡기도 했고, 남장을 끝내고 페르시스의 딸로 살아가게 되기도 했다.
나는 소설 속 메이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나만이 그려 내는 메이의 삶을.
비록 세상이 나를 순탄하게 살아가게 하진 못했지만 앞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며 해변의 파도와 같은 삶을 살 것이다.
때로는 안정적이고, 때로는 모험적인 삶.
그것이 내가 바라는 행복이다.
안정은 아빠나 플로아가 준다면 모험은…… 역시 디아고인가.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물론 그동안은 안 좋은 쪽의 일들이긴 했는데 지금의 그는 나를 좋아하니까.
나도 그에게…… 관심이 있기도 하고.
나 좋다는 잘생기고 몸 좋은 사람을 어떻게 계속 싫어할 수 있겠어.
그러니 이건 새로운 목표 설정 후 나의 첫 모험이다.
“황자님.”
“응?”
“키스해도 돼요?”
그는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곤,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췄다.
내리는 눈송이는 차갑지만, 그의 입술은 따뜻했다.
그와 숨을 나누고 떼어 낼 때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내게 고백했다.
“좋아해.”
그러고는 자석처럼 다시 따라와 내 입술을 삼켰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큼지막한 손으로 내 목을 감쌌다.
내리는 눈이 우리의 머리와 어깨에 조금씩 쌓여도, 나는 그와의 키스를 이어 갔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