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20화
파사베아는 가만히,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끝내 메이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아직 이 세계도 정복하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그에게서 정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큰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 같아서 새삼 무서웠지만 메이는 티는 내지 않았다.
“증조할아버지가 다른 차원이 아닌, 이 세계에서만 여행하겠다고 하면 플로아도 좋은 결정이라고 해 줄 거예요. 다른 차원에만 가지 않으면, 영영 못 볼 일 없으니까요.”
메이의 말에 틀린 것이 없어, 그는 설득당해 주기로 했다.
“그럼 앞으로는 세계 일주를 목표로 삼아야겠구나.”
“좋은 결정이에요.”
메이는 그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
파사베아는 이틀 후, 여행에 필요한 짐을 챙겨 떠나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플로아는 다른 차원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나와 플로아, 페르시스는 공작저 대문에서 파사베아를 배웅했다.
나는 앞서가다가 멈춰 뒤를 돈 파사베아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더 가져가실 짐은 없어요? 배낭 하나는 너무 적지 않나 싶어서요.”
“진정한 여행가는 마실 물만 챙기는 법이지. 이동할 때 불편하지 않으려면 짐을 최소화해야 해.”
“하지만 무려 세계 일주잖아요. 몇 년간 여행하실지도 모르는데…….”
“걱정 마렴. 무려 30여 년간 했던 첫 여행 때의 짐은 이것보다도 단출했었으니까. 그런데도 잘 살다가 돌아왔지 않으냐.”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니 마음은 놓이는 것 같았다.
파사베아는 내 옆에 있는 페르시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페르시스, 메이를 잘 보살펴 주려무나. 네가 메이를 아낀다는 걸 알기에 걱정은 안 한다만, 워낙 여린 애여서 말이다.”
“항상 메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겁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할아버지.”
나는 파사베아에게 다시금 당부했다.
“절대로 마법진 쓰시면 안 돼요, 알겠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시면 엄청 슬플 거라고요.”
파사베아는 미소를 보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겠단다. 언젠가 돌아올 때 네가 좋아할 만한 기념품을 사 오마.”
플로아는 파사베아와 헤어지는 게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는 사람처럼 구슬픈 낯을 했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다치지 마시고요.”
파사베아는 괜히 그에게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내가 다칠 걸 걱정하다니.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그는 플로아를 안아 주었다.
“플로티나를 잘 지켜 다오.”
“네…….”
몸을 뗀 파사베아는 나와 눈을 맞췄다.
“다녀오마.”
“즐거운 여행 하고 오세요!”
멀어지는 파사베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파사베아가 떠난 후, 플로아에게 쿠키를 안 줬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쿠키를 만들었다. 스텔라와 함께 만들었던 쿠키는 오래되었으니 버리고 새 쿠키를 줄 계획이었다.
나는 응접실에서 아빠와 플로아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쿠키를 건넸다.
“플로아, 제가 만든 쿠키예요.”
플로아는 나긋하게 미소하며 받았다.
“귀여운 쿠키군요.”
“실은 며칠 전에 스텔라랑 쿠키를 만들었었거든요. 그때 플로아한테 줄 쿠키를 만들었는데 깜빡하는 바람에 다시 만들었어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메이 님. 그런데 왜 검 모양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플로아에게 준 쿠키는 장검 모양이었다.
“플로아는 제 검술 스승이잖아요. 플로아 하면 검이 떠오르더라고요.”
“귀여워서 먹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나중에 또 만들어 줄 테니 드세요.”
플로아와 대화하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은 페르시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전에 받았지만 또 받고 싶다는 듯한 소망의 눈빛이었다.
나는 예상했다는 듯이 다른 쿠키 봉지를 그에게 건넸다.
“이왕 쿠키 만드는 김에 아빠 것도 만들어 봤어요. 이번엔 스마일 모양이에요.”
쿠키를 받은 페르시스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아빠가 웃는 모습이 좋아서 스마일 쿠키예요.”
“고맙구나.”
쿠키를 보며 좋아하는 페르시스의 모습을 보니 스텔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빠가 쭉 딸바보로 살 것 같다며 결혼하기 힘들 거라고 했었지?
하지만 페르시스는 파사베아를 배웅할 때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할 거라고 했었다.
그러면 내가 사랑해서 데려오는 남자한테도 잘해 주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불쑥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빠, 나중에요, 제가 결혼하면 사위한테 잘해 줄 거죠?”
내 말을 끝으로 페르시스도, 플로아도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수 초간 정적이 돌았다. 나는 그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
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 불안해졌다.
“시집살이…… 아니, 장가살이 시킬 거예요?”
정말 그럴 거냐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페르시스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는 딱딱하게 굳은 안면을 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메이,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옆에 있던 플로아도 내게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그래서 벌써 혼인해서 이 집을 떠나실 생각을 하고 계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페르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에 사는 놈이지? 당장 찾아가겠다.”
나는 당혹스러워서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왜 찾아가요……?”
“감히 내 딸을 넘보는 간 큰 놈의 얼굴 좀 보러.”
나는 마구 손사래 쳤다.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하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아주 없지는 않아, 이내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은요…….”
어째서인지 디아고가 떠올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제야 페르시스는 헛숨을 내쉬며 도로 앉았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가 보란 듯이 툴툴거렸다.
“아빠 때문에 누구랑 연애도 못 하겠네요.”
“메이, 넌 아직 연애하기에 너무 어려. 내 눈엔 아직 꼬맹이란 말이다.”
“하지만 전 이제 성인인걸요? 빠르면 결혼도 하는 나이가 되었다고요.”
페르시스는 내 말을 듣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뒷목을 붙잡았다. 그러다 곧 강고하게 금지했다.
“근 10년간은 허락 못 해. 연애도, 결혼도 하지 마.”
“네에?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러다 좋은 사람 놓치면 어떡해요.”
내가 그의 말을 따를 수 없다는 듯이 굴자 옆에서 플로아가 내 손을 잡았다.
“메이 님, 페르시스 님과 제가 있는데 굳이 좋은 사람이 더 필요하십니까? 사윗감은 한 15년 뒤에 말 잘 듣는 놈으로 하나 구해 오겠습니다.”
플로아의 말에 페르시스는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플로아.”
“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사이가 돈독해진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애인이 생겨서 그들에게 소홀하게 되면 서운하겠지.
하지만 10년은 너무하다. 말 잘 듣는 놈을 구해 오겠다는 건 또 뭐람.
나중에 연애하게 되면 아빠랑 플로아한텐 무조건 비밀로 해야겠다…….
“내 딸이 너무 예뻐서 탈이군. 내 눈에만 예쁘면 좋았을 것을, 쯧.”
페르시스는 혀를 차곤 집사를 불러 그에게 명했다.
“앞으로 메이에 관해 구애 편지가 들어오면 전부 버려.”
“네, 주인님.”
딸의 혼삿길을 막는 페르시스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나와 결혼할 사람은 많이 고생할 듯했다.
***
헤스티아의 죽음으로 제3기사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1, 2기사단 단장인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할 일이 많아져 정규 사냥은 연말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페르시스와 외출을 하거나, 플로아 혹은 요한과 검술 대결을 하거나, 스텔라와 만나서 놀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 후, 황녀 이사벨라의 생일 파티가 열리게 되었다.
생일 파티 장소는 건국제 무도회가 열렸던 황궁 에메랄드홀. 마차에서 내리니 초겨울의 찬 바람이 몸을 스쳤다.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 나는 안개가 낀 하늘을 보며 혼잣말했다.
“춥네. 저녁에 눈이 올 수도 있다고는 했는데…….”
낮인데도 조금 어둑한 하늘을 보니 정말로 눈이 올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 눈이 오면 첫눈인 거네. 아직 눈이 내린 적은 없으니까.
나는 코랄빛 드레스 자락을 잡고 연회장에 들어갔다.
장내엔 무도회 때처럼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귀족이었고, 타국에서 온 사신들도 있었다. 그들은 의상이 달랐기에 타국에서 왔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황녀님은 어디 계시려나…….”
이사벨라를 만나기 위해 두리번거리니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플로티나 공녀로서 사교 모임에 처음 참석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많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녀님. 저는 빅토리아 가문의…….”
“저는 발란 백작의 차녀…….”
그러나 내 관심은 오직 황녀님뿐. 그들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게 보였으나 적당히 인사만 하곤 이사벨라를 찾아 나섰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의 생일 파티니까 디아고도 여기 있겠네?
문득 디아고가 떠올라 그를 찾으려는 그때,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항- 공녀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황녀답게 화려하고도 귀엽게 꾸민 이사벨라가 달려오고 있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내가 예를 갖춰 인사하니 이사벨라가 환히 반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