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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9)화 (119/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9화

“플로아, 원래 가문의 힘은 뜨거운 거예요?”

“몇 분 있으면 식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량의 기운을 흡수한 내 몸은 열이 나듯 뜨거워졌다가 서서히 식었다.

플로아의 손을 놓고, 시험 삼아 마력을 써 보니 은색 기운과 함께 붉은색 기운이 섞여 나왔다.

“와아-!”

가문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감사해요, 증조할아버지!”

“처음부터 계약을 그리해야 했는데……. 가문의 힘이 발현되지 않아 마음고생 했을 너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구나.”

“괜찮아요. 결국엔 이렇게 가문의 힘을 쓰게 되었는걸요?”

나는 가문의 힘이 아이리스에게서 부여받은 마력과 섞여 나오는 게 신기해서 요리조리 마력을 써 보다가 다시 마법진을 그려 보았다.

“가문의 힘까지 받았으니 이번엔 게이트를 생성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대를 품고 다시 그린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이번엔 제발 돼라……!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꾹 감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불빛만 나올 뿐, 게이트는 생성되지 않았다.

“뭐야…….”

내가 실망하니 페르시스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아. 할아버지께서 특별하셨던 거야.”

“괜찮다고 해 줘서 고마워요, 아빠.”

파사베아는 마법진을 구현시킬 사람이 자신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레드 박사의 마법진은 특정 인물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 했다. 나도 그 책의 다른 마법진은 구현시키지 못해.”

“그렇군요…….”

플로아는 그의 옆에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였다.

“이를 알면서도…… 다시 여행하실 겁니까? 플로티나로 돌아오지 못한 데도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

파사베아는 아주 오랜만에 들린 공작저를 돌아다니며 플로아와 대화를 나눴다.

“플로티나도 내가 없는 사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긴, 내가 떠났을 적엔 페르시가 걸음마를 떼고 난 직후였으니. 바뀌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구나.”

“바뀌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저는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겉모습으로 치면 플로아보다 바뀌지 않은 건 없었다. 그는 영생하는 존재이니 늙지 않으니까.

“너도 바뀌었단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뀔 시간 동안 내가 자리를 비웠으니 당연한 거겠지.”

“저의 어떤 부분이 바뀌었다는 겁니까?”

파사베아는 메이를 사랑스럽게 보던 플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어. 아마도 그 아이가 바꾼 것이겠지.”

그가 알던 플로아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였다. 자신을 잘 따르긴 했으나, 그것은 사랑이 아닌, 존경에 가까웠다.

“메이 님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그 앤 전생에도 그랬어. 씩씩하고 당차고 밝은 애였지.”

“신기합니다. 어떻게 전생에도 만나고 이생에도 만나는 우연이 다 있을 수 있는지…….”

“그 아인 처음부터 내 증손주가 될 운명이었던 게지.”

파사베아는 여행을 하며 수많은 곳에 가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었다. 그렇기에 꼬마애 한 명쯤은 잊을 법도 한데, 그는 그 아이를 기억했었다.

“메이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열어 함께 갈 생각이었단다. 어차피 그 아인, 그곳에 가면 혼자거든. 혼자선 쓸쓸할 테니 함께 여행을 하려고 했지.”

그리고 그가 바랐던 것은, 어느 날 하늘의 명에 따라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자신의 묘소에 조문객이 와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사람이 메이이길 바랐었다. 그때쯤이면 메이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길 바라며.

하지만 그런 자신을 이해해 줄 메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고민이 되긴 했다.

“……메이 님도, 파사베아 님도 떠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 여행이 가고 싶으시면, 굳이 다른 차원으로 가지 않고 이 세계에서 하셔도 되는 거잖습니까.”

플로아와 파사베아는 복도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파사베아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면, 게이트 너머에 달리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모험을 해 보고 싶단다. 다른 차원에서 하는 모험은 더욱 짜릿하지.”

“그 짜릿함이 저보다 더 중요하십니까?”

그 말에 파사베아는 피식 웃었다.

플로아가 많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보면 그는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아닙니다.”

플로아는 언제나 파사베아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이니까. 몇백 년을 살았음에도 처음 생긴 가족이니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저는 파사베아 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파사베아 님도 저를 가족이라 생각하신다면, 떠나지 말아 주세요.

파사베아는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플로아를 보낸 후 하염없이 거닐었다.

플로티나가 이리도 넓었었나. 귀족도 뭣도 아니었던 플로티나가 이리도 거대한 저택을 소유하게 됐다는 것에, 새삼 그의 공이 크다는 걸 실감했다.

차라리 반역을 일으켜서라도 황제가 될걸 그랬다. 그랬으면, 제국을 강대한 나라로 만드느라 바빠 모험 따윈 생각지도 않았을 터.

파사베아에게 무료함은 끝없는 갈증이었다. 무엇을 해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런 무료함을 없애주는 건 여행, 그리고 모험이었으니.

떠나는 게 맞다.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파사베아 님도 저를 가족이라 생각하신다면, 떠나지 말아 주세요.’

그 녀석이 그리 애절하게 부탁하는데 어디 떠날 수가 있겠는가.

파사베아는 마지막으로 들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만에 도서실에 들어갔다.

그는 독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누군가 자신을 심란하게 만들 때면 도서실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내가 황실 기사단장이었을 때 부단장 녀석이 하도 버릇없이 굴고, 사고를 많이 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자주 이곳에 와서 낮잠을 잤었지.’

지금은 생김새도 잘 기억이 안 나는 녀석이지만 그 한 놈 때문에 기사단장 직을 내려놨었다. 그놈을 제대로 혼내지도 않고 말이다.

그때 플로아가 그랬었지. 왜 그리 쉽게 용서하냐고.

자존심 탓에 목표가 있다는 둥, 어차피 안 볼 사람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혼내지 않길 잘했지. 그놈이 황태자가 되고, 지금의 황제가 되어 내가 넓힌 제국을 이토록 잘 유지하고 있으니까.’

파사베아가 옛 생각을 하면서 도서실 중앙으로 걸어가니 그의 하나뿐인 증손주가 보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메이.”

그 부름에 메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증조할아버지! 책 읽으시게요?”

파사베아는 고개를 저으며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뭐 읽고 있는 게냐.”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요. 제가 로맨스 판타지를 좋아하거든요.”

“어제 창조주와 소설에 관한 얘기를 했음에도 소설이 읽히더냐?”

소설을 읽었다간 또 다른 몸에 빙의될 수도 있는데도 소설을 읽고 싶냐는 말이었다.

“메이가 가엾게 죽은 게 납득이 가지 않아서 저를 빙의시킨 거니까 아마 제가 죽기 전까지는 다른 역할을 맡게끔 하진 않을 거예요.”

“똑똑하구나.”

“그런데 증조할아버지는 도서실엔 왜 오셨어요?”

“조용하고 햇살도 잘 들어오니 낮잠이나 자볼까 하여 왔단다. 그런데 네가 있으니 조언 좀 들어 볼까 해.”

“조언이요?”

“전엔 항상 내가 조언을 해 줬으니 이번엔 너한테서 조언을 들어 보자꾸나.”

메이는 이전 생에서 파사베아한테서 들은 조언을 떠올렸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고민이라고 털어놓으니 죽여서라도 복수하라고 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애한테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당시 우울했던 기분은 조금 나아졌었다.

메이는 읽던 책을 덮고선 옆에 두었다.

“좋아요. 고민거리 말씀해 주세요.”

파사베아는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와 플로아가 떠나지 말라고 했던 것을 언급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공작저에만 있기엔 너무 무료하고, 그렇다고 다른 차원으로 가기엔 영영 못 볼 플로아가 걱정이라는 거죠?”

“그렇지.”

“그러면 해답은 간단한데요? 이 세계에서만 여행하면 되잖아요.”

메이는 더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듯이 말했다.

“플로아가 슬퍼할 게 걱정이라면 일단 다른 차원으로 가는 선택지는 배제해야죠. 여행을 안 하는 선택지도 큰 무료함을 가져오니 배제하면…… 다른 차원으로 가지 않은 선에서 여행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파사베아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을 보이니 메이가 적극적으로 설득시켰다.

“지금 이 세계엔 여행할 곳도, 모험할 곳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표정 짓는 거죠?”

“확실히, 다른 세계보다는 신선하지는 않구나.”

“아니요. 증조할아버지께서 세계 각지를 다녀와 보신 것도 아니잖아요. 하다못해 전국 곳곳, 다 누벼 보신 것도 아닐 테고요. 최근에 새로 생긴 관광지는 당연히 못 들러 보셨을 거고요.”

“그건…… 그렇지.”

“이전에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그런 말이 있었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요. 지금쯤이면…… 강산이 몇 번이고 변했을 텐데요? 굳이 다른 차원에 가서 여행하고 모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 세계에도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가 있는 이곳도 굉장히 넓어요, 증조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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