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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8)화 (118/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8화

그날 밤, 나는 남자 둘 때문에 일찍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페르시스와 플로아가 곁에서 같은 말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메이, 제발 그 어디에도 가지 말고 아빠랑 함께 살자.”

“저는 메이 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침대 양 끝에 걸터앉아 내 손을 하나씩 잡아 들곤 애원했다.

덕분에 양팔을 뻗어 대자로 누워 있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 플로아. 안 간다고 벌써 스무 번도 넘게 말했잖아요. 전 여기서 평생 살 거예요.”

진심이었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 가족도, 친구도, 소중한 사람들도 전부 이곳에 있는데 왜 떠나겠는가.

“하지만 메이 님은 전에도 안 떠날 것처럼 굴어놓고선 떠나셨었죠. 믿을 수 없습니다.”

“플로아, 아까는 절 믿는다면서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

“지금 불리해서 대답 안 하는 거 맞죠?”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들의 손을 뿌리치곤 상체를 일으켰다.

그들은 바짝 다가와 다시금 애원했다.

“더는 네 속 썩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러니 떠나지 마.”

“저 또한 메이 님을 힘들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약속해요.”

“저를 안 믿어 주는 게 속 썩이는 거고, 힘들게 하는 거예요. 두 분, 제가 떠나길 바라세요?”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페르시스가 나를 안아 주었다.

“미안하다. 앞으론 네 말은 다 믿으마.”

플로아는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저도 메이 님을 믿습니다.”

정말이지, 속이 너무 훤히 보인다니까.

“알겠으면 이만 가 주세요. 저, 자고 싶어요.”

“자는 모습 보고 나갈게.”

조금 부담스러웠으나 안 된다고 하면 대화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침대에 누웠다.

페르시스는 이불을 덮어 주고, 플로아는 베개를 제대로 벨 수 있도록 옮 겨주었다.

“저 말고 증조할아버지한테 가 보세요. 특히 플로아는 몹시 보고 싶어 했었잖아요.”

“메이 님께서 잠이 들면 가겠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제겐 메이 님이 가장 중요해서요.”

“어차피 할아버지는 수호신들과 대화 중이다.”

우리의 대화가 끝난 후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찾아와 파사베아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대화가 길어지는 걸 보니 다른 차원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것 같군.”

아. 다른 차원…….

“아빠랑 플로아는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증조할아버지한테서 모든 진실을 듣고도 저한텐 가지 말란 말밖에 안 한 것 같아서요.”

대답은 동시에 나왔다.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마음인 건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네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해도 난 상관없다. 네가 내 딸이고, 제1기사단의 수호 기사이며 메이 플로티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저는 메이 님 존재만으로도 뭐든 만족합니다.”

이에 나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빈말 아니야. 그러니 괜한 고민 갖지 마.”

“제게 털어놓으시면 뭐든 비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플로아.”

내가 플로아를 향해 미소를 보이니 페르시스의 입가가 심술 맞게 꿈틀거렸다.

“메이, 내가 더 좋다고 해 줘.”

그 좋다는 게 플로아가 좋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페르시스가 바라는 대로 말해 줬다.

“당연히 아빠가 제일 좋죠.”

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은지 페르시스의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갔다.

“이제 그만 자. 잘 시간 넘었어.”

“아빠랑 플로아도 자러 가세요.”

“네가 자는 것만 보고 갈게.”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오늘은 하루가 굉장히 길었다.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불안했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 존재를 이해해 줄 사람이 늘었으니까.

본래의 메이가 잘살고 있다는 것도 기쁘고, 그녀가 택해서 내가 빙의하게 된 거란 사실도 기쁘다.

나는 그렇게, 기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우리는 다 함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굳이 밥을 먹을 필요 없는 플로아도 참석했다.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었기에 그는 제 앞에 놓인 수프를 뜨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먹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시끌벅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먹하지도 않은 식사 시간을 가지던 중, 파사베아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게이트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단은 돌아가지 않겠다는 내 말에 파사베아는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 더 생각해 보라고 했고, 나는 오늘 아침까지 그 답을 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수프를 먹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식사 도중에 날아든 파사베아의 질문에 페르시스와 플로아도 먹던 걸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엔 혹여 내가 떠날까 봐 두렵기라도 하는지 초조함이 묻어났다.

“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서요. 저는 이곳이 좋아요.”

빙의는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지만 플로티나에 남기로 한 건 내가 진정 원해서 한 결정이다.

페르시스와 플로아는 내 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존중해 줘야지.”

파사베아가 연어 샐러드를 먹을 때쯤, 이번엔 플로아가 그에게 물었다.

“파사베아 님, 이제 더는 여행 안 하실 거죠? 어차피 마법진으로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앞으로 한 번뿐이니까요.”

그러나 파사베아는 쉽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원래는 마지막 게이트를 메이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었단다. 메이는 원치 않게 이곳으로 오게 된 거니까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메이가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니…….”

“설마 또 여행하시려는 겁니까?”

“여기에서만 있기엔 인생은 짧고 갈 곳은 많지 않으냐.”

“하지만…… 이번에 가시면 영영 못 돌아오실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치킨 브리또를 먹던 나는 입 안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해결 방안을 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여행가시면 플로아가 데리러 가면 되잖아요.”

“그게…… 어제 새벽에 메이 님께서 주무실 때요, 책을 보고 마법진을 그려서 시도해 봤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페르시스님, 아이리스, 카시우스, 전부 실패했습니다.”

마법진을 잘 구현해 내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게 저희는 아니었던 거죠. 아무리 강한 마력이 있다고 하더라도요.

나는 손에 쥔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한 번 시도해 볼까요?”

식사 후, 우리는 마법진을 그리기 좋은 연무장으로 나왔다.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파사베아에게 다가갔다.

“책 주세요.”

“여기 있다.”

파사베아는 레드 박사가 지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마법진 모음집을 건네주었다.

차원이동 마법진은 복잡하게 생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마법진을 잘못 그려서 실패했던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여러 번 그려 봤었거든요.”

어쩐지 다 큰 어른 넷이 옹기종기 모여서 땅에 마법진을 몇 번 그리면서 머리를 맞댔을 걸 생각하니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땅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다 그린 후엔 마법진 정 중앙에 올라가 육신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은색 기운이 마법진에 스며들어 푸른색 빛을 냈지만 그대로 끝. 게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어라? 이상하네. 빛은 나오는데…….”

“저희가 새벽에 했을 때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현재로선 이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건 파사베아 님뿐이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를 지켜보던 파사베아는 다른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그런데 어째서…….”

“왜 그러십니까?”

“아, 계약서 때문이구나. 플로아, 플로티나 수호신 체결 계약서 꺼내 보아라.”

플로아는 그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시키는 대로 계약서를 꺼내 보았다.

손가락을 튕기니 뿅! 하고 계약서가 나타났다. 계약서는 마력 덕에 둥둥 떠 있었다.

“계약서는 왜……. 혹시 제가 필요 없어지신 겁니까? 저와의 계약을 파기하시려고요?”

플로아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으나 다행히 파사베아는 그러려고 계약서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란다. 수정할 부분이 있어서 그래.”

“어떤 부분 말입니까?”

파사베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시원시원했다.

“메이도 플로티나의 일원이니 가문의 힘을 써야지.”

가문의 힘. 파사베아의 혈육이고, 호적에 올라와 있다면 성인이 되기 전 불시에 발현된다는 힘.

한때 간절히 바라온 것이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호적에 올라와 있어도 내 핏줄만 발현될 수 있도록 한 거, 핏줄이 아니어도 호적에만 올라와 있다면 발현될 수 있게 수정하거라.”

플로아는 바로 파사베아의 뜻대로 계약서를 수정했다.

“사인 부탁드립니다.”

파사베아가 사인하고서야 계약서의 붉은 기운이 감돌더니 뿅, 사라졌다.

플로아는 바로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몸이 뜨거워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나를 덮쳤다. 이내 내 몸에 깃들었고, 땀이 날 정도로 더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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