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7화
그는 제국 건국 때 큰 공을 세워 공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막대한 마력이 있어서 강하고, 노화도 늦고, 부와 명예까지 갖춘 그는 제국에 평화가 찾아오자 무료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룰 건 다 이뤘으니 인생이 허무해졌지. 그 허무함을 달래려고 국내 여행을 하다가 어느 작은 마을에서 레드 박사라는 늙은이를 만나게 되었어.”
레드 박사는 파사베아를 알아보곤 책 한 권을 건넸었다. 당신이라면 이 책에 있는 마법진을 생성해 낼 수 있을 거라며.
딱히 할 것도 없으니 파사베아는 심심풀이로 마법진을 그려 보았었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게이트를 만들어 준다는 마법진이었다.
“처음 마법진을 그렸을 땐 사과 하나만 한 게이트가 생겨났었지. 효력이 있는 마법진일 줄은 몰랐는데 진짜로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었던 거다.”
파사베아는 마력을 실어 다시 마법진을 그렸고, 그땐 어린아이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세 번째로 마법진을 그렸을 땐, 온 힘을 다해 마력을 실어서 그런지 그가 지나가고도 남을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나는 그 게이트를 넘어갔단다.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다른 차원이었지. 스타시아 제국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세계였어.”
파사베아는 마법진을 그리며 여러 차원을 오갔다. 여러 세계와 여러 사람을 경험했다.
“문제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거야. 게이트 너머의 세계는 항상 복불복이었거든.”
그러다 그는 우연히 마법진의 방향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되었고, 총 여덟 개의 차원에 오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적지를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게 된 그는 현재, 플로티나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돌아오신 거군요…….”
플로아는 이해하는 듯했으나 메이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는 건, 익명의 편지를 보낸 사람이 증조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익명의 편지라면…… 아이리스와 카시우스한테 보낸 걸 묻는 게냐? 그건 내가 보낸 거란다.”
“정말요? 어쩌다가 편지를 보내게 된 거예요?”
파사베아는 이에 대해 답변해 주려다가 문득 걸리는 사람이 생각났는지, 메이를 돌아보았다.
“편지를 보낸 사연에 대해 들려주려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는데 괜찮겠느냐?”
“아…….”
메이는 그게 자신이 빙의자라는 걸 밝혀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들었다.
메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밝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밝힌다면 아빠와 플로아는 분명 믿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러다 파사베아가 맞다고 하면 결국엔 믿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 후엔…….
‘다른 사람도 아닌 페르시스와 플로아니까 나를 평소처럼 대해 줄 거야.’
메이에겐 페르시스와 플로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플로아가 수상해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가족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과 행동이 반대돼서 그런 것 같았다.
가족에게 밝히는 게 맞을 것 같다. 메이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건 제가 직접 설명할게요.”
“그게 좋겠지. 보아하니 숨겨 왔던 것 같은데…… 편지에 대해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언급해야 하니 이해해 다오.”
“괜찮아요. 오히려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돼서 좋은걸요?”
메이는 미소를 보인 후 숨을 가다듬고 페르시스와 플로아에게 내 정체를 밝혔다.
“사실 저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어요.”
역시나 메이의 예상대로 페르시스와 플로아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고……?”
“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세계에 살던 제 영혼이 메이의 몸에 깃든 거예요.”
“그게 무슨…….”
“메이의 말이 전부 맞단다. 원래는 이 몸의 주인이 아니었어.”
파사베아도 맞다고 하니 페르시스와 플로아는 혼란스러웠다.
메이는 자신이 읽던 소설에 빙의했다는 것과 더불어 소설 내용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그래서 고아원에 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던 거예요. 고아원에 가면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어느 귀족 영애에게 맞아 죽거든요.”
다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페르시스와 플로아는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럴 수가……. 그럼 이 세계는 허구라는 겁니까……?”
애써 침착하여 묻는 플로아의 말에 파사베아가 고개를 저었다.
“메이가 원래 살던 세계도, 우리가 있는 이 세계도 실존한다. 허구는 없어.”
“하지만 소설 속 세계라며.”
“소설은 창조주의 미끼였다. 모든 삶이 영화라면, 소설은 대본이었지.”
여전히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파사베아가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소설 속 이야기였다는 말에 충격받은 듯했던 페르시스와 플로아도, 허구가 아니고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에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파사베아 님께선 메이 님을 어찌 알고 계신 겁니까?”
“여행하다가 만났었으니까.”
몇 번째 차원이었더라. 또 다른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돌아다니던 파사베아는 지금의 메이를 만났었다. 그때의 그녀는 자신의 허리 정도에 올 만했을까. 매우 어렸었다. 혼자 노는 그 아이가 눈에 밟혀 몇 번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메이는 오래되어 흐릿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말도 없이 떠나서 서운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을 여행하기로 한 날, 네가 항상 있던 그 자리에 없었지 뭐냐.”
그 후 파사베아는 게이트로 이동하며 복불복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다시 그 세계로 왔었다. 그리고 언젠가 마주쳤던 아이를 떠올리며 한때는 익숙했던 그곳을 찾았고,
거기서 그를 아는 사람과 마주쳤었다.
‘저기요, 혹시……. 플로티나라고 아시나요?’
메이였다. 고아원에 가서는 사기꾼에게 입양 당해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클라라 펜소에게 맞아 죽은 메이.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표정이 밝았다.
파사베아는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녀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후 환생해서 소아과 의사가 되었다는 얘기와 더불어 창조주의 비밀을 알려 주었었다.
창조주는 가엾게 죽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작가들이 소설로 쓸 수 있게끔 조종한다. 소설이 팔려서 독자가 생기면 그땐 죽은 영혼에게 누가 네 역할을 맡아야 가엾게 죽지 않을 것 같냐고 묻는다.
이것은 그녀가 직접 겪어서 아는 일이라 했으며, 그녀는 창조주가 사이코라고 주장했다.
훌륭하고도 완벽한 자신이 만든 세계들이고 사람들이니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모두가 평범하게 끝을 맺어야만 납득을 한다며.
그녀가 죽었을 때, 창조주는 ‘아무래도 너는 네 역할이 안 맞는 것 같다’며, ‘이 세상엔 가여운 역할은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엾게 죽은 사람이 있으면 납득하지 못한 창조주가 죽은 영혼과 함께 그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구한다고.
“그렇다는 건…… 제가 메이의 몸에 빙의된 건 죽은 메이의 영혼의 뜻이었다는 거예요?”
“그렇지.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주는 이가 네가 처음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파사베아는, 이전 메이의 영혼이 택한 이가 자신이 언젠가 이 세계에서 만났었던 그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도움을 주지 않는 이상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스타시아로 돌아와서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에게 너를 보호해 줄 것을 부탁했던 거란다.
그 말을 다 듣고 나니 메이는 조금 섭섭했다.
“왜 직접 도와주지는 않았어요? 아이리스 님과 카시우스 님께 부탁하지 않고 직접 나섰어도 되는 일이었잖아요.”
“여행을 더 하고 싶었거든. 실종되었다가 돌아가면 분명 세간의 관심을 받을 텐데 귀찮았고 말이야. 언젠가는 플로티나로 돌아올 생각이긴 했지만, 그때가 언제일지는 그 당시의 나도 예상할 수가 없었고.”
그의 말을 들으니 메이는 이해가 가는 듯도, 안 가는 듯도 했다.
“그럼 편지를 보내고 또 여행을 가셨던 거군요.”
“그렇지. 그러다 게이트를 만들 마력이 이제 부족하다는 걸 깨달아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많이 쇠약해졌거든. 아마 게이트를 한 번 더 생성해 내면 그 후로는 게이트를 만들지 못할 거다.”
여행이 그렇게 좋은 건지. 못 말리는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나 같아도 앞으로 살날이 몇십 년이고, 다른 세계를 방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유혹을 떨치지는 못할 것 같긴 했다.
메이는 파사베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진 않았다.
파사베아의 말을 끝으로 플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앞으로는 메이 님이 위험해질 일 없다는 거죠? 파사베아 님께서 실종될 일도 없고요.”
“그런 거지.”
페르시스는 파사베아가 말한 모든 것을 이해했음에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시선을 떨군 채 말이 없었다.
메이는 소설 속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언젠가 자신이 벌였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전 생의 자신이 고아원으로 보낸 메이가 죽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거니까.
메이가 왜 그토록 고아원에 가기 싫어했었는지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이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마음이 쓰렸다.
그러다, 파사베아의 이어진 질문에 그의 시선이 서둘러 메이를 향했다.
“그래서 말인데 메이,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갈 마음 있니?”
“돌아갈 마음이요……?”
“네 고향은 그곳이잖아. 너를 위해서라면 친히 마지막 남은 게이트를 생성해 줄 수 있단다.”
그 말에, 페르시스와 플로아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