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6화
페르시스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제가 만약 다른 사람인데, 이 몸에 들어와서 사용 중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니 이해한 듯 보였다. 아마도, 내가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겠지.
“글쎄. 네가 내가 아는 메이가 맞다면 그대로 두겠지.”
“아빠가 아는 메이가 실은 진짜 메이가 아니라고 해도요?”
“그럼 진짜 메이한테 그 몸을 써도 괜찮겠냐고 물어봐야겠지.”
“아……. 역시 그래야겠죠…….”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허락은커녕, 멋대로 빙의했고 본래의 메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로선 괜히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기엔 무리일 것 같았다.
***
그날 밤, 입맛은 없지만 그래도 배는 채운 나는 생각을 정리할 겸 산책하러 화원에 나왔다.
겨울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꽃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전보다 차가워진 바람이 내 볼을 마구 스쳤다.
왜 나는 큰 사건들을 모두 보냈음에도 불안에 떨고 있는 걸까.
이제는 나를 노예로 팔아 버릴 사람도, 때려죽일 사람도, 죽고 싶게 만들 사람도 사라졌는데, 어째서.
빙의자인 게 무슨 죄라고.
“확 다 고백해 버릴까.”
충동적인 발언은 진심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내가 빙의자라는 걸 나조차도 잊고 지낼 수 있게끔 생활하고 싶다.
그런 평범한 삶이 내가 원하던 삶이니까.
하지만 내 소원은 이뤄지기 힘든 건지, 산책하던 중 그를 만나게 되었다.
“플로아…….”
새하얀 머리가 오늘따라 더 빛나 보이는 그는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긴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있을지도 모를 이곳으로 온 내 잘못이다.
“플로아는 항상 화원에 있네요.”
“플로티나의 화원은 제가 만든 것이니까요.”
“가을이라 꽃은 많이 졌지만 그래도 아름다워요.”
“…….”
플로아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으나 딱히 묻지는 않았다. 두려워하는 주제가 나올까 봐.
“메이 님, 당신은 아주 신비한 존재입니다.”
“……왜요?”
“저도 페르시스 님도 이리 달라지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플로아랑 아빠로 인해 많이 달라졌는걸요?”
페르시스 몰래 공작저에서 빌붙어 살다가 독립할 계획을 세우던 내가 남장 생활도 해 보게 됐고, 검술도 익혔으며, 수호 기사도 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제게 파사베아 님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더 소중한 존재. 그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점차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었다.
“제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은 여태껏 파사베아 님이 유일했었습니다.”
플로아는 그에게 파사베아가 어떤 존재였는지 말해 주었다.
“저는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릴 적부터 노숙하며 살아야 했던 고아였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누더기를 입고 굶주리며 살아야 했고, 사람들에게서 혐오의 눈길을 받아야 했었죠.”
겨우겨우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나눠 주는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커 온 그는 그런 자신이 비참해 신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
갖은 노력 끝에 영생할 수 있게 된 그는 제일 먼저 정신계 마법을 배웠다고 했다.
“매사에 우울함이 심해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우울함을 떨쳐 보려고 했었습니다.”
하나, 자기 자신한테 정신계 마법을 거는 건 자칫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행위. 실제로 그는 정신계 마법을 걸었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전쟁터에서 비틀거리며 거리를 나돌았었다고 한다.
“그때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게 파사베아 님입니다.”
파사베아는 플로아가 자기 자신한테 정신계 마법을 건 것을 알고선 마법을 그런 쓸데없는 데에다 쓰냐며 잔소리하고선 한동안 그를 데리고 다녔었다고 한다.
“저는 파사베아 님으로부터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다들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분이 속은 따뜻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영적인 존재가 되어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제게 매끼를 거르지 않고 챙겨 주셨거든요.”
“굶기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긴 하죠.”
“처음으로 가족이라 생각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매달렸었죠. 가문의 수호신을 하게 해 달라고요.”
절대적으로 파사베아 님께 유리한 조건으로 쓴 계약서를 내밀면서요. 그렇게 하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거든요.
“그 후 플로티나의 수호신이 되었을 때부터 파사베아 님께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가족이 되어 함께 산다는 게 이리도 행복할 줄 몰랐었다고 얘기했다. 행복이 끝나게 될 줄도 몰랐다는 것도 함께.
“가족을 잃은 슬픔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슬퍼서 정신계 마법을 걸고 싶은 충동이 계속 일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지 않았던 건, 파사베아 님의 만류 때문이었지요.”
플로아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그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그런 제가…… 메이 님께서 연을 끊겠다며 나가신 후, 슬픔을 참을 수 없어 정신계 마법을 걸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발견해 준 덕에 마법을 풀어 목숨엔 지장이 가지 않았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플로아가 나 때문에 자기 자신한테 정신계 마법을 걸었다니. 왜인지 그에게 미안해졌다.
“플로아…….”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게 파사베아 님보다 메이 님이 더 소중하다는걸요.”
그런데도 파사베아를 찾는 데에 애를 쓰는 건, 순전히 그를 보고 싶어서라기보단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나와 파사베아, 둘 중 한 명을 고르라면 나를 선택할 거라고 하면서.
“저는 그만큼 메이 님을 믿습니다. 메이 님이 지금껏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메이 님의 편일 겁니다.”
“…….”
“그러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촉촉해진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가 메이 님에게는 책 속의 세상입니까?”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거세진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역시 그냥 전부 밝히는 게 좋을까.
온전히 나만을 담고 있는 그의 짙은 회색 눈을 피하기 힘들다. 그의 눈에는 나를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내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그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을 거라는.
그가 나를 믿는 만큼, 나도 그에게 믿음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드디어 목소리가 나올 찰나였다.
언젠가 들어 봤던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하영.”
그 이름에 놀라 뒤를 보니 우리가 기다리던 남자가 서 있었다.
장신에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흑발의 남자. 파사베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고, 역시 하영이 맞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파사베아 님……?”
플로아는 제 앞에 서 있는 존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온몸이 굳어졌다. 그러다가도 표정엔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고, 이내 반가움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파사베아 님…….”
파사베아는 다가가서 플로아를 안아 주곤 등을 토닥였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미안하다, 플로아.”
그의 온기를 느끼고 나서야 플로아는 파사베아가 돌아왔음을 실감하는 듯 보였다.
“어째서…… 어째서 말없이 사라지셨던 겁니까. 그동안 어디 계셨나요. 왜 저를 보러 오진 않으신 건가요.”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플로아는 그간 파사베아가 돌아오면 꼭 묻고 싶었던 것들을 쏟아부었다.
“제가 싫어서 떠나신 건가요?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셨다면 기꺼이 고쳤을 텐데 어찌 말 한마디 없이 가셨던 건가요. 홀로 남겨진 저를 걱정은 하셨나요?”
“네가 싫어서 떠난 건 아니란다. 미안하구나.”
플로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상봉을 보고 있으니 나도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눈물을 닦고 다시 그들을 보다가 파사베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언젠가 그랬었던 것처럼 나를 향해 미소했다.
***
파사베아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공작저는 시끌벅적해졌다. 시종들은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 댔다.
“세상에, 대박 사건. 초대 가주님께서 돌아오셨대!”
“맞아, 아까 저택 안으로 들어오시는 거 봤어. 마력 때문인지 연세가 많으신데도 중년으로밖에 안 보이시더라.”
“그러니까. 깜짝 놀랐어. 아가씨한테 증조할아버지신데 많아 봐야 50대로밖에 안 보이시니까.”
페르시스는 파사베아와 함께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곳엔 메이와 플로아도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할아버지.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파사베아가 커피로 목을 축이곤 대답했다.
“여행을 하고 왔지. 갑작스럽게 여행하게 된 거라 알리고 떠날 수가 없었단다. 그 부분에 대해선 미안하구나.”
그 옆에 앉은 플로아가 물었다.
“어딜 다녀오셨길래 이리도 긴 여행을 하신 겁니까?”
“……여러 세계를 돌아다녔었지.”
파사베아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했다.
“시작은 무료해진 일상 때문이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