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4화
메이와 디아고가 장난스러운 말들을 나누며 마차로 향하는 사이, 홀로 아카센터에 남은 제드는 메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내면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부족한 만큼 채워 넣어. 그게 연애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이야.’
만일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이라면 그 부족함을 채워 줄 여자를 찾으라고 했었다.
제드는 그 말들이 믿기지 않았다. 항상 자신이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해 왔었으니까.
만일 부족함이 존재하고, 자신도 모르는 부족함이 메이에게는 보인다면, 부족함을 채워 줄 여자는 그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든 결국 목적지는 메이였다.
그는 시선을 떨군 채로 혼잣말했다. 목소리는 공허했다.
“……끝까지 좋아하는 척을 할걸 그랬어.”
이왕 좋아하는 척을 할 거면, 어떤 상황이 와도 쭉 좋아하는 척을 할걸 그랬다.
그랬더라면 정말로 좋아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이렇게 속이 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
결국 나는 하루 쉬고 다시 아카센터로 가 조교에게서 대체 훈련 확인을 받았다.
한 번이면 성공했을 것을, 방해받는 바람에 3시간을 들여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제드를 만나면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뭐, 덕분에 몸 단련은 제대로 했지만.
대체 훈련도 끝났겠다, 정규 사냥 때까지 한가해진 나는 나제트가에 가서 스텔라와 함께 쿠키를 만들었다.
우리는 쿠키 아이싱 작업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제드에 관한 이야기였다.
“걔는 왜 갑자기 연애하재? 웃기는 인간이네.”
“그러게. 그만큼 플로티나의 여자와 결혼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확실한 건,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좋아하더라도 마음 주지 마. 너랑 안 어울려.”
“이미 마음 접은 지 오래야. 이성적인 호감이 생길 일은 없어.”
이성적인 호감이 생긴다면 그건 제드가 아닌…….
나는 디아고를 떠올리곤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그를 머릿속에서 지우곤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후작님도 밀로도 밝아져서 다행이야. 특히 밀로는 펜소가에서 만났을 땐 차갑고 무뚝뚝했었거든. 이렇게 부드러운 성격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밀로, 아빠 닮아서 그런지 엄청 착해. 항상 누님, 누님 하면서 배려해 주고 내 말도 잘 들어줘. 근데 밀로,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마지막 말을 들은 나는 놀라서 그만 데코 펜을 쭈욱 짜, 쿠키 그림을 망치고 말았다.
“결혼……?”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스텔라는 놀랍지도 않은지 덤덤하게 쿠키를 꾸몄다.
“각하께서 여자도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계시잖아. 밀로 말로는 아마 몇 년 내로 법이 바뀔 거라며, 나더러 나제트가 후계자가 되라더라. 그리고 자기는 플로티나로 가서 공작이 될 너와 결혼하겠다던데? 플로티나 후계자인 네가 작위를 물려받으면 후작 부인은 될 순 없으니까.”
자세한 계획을 들은 나는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렸다.
스텔라는 내가 밀로랑 결혼하기를 바라는 걸까……?
작위를 바라고 있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드러냈다.
“근데 나는 밀로와 결혼하는 걸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걱정 마. 밀로랑 결혼하라고 부추기는 거 아니니까. 오히려 난 바쁘게 살고 싶지 않아서 후작이 될 생각도 없어.”
“아…….”
그 말에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밀로가 멋지고 상냥해서 좋지만 이성적으로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아.”
“알아, 알아. 넌 나를 제일 좋아하잖아.”
“그건 좀…….”
나는 다시 쿠키를 데코하다가 문득 제일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맞다. 꼭 해 줄 얘기가 있었는데 까먹을 뻔했네.”
“뭔데?”
“……다른 차원으로 갈 수도 있대.”
나는 플로아와 미로카곤, 파사베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생에서 파사베아를 만났었고,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파사베아로 추정되는 익명의 편지를 받았었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 마법진이 실린 책을 찾고 있다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스텔라는 듣는 내내 놀란 표정이었다.
“그래서 요새 플로아는 아이리스 님과 카시우스 님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책을 찾고 있어.”
“찾기 어렵겠다. 폐관된 곳도 있을 테고, 누가 빌려 갔을 수도 있고.”
“응……. 그래서인지 그 후로 며칠째 플로아도 못 보고 있어.”
스텔라는 쿠키 데코를 멈추곤 내게 물어보았다.
“만약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응?”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갈 마음 있어?”
이전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 있냐는 말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번에 대답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설마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이의 나이, 아홉 살에 빙의하여 지금은 열여섯 살이니 이 세계에서 산 지 벌써 7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일들이 벌어졌었기에 전에 살던 곳이 어땠는지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그곳도 그곳 나름대로 힘들었다는 것뿐.
내가 대답해 주려고 하는 찰나, 밀로가 우리가 있는 주방으로 들어왔다.
밀로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공녀님 오셨군요.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밀로를 보니 아까 스텔라가 한 결혼 얘기가 떠올랐지만 쑥스러워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다.
“고마워.”
나는 포장된 쿠키 중, 눈사람 쿠키를 그에게 선물했다.
“이건 밀로 네 거야. 밀로의 은발을 떠올리니까 눈사람이 생각났었거든.”
눈사람 모양 기본 버터 쿠키 위에 흰색과 체리색 데코 펜을 사용해 꾸민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기쁘게 쿠키를 받아 든 그는 내 손을 가져가 손등에 살포시 키스했다. 손등 키스를 받으니 정말로 귀족 영애가 된 기분이었다.
첫 손등 키스에 내가 쑥스러워하는 사이, 밀로는 포장한 쿠키들을 훑어보더니 하나를 가리켰다.
“저 큰 하트는 누구 겁니까?”
혹여 다른 남자에게 선물할 쿠키일까 봐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아, 저건 우리 아빠 거야.”
아빠 거라고 아니 밀로는 외간 남자가 아닌 것에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스텔라는 그 큰 하트 쿠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메이는 결혼하기 힘들겠어.”
“어째서?”
“각하께서 네 결혼을 허락 안 해 줄 것 같아서. 앞으로 쭉 딸바보로 살 것 같거든.”
그 말에 밀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 허락해 줄걸? 저번에 결혼하라고 했었어. 최대한 늦게.”
“그래…… 그건 나도 찬성이야. 최대한 늦게 결혼해. 나랑 자주 놀 수 있도록.”
장난스럽게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스텔라에게 나는 쿠키를 건넸다.
“자, 이건 네 거야.”
스텔라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껌뻑이다가 이내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나랑 같이 만든 건데 나한텐 왜 주냐? 바보.”
말은 그렇게 해도 기뻐하는 듯 보였다.
“너는 눈송이 쿠키야. 눈사람이랑 눈송이는 가족이니까.”
“오, 감동인데? 나도 줄래.”
스텔라가 내게 준 쿠키는 다름 아닌 내 얼굴 모양 쿠키였다.
“뭐야? 이건 언제 만든 거야?”
“아까 만들었지. 후훗, 잘 만들지 않았니?”
그저 동그란 쿠키에 짧은 백금발과 눈코입을 그렸을 뿐이지만 먹기 아까울 정도로 귀여웠다.
“고마워. 간직했다가 먹을게.”
“꼭 네가 먹어야 해, 알겠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포장한 쿠키들을 보았다.
집 가서 나눠 줘야지.
기뻐할 그들을 생각하니 어린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
플로아는 며칠간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와 함께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차원이동 마법진에 대한 내용이 있는 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마법진을 그려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게 된다고 해서 파사베아를 찾는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플로아는 그를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싶었다.
처음 듣는 마법진이니 예상은 했지만 책은 쉽게 찾지 못했다. 수십 곳을 들러도 비슷한 내용의 책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긴 없는 것 같아.”
“다른 곳에 가 보자.”
난항이 이어지던 중, 그들은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들렀다.
그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흩어져서 책을 찾아보았다. 열심히 찾고 있으니 도서관 사서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찾으시는 책이 있나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아이리스는 사서에게 차원이동 마법진에 대한 내용이 있는 책이 있냐고 물었다.
“차원이동 마법진이라……. 잠시만요.”
사서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도서 목록서를 가져와 살펴보았다.
“혹시 레드 박사라고 아시나요?”
“……레드 박사?”
플로아도,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도 모른다는 눈치였다.
“그다지 유명하진 않으셨지만 생전에 마법으로 이런저런 연구를 하신 박사님이세요. 이 도서관을 창립하신 분이시기도 하고요.”
사서는 레드 박사의 책 목록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목록에 쓰인 책들이 전부 레드 박사님의 책이에요. 전부 세상에 딱 한 권만 존재하는, 저희 도서관에만 있는 책이죠. 혹시 이 책 중에 찾으시는 책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이리스는 목록을 보다가 찾고 있는 책으로 추정되는 제목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