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12화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훈련이 끝나고, 모두들 숙소에서 짐을 챙겨 퇴소할 준비를 했다.
나는 짐을 싸며 편지에 대해 추리해 보았다.
만일 미로카곤의 말대로 다른 차원에 간 파사베아가 예언자라도 만나서 내 상황을 알게 된 게 맞다면…… 페르시스가 아닌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에게 찾아간 게 말이 된다. 헤스티아를 제압할 수 있는 건 그들뿐이니까.
자신이 나타날 때까지 편지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한 것도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이해가 가고.
다 이해가 가는데…… 왜 플로티나엔 오지 않은 걸까.
그의 말마따나 여행자라면 여행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아직도 여행 중인 건가.
“뭐, 어찌 됐든 살아 계셔서 다행이네. 돌아오게 되면 플로아가 크게 기뻐하겠어.”
짐을 다 싸고 숙소에서 나오니 수호 기사들이 내게 달려와서 물었다.
“공녀님, 훈련 때 빠지셔서 대체 훈련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 하시나요?”
“아카센터에서 무인 훈련 프로그램이 있대. 그거 성공하는 게 대체 훈련이라고 하더라.”
“아, 저 그거 알아요! 제한 시간 안에 지정된 공간에 마력을 가하고, 공격이 날아오면 피해서 30분 버티면 성공이래요.”
“어려운 편이라고는 하는데 공녀님은 강하시니까 바로 성공하실 거예요.”
“고마워. 웬만하면 한 번에 성공하려고 해야지. 반복하면 힘드니까.”
그러다 나는 시선을 느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곁에 있던 기사들 뒤에 제드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우리 대화를 엿듣는 건가?
제드가 바로 방향을 틀어 가 버리자 나는 그를 수상하게 여기곤 내 갈 길을 걸었다.
***
대체 훈련을 위해 아카센터에 들린 메이는 무인 훈련 프로그램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무인 훈련 프로그램은, 마력 사용을 단련하고 싶어 하는 수호 기사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매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으며 아카센터 장내에서만 훈련할 수 있었다.
중앙 기둥 탑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누르면 시작, 정지, 재시작 등을 할 수 있었다.
“공격이 들어오는 위치랑 시간이 같네. 몇 번 연습하다 보면 몸에 익어서 쉽게 성공하겠어.”
혼자 연습하다가 통과 확인을 받을 날짜를 정해 조교에게 서신을 보내면 조교가 와서 확인하기로 했었다.
하루 만에 프로그램을 완벽히 익힌 메이는 그날 바로 당장 확인받겠다고 서신을 보냈다.
그렇게 다음 날, 대체 훈련 통과 확인을 받기 위해 아카센터로 온 메이는 조교가 아닌 뜻밖의 누군가를 마주하게 되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확인, 조교 대신 내가 받아 오기로 했거든.”
메이의 대체 훈련이 무엇인지 알게 된 제드는 그녀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고자 조교에게 자신이 대신하여 아카센터에 가겠다고 허락을 구했었다.
“너, 내가 요 며칠간 눈치 주지 않았어? 나한테 다가오지 말라고. 너랑 함께 있는 거 불편하다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쉬는 시간 때마다 말을 걸려고 하지 않나, 훈련 때 짝을 하자고 하지 않나, 식사할 때 꼭 근처로 오지 않나.
메이는 불편했음에도 참았다. 합숙 훈련이 끝나기까지 하루, 이틀 남은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하는 합숙 훈련이 끝나서도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니. 그것도 단둘이.
메이는 지긋지긋했다.
“나, 너한테 확인 안 받아. 집에 돌아갈 거니까 넌 여기 있든가 알아서 해.”
메이가 정색하며 출입구로 나가려고 하는 그때였다.
쾅-!!
그녀의 뒤에서 쏘아진 은색 기운이 거칠게 출입문을 닫아 버렸다. 심지어는 문 앞에 은색의 벽을 세우기도 했다.
모두 제드의 짓이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메이가 뒤돌아 화를 내자 제드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협박한다.
“메이, 여기에 우리 둘밖에 없어. 알아?”
그리고 난 널 이곳에 가둬 둘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제드의 고운 얼굴에 불결한 미소가 맺혔다.
메이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다.
“그래서, 날 여기에 가둬 놓기라도 하겠다고?”
“대체 훈련 통과하면 열어 줄게. 난 그걸 확인하러 온 거잖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당한 모습에 메이는 기가 찼다.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그의 뻔뻔함에 대해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이곳에 가둔 거나 다름없다. 나는 그와 함께 있기 싫어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으나 고민이 되었다.
대체 훈련만 통과하면 열어 준다니 말이다.
‘어쩌지……. 그냥 눈 딱 감고 훈련할까? 제드한테 확인받고 싶지는 않지만 이 순간만 참으면 바로 집에 갈 수 있고, 귀찮게 나중에 다시 확인받으러 아카센터에 오지 않아도 되니까.’
어차피 지금 이대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30분만 참아 보기로 했다.
“확인받은 후엔 꼭 보내 줘.”
“물론이지.”
메이는 중앙 기둥 탑으로 걸어가 시작 버튼을 눌러 무인 훈련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연습해서 몸에 완전히 익혔기에 단번에 성공할 자신 있었다.
삑, 시작 음이 울리자 메이는 초록빛으로 빛나는 공간에 마력을 쏘고, 다가오는 공격은 여유롭게 피했다.
사방에서 생성되는 빛들이 메이를 공격해 왔지만 피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25분이 경과하고, 5분만 버티면 성공이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의문의 공격이 날아왔다.
슈웅―
“어?!”
메이는 몸에 익지 않은 공격을 맞을 뻔해 두 눈이 놀라 커졌다.
‘뭐지? 후반부엔 서쪽 관중석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없는데?’
계속해서 떨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서쪽 관중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제드가 앉아서 마력을 생성해 내고 있었다.
‘저, 나쁜 자식……!’
덕분에 그의 공격을 피하기 바빠 지정된 구간에 공격을 가하지 못해 실패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3분만 더 버텼으면 성공이었는데 말이다.
“제드…….”
메이는 화가 나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곧장 그가 있는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그는 언제 공격했냐는 듯 마력을 숨기곤 코앞까지 온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쉽네. 얼마 안 남았었는데.”
메이는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애써 참았다.
“너, 나 괴롭히려고 온 거야?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네가 통과하지 못하면 너랑 단둘이 오래 있을 수 있잖아.”
그런 말을 무구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메이는 그가 진심으로 미쳤나 싶었다.
“집 가게 해 줘. 난 너랑 여기서 이런 무의미한 시간 보내고 싶지 않아.”
화내지 않고 진지하게 얘기했음에도 제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메이, 나랑 연애하자.”
어처구니없어서 놀랍지도 않은 소리였다.
“나랑 연애하겠다고 하면 방해 안 할게. 절대로.”
“……너, 진짜로 제정신 아니구나.”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그는 술주정을 부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메이는 그런 그에게 경멸감을 느낄 정도였다.
“네가 다른 남자와 연애하는 꼴 못 봐. 그게 디아고라면 더더욱.”
“그래서 나랑 연애를 하겠다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호감은 있어. 호감 있는 여자는 네가 유일하고.”
“난 너한테 호감 없어. 너랑 사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딱 잘라 말하자 제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럼 계속 여기에 있든가.”
메이는 혈압이 올라 뒷골이 당겼지만 화는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상황을 악화시키면 미쳐 버린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메이는 침착하고선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제드, 한때는 널 좋아했던 내가 왜 너와 연애하기 싫다는지 알아?”
“마음을 갖고 노는 것처럼 느꼈다며. 마음을 갖고 노는 사람은 싫어하고.”
제드는 은근히 자신이 마음을 갖고 논 게 아닌 것처럼 얘기했다. 메이는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천만에. 난 네가 날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좋아했었어.”
“…….”
“그런데도 너랑 연애하기 싫은 이유가 뭔 줄 알아?”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든.
그 말에 제드의 눈빛에 살기가 일렁였다.
“……디아고?”
묻는 말엔 날이 서 있었으나.
“아니?”
메이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난 날 좋아해.”
자칫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나, 헤스티아로 인해 복부가 찢어져서 죽을 뻔했었어. 아이리스 님의 치유 마법으로 간신히 살아난 거야.”
그대로 죽었으면 아빠랑도, 플로아랑도 화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것은 당연하게도 할 수 없게 되었을 터.
“그 사건 덕분에 내 몸의 소중함을 알았어. 그래서 난 나를 제일 좋아해. 나한테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잘해 줄 생각도 사라졌지. 그런데 어떻게 연애를 하겠어.”
나한테 모질게 구는 너와.
“너, 나 싫어했었잖아. 너보다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는 이유로, 수호신들한테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너보다 더 잘난 것 같다는 이유로.”
“……!”
“겨우 남장 여자 주제에.”
반응이 없던 제드의 눈빛이 그제야 흔들리기 시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