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9화
밖으로 나간 나는 미로카곤을 찾아보았다.
“미로카곤! 미로카곤 어딨어!”
요 근래 공작저를 어슬렁거렸으니 부르면 나올 터였다.
“할 얘기 있어! 나와 봐!”
돌아다니며 다섯 번쯤 부르니 미로카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 왜 부르느냐, 인간.”
“할 얘기 있으니까 따라와, 미로카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이 없는 마구간 뒤쪽으로 데려갔다.
“굳이 여기서 얘기하자는 걸 보니 남들이 들어선 안 될 얘긴가 보군.”
나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 너, 플로아한테 내 얘기 했지.”
“네 얘기 한 적 없다.”
“거짓말하지 마. 플로아한테 다 들었어. 차원 이동해서 온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며? 그거 내 얘기잖아.”
“……그렇긴 하다만 네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네 얘기인 줄 모른다.”
나는 미로카곤을 답답해하며 대꾸했다.
“플로아가 궁금해서 가만히 있겠어? 조금 전에 플로아가 뭐라 했는 줄 알아? 널 죽이겠다고 협박해서라도 그게 누군지 알아내겠대.”
“……그럼 네가 아닌 스텔라 나제트라고 얘기하겠다. 어차피 너랑 같은 빙의자잖아.”
내 기억을 봐서 스텔라도 나와 같은 세계에서 온 사람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스텔라의 친구인 내 앞에서 할 소리니?”
“……미안. 죽을까 봐 겁나서 얼떨결에 말해 버렸다. 그렇지만 너도 네 친구도 빙의자라는 사실을 절대로 얘기하지 않을 거다. 어차피 파사베아는 돌아올 거니까.”
“돌아온다고?”
“파사베아가 너한테 여행자라고 했잖아. 여행하다가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건 그냥 한 말이잖아…….”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 마물 출현 지역으로 피신을 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인간. 제 아무리 가문의 수호신이라도 마물 출현 지역에선 나를 쉽게 찾을 수는 없을 테니까.”
“어쩐지 믿음직스럽지 않네…….”
“그래도 믿어. 나,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다. 내가 헤스티아만 20년 가까이 떠받들었어.”
“의리는 있다, 이거지? 알겠어……. 플로아가 찾아오기 전에 가 봐.”
미로카곤의 악마의 날개가 점점 커졌다. 악마의 날개는 사용하지 않을 땐 몸통의 2분의1 크기밖에 되지 않지만, 날개를 사용할 땐 몸통만큼 커진다.
“파사베아는 곧 나타날 테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인간. 제국의 수호신들을 만나면 내가 이리도 자신하는 이유를 알게 될 거다. 그들을 통해 본 게 있거든.”
“그게 뭔데?”
미로카곤이 날갯짓을 하니 공중에 떠올랐다.
“가문의 수호신이 올 수도 있으니 이만 간다.”
“어? 알려 주고 가야지!”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곤 그냥 가는 게 어딨어?
“또 보자.”
미로카곤은 내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미로카곤도 참…… 자기 멋대로구만?”
마물이니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로카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플로아가 뿅! 하고 나타났다. 간발의 차이였다.
“미로카곤 만나셨습니까?”
“그게…… 도망쳤어요.”
나는 멋쩍게 뒷목을 쓸며 웃었다.
***
한 주가 다시 시작하자마자 나는 훈련소로 복귀했다. 한 달간의 짧은 훈련이었으니 복귀했을 땐 훈련이 종료되기까지 사흘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호 기사들은 운동장에서 오늘의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내가 훈련소에 들어오는 걸 보고선 바로 우르르 내게 몰려들었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소식 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수호신이 사람을 죽이려 할 수 있는지……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동료들에게 밝게 미소 지어 보였다.
“나는 괜찮아. 아이리스 님의 치유 마법 덕분에 다친 곳도 싹 나았어.”
“다행입니다. 그런데 빠진 훈련 일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따로 대체 훈련을 할 것 같아. 남은 훈련 마친 뒤에.”
나는 걱정해 주며 몰려든 기사들 뒤에 홀로 서 있는 제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내가 정식으로 플로티나의 공녀가 되었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건가?
맞든 아니든 신경 쓸 일 아니니 나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난 짐 풀러 갈게. 조금 이따가 보자.”
“네, 공녀님.”
늘 그랬듯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준비운동을 했다. 간만에 운동장 스무 바퀴를 돌아 힘들었음에도 쾌감을 느꼈다.
역시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
준비운동을 마친 수호 기사들은 조교 앞에 행렬에 맞춰 섰다.
조교가 크게 알렸다.
“이번 훈련은 1대1 검술 대결입니다. 3분 줄 테니 대결 상대를 정해 본 조교 앞에 두 줄로 섭니다. 실시!”
수호 기사들은 각자 돌아다니며 짝을 지어 조교 앞에 나란히 섰다.
내가 아카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고, S급 마물인 글리우곤 잡았다는 걸 아는지 다들 나와 짝이 되려고 하지 않았으나.
딱 두 사람만이 내게 왔다.
“메이.”
“메이.”
동시에 부른 두 남자는 디아고와 제드였다. 서로를 보곤 디아고는 성가시다는 듯 머리칼을 쓸었고, 제드는 표정을 굳혔다.
제드가 먼저 말을 이었다.
“메이, 나랑 하자. 나랑 하면 네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거야.”
디아고도 질세라 메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랑 해. 나랑 해야 적어도 마음이 편할 거야.”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디아고의 손을 잡았다. 제드와 짝이 될 마음은 먼지만큼도 없어서였다.
디아고는 내가 그를 선택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지만 손을 잡을 줄은 몰랐는지 움찔했다.
“줄 서요.”
나는 제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디아고와 함께 줄을 섰다. 우두커니 서 있는 제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총원이 홀수였던지라 제드는 홀로 남게 되었다.
수호 기사인 만큼, 평범한 검술 대결이 아닌 마법을 사용한 검술 대결이었다.
우리는 검에 마력을 깃들어 넣어 더욱 강한 검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 번에 많은 이들이 대결을 하면 충돌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 한 번에 세 팀씩 대결하도록 합니다. 대결하지 않는 팀은 스탠드에 앉아서 동료의 대결을 보며 분석합니다. 자, 앞에서부터 세 팀, 땅에 그려 놓은 대결공간으로 이동합니다.”
거의 마지막으로 줄을 선 나와 디아고는 스탠드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디아고는 자연스레 내 옆에 앉았다.
“내가 계획을 잘못 세운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으나 들으라고 한 소리일 테니 예의상 물어보았다.
“뭐를요?”
“너랑 대결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대결해서 멋있게 이겨 네가 반할 수 있도록 해야 했었어.”
나는 살포시 비웃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저랑 대결했다가 질까 봐 그러죠?”
“무슨 소리야? 여기서 나 이길 사람 없어.”
“어련하시겠어요.”
내가 믿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야.”
“대결해 보면 알겠죠.”
앞에서 여러 팀이 대결을 끝내고, 드디어 마지막 세 팀이 대결할 차례였다.
“마지막 세 팀, 대결 장소로 이동합니다.”
나와 디아고는 운동장 중앙에 그려진 대결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수호 기사들의 관심은 우리의 대결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과연 누가 이기실까?”
“아무래도 황자님이 이기시지 않을까? 황자님이 누구한테 지는 거 본 적 없잖아.”
“그렇긴 한데, 이번엔 왠지 공녀님이 이기실 것 같아.”
나와 디아고는 표시된 선에 맞춰 마주 보고 섰다. 어째서인지 디아고의 표정에서 불안함이 묻어났다. 막상 나와 싸우려니 서로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하는 듯 보였다.
삑― 조교가 호루라기를 불어 본격적으로 대결이 시작되었다. 아이리스에게 부여받은 은색의 마력이 나와 디아고가 쥔 검에 감돌자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
맞부딪친 검날과 검날에서 나온 굉음은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나는 그의 검을 받아친 후 다시금 내쳤다. 내칠 때마다 디아고는 뒤로 물러났다.
대결하는 원 밖으로 나가면 그대로 아웃. 그 룰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리만큼 디아고는 계속 밀려나더니 원 밖으로 빠지게 되었다.
“삐빅- 메이 플로티나 훈련생 승!”
이겼다는 판정에도 나는 기쁘지 않았다. 너무 쉽게 이겨 이상함을 느꼈다.
왜 일부러 밖으로 나간 것 같지……?
디아고가 스탠드로 돌아가자 나도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며 따라가려고 했으나 조교가 붙잡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플로티나 훈련생은 블로체 훈련생과도 대결하도록 합니다.”
“제가요……?”
조교가 제드를 부르자 제드가 원 안으로 들어왔다.
“블로체 훈련생과 대결할 만한 상대가 프로티나 훈련생뿐이니 임하도록 합니다.”
나더러 또 대결하라고? 그것도 제드랑?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와 대결함으로써 내 실력을 확인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대결에 응했다.
“잘 부탁해, 메이.”
“……응.”
우리는 각자 위치로 가서 대결 준비를 마쳤다.
제드와 마주 선 나는 긴장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제드…… 남자주인공이라서 내가 이기지는 못할 텐데, 3분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면 10초 안에도 끝날 수 있었다.
나는 손에 쥔 검을 꽉 붙잡았다. 최대한 버텨 보자는 생각으로.
곧 시작을 알리는 조교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삐―!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나와 제드는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