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8화
“그런데 왜-”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덮었다.
“난 그저, 그저…… 소식을 접하고는 네가 너무 걱정돼서 잠이 안 왔고, 그래서 동이 트자마자 바로 달려왔고, 괜찮아 보이는 널 보자마자 안도했어. 그뿐이었어.”
“…….”
“어려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려워만 하고 있다가는 다른 이한테 뺏길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래. 나한테만 매력적이면 좋았을 것을, 다른 이들한테도 매력적이어서 혹여 내가 없는 사이에 다른 괜찮은 이한테 고백이라도 받을까,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하라고.”
그가 진심을 토해 낼 때마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 답답한 듯도, 안쓰러운 듯도 했다.
“그리고 넌…… 내가 꼭 큰일을 벌여야만 나를 봐 주잖아. 그런데 나더러 어떡하라고.”
“……평범하게 다가왔어도 바라봐 줬을 거예요. 이건 확실해요.”
나는 벽에서 손을 떼곤 바깥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를 보기 힘들어서였다.
“제가 어떻게 해야 황자님을 좋아할지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 마음을 얻으려면 그게 첫 번째예요.”
“…….”
“다가오기 전에 고민해 주세요. 부탁할게요.”
벙찐 표정의 그를 두고, 나는 응접실을 나섰다.
***
디아고는 메이와 대화 후, 황궁으로 돌아가면서부터 어떻게 해야 메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신 있는 걸 꼽아 보자니 잘난 외모, 잘난 신분 정도였으나 그건 메이에게도 있는 것이었다.
몸은 자신 있는데……. 몸과 관련된 일도 자신 있다.
하지만 이를 과시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메이는 과연 무얼 좋아할까.
황궁으로 돌아온 그가 이사벨라에게 물어보니 그녀가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줬다.
“마음을 얻으려면 좋아하는 걸 해 줘야지. 좋아하는 걸 해 줄 수 없다면 싫어하는 걸 전부 하지 말아야 하고.”
괴롭히는 건 그녀가 싫어하니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도 그녀가 싫어하는 게 또 뭐가 있을까.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나인 모임 날이 되었다.
나인엔 메이와 클로빈을 제외한 모두가 모였다.
디아고가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비르타가 떠들어 댔다.
“제가 어제 펜소 공자님 면회를 가 봤는데요, 옥살이가 힘든지 얼굴이 10년은 늙었더라고요. 처음에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탈옥한 영애님은 아직도 안 잡힌 듯하고요.”
“펜소가가 관리하던 모든 사업체도 전부 매각됐다던데. 완전히 망해 버렸군.”
디아고는 비르타와 갈리를 응시하다가 메이가 예의 없게 구는 저들을 싫어했다는 걸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나인에 오는 걸 싫어했었어. 제드의 미인계로 간신히 초대했던 거였지.
그렇다면 나인을 싫어하는 건가?
디아고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선언했다.
“오늘부로 나인은 해체다.”
비르타와 갈리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저, 정말입니까?”
“어째서입니까……!”
“수호 기사가 되었으니 나인이 쓸모없어졌거든. 나인은 수호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잖아?”
“아직 저희는 수호 기사가 안 된…….”
“그러게 수호신에게 잘 보여서 수호 기사 되지 그랬어. 그게 안 되면 아카대회에서 3등 안에 들기라도 하든가.”
그의 말이 맞아 비르타와 갈리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디아고가 말 없는 제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입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무도회에서 찼던 거 후회해? 메이가 정식으로 플로티나의 하나뿐인 공녀가 됐다던데.”
“……아뇨.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다시 마음을 드러내면 그 아인 분명 다시 저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단언하는 말에 제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많이 고민해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디아고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메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사람 마음이라서, 마음을 갖고 노는 사람을 제일 싫어할 거거든.”
제드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디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나인은 해체됐으니까 그런 줄 알아.”
디아고가 밖으로 나가자 비르타와 갈리가 허겁지겁 따라가서 말렸다.
“황자님, 해체라뇨……!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네?”
“나인은 제 집이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이 나인 소속인 걸 내세워 황실이 자기네들 편이라며 온갖 갑질을 할 수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해체를 말리려 했다.
“황자님, 제발 부탁입니다……!!”
간절히 부탁했으나 디아고는 단호했다.
“내린 결정은 바꾸지 않아. 나인은 해체야.”
“황자님……!!”
쾅, 그들이 나가 문이 닫혀도 제드는 홀로 가만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
플로아는 아무도 없는 도서실에 들어가 책을 찾고 있었다. 미로카곤과 대화를 나눈 이후 계속 책만 찾아보았다.
미로카곤에게서 비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날, 플로아는 미로카곤을 죽이려고 했었다.
플로아는 플로티나의 수호신이고, 미로카곤은 허락도 없이 플로티나에 들어온 마물이었으니까.
“네 역할은 끝났으니 이제 죽어도 할 말 없겠지?”
플로아가 붉은 기운을 내뿜자 미로카곤은 기겁하며 주춤했었다.
“기, 기다려. 파사베아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있다고……!”
그리워하던 그 이름에 플로아는 마력을 수그러뜨렸었다.
“파사베아 님에 대해서도……?”
“파사베아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실종된 건 아주 유명한 일이라 알고 있지. 아무래도 파사베아는…… 이 세계에 없는 것 같아.”
그 말에 플로아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곧장 붉은 기운으로 미로카곤의 목을 졸랐다.
“지금 감히 파사베아 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거야?”
“캑캑,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다!! 다른, 다른 차원! 다른 차원으로 간 것 같다고!!”
“……다른 차원?”
오해했던 플로아는 미로카곤의 목을 놓아 주었다. 미로카곤은 죽을 뻔했다는 듯이 캑캑거렸다.
“제대로 설명해 봐.”
“……내가 진실을 보는 눈으로 어떤 인간이 다른 차원에서 온 걸 확인했었다. 책을 읽고 그 책의 세계로 오게 되었는데, 파사베아도 그 인간과 비슷하게 차원 이동을 하지 않았을까 싶더군. 정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잖아.”
“……그게 누구지?”
“그건 비밀이다. 그 인간은 자기가 다른 차원에서 온 걸 절대로 말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거든.”
“설마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니다. 난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마물의 말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진 않았으나 파사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사실이니 허황된 이야기라도 지금으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차원이라……. 관련된 책을 찾아봐야겠어.”
“그, 그럼 나는 살려 주는 거지?”
“일단은. 물론 사고를 친다거나 페르시스 님이 죽이라 명하시면 바로 죽이겠지만.”
“……사고 안 칠 거다.”
그렇게 플로아는 도서실에서 차원 이동에 관련한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관련된 책을 모두 꺼내 차원 이동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의 가설들만 있을 뿐, 실제로 차원 이동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로카곤이 말한 그 사람……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그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메이가 도서실 안으로 들어온 건, 플로아가 혼잣말을 한 후였다.
메이는 들어오자마자 플로아를 발견하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플로아, 책 읽어요? 어떤 내용을 찾길래 책을 이렇게 잔뜩 꺼내 놨어요?”
책장에 기대앉은 플로아 옆에 쌓인 책들은 30권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플로아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파사베아 님을 찾으려고요.”
아……. 파사베아.
메이는 헤스티아로 인해 복부가 찢어진 날, 잊고 살았던 어릴 적 하영의 일들을 기억해 냈었다.
친구가 없어서 홀로 놀이터에서 놀던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어 줬던 파사베아.
분명 그를 만났지만 플로아에겐 그 얘길 차마 할 수 없었다.
“……저에게는 증조할아버지죠? 증조할아버지가 책에 글이라도 남겼을까 봐 찾아보는 거예요?”
“그게 실은, 미로카곤 때문입니다.”
플로아는 미로카곤이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파사베아 님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고 해서요. 그래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에 관한 내용을 찾고 있습니다만……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없군요.”
“다른 차원……이요?”
다른 차원이라 하니 자신이 빙의하기 전에 있었던 세계와 같은 건가 싶었다.
“네. 미로카곤의 말에 따르면 다른 차원에서 이곳으로 넘어온 사람이 있나 봐요. 누군지는 안 알려 주던데…….”
메이는 뜨끔했다. 분명히 자신의 이야기일 터였다.
플로아가 손에 든 책을 덮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죽이겠다고 협박해서라도 그게 누군지 알아내야겠습니다.”
알아내겠다고?!
위기 상황임을 감지한 메이는 그가 순간이동 하기 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플로아가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메이 님?”
“프, 플로아. 제가 먼저 미로카곤과 만나도 될까요?”
“어째서요?”
“그, 그게…… 사실 제가 크게 다쳤을 때 미로카곤이 꿈에 나와서 저더러 죽지 말라고 해 줬었거든요. 미로카곤이 플로아 손에 죽기 전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플로아는 나긋하게 미소했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책을 더 찾아보고 있을게요. 먼저 만나고 오세요.”
“네!!”
메이는 곧장 도서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플로아는 그런 메이를 귀엽게 보며 다시 책을 읽다가 책장에서 다른 책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어떤 책이 눈에 들어와 꺼내 보았다.
“이건…….”
제국어 사전. 6년 전, 메이가 고아원에 보내졌을 때 그녀를 그리워하며 꺼내 봤었다.
‘여기에 메이의 글씨가 있어서 꺼내 봤었지.’
플로아는 제국어 사전의 첫 장을 펼쳐보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약간 흐려진 글씨. 그러나 여전히 귀여운 글씨였다.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제발 돌아가게 해 주세요.]
그 글을 보니 미안함이 들었다. 고아원에 가기 직전에 쓴 글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론 메이 님이 이런 글을 쓰지 않게 잘 해 드려야지.’
그리 다짐하며 책장에 도로 넣었다가 의도치 않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제국어 사전만 유독 닳았네.”
6년 전에 봤을 때도 헌것이었었다. 그보다 더 전엔 헌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메이 님께서 자주 보셨던 걸까?
“자주 볼 필요가 있나?”
책을 다시 꺼내 살펴보니 별표, 동그라미, 밑줄이 가득했다.
마치 모국어가 따로 있는 사람이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