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7화
안정을 취하라는 밀로의 신신당부를 끝으로 그들은 나제트가로 돌아갔다.
나는 외출한 아빠를 기다리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디저트 타임을 가졌다.
페르시스가 하녀에게 무어라 명령하니 테이블 위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디저트로 꽉꽉 채워졌다.
이걸 어떻게 다 먹냐는 표정으로 옆에 앉은 페르시스를 바라보았다.
“아빠, 너무 많이 가져오라 한 거 아닐까요?”
“한 번쯤은 이렇게 해 보고 싶었다. 너, 단 거 좋아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나는 다시 테이블 위에 차려진 디저트들을 눈에 담았다.
쿠키, 마카롱, 타르트, 크로플, 파운드, 티라미수…… 보기만 해도 달콤한 것들만 가득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잘 먹겠습니다!”
우선 아이스크림이 든 컵을 금색 숟가락과 함께 들었다.
아이스크림은 녹으면 안 되니 먼저 먹을 생각이었다.
페르시스는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맛있게 먹어 주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는 길게 자란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머리를 다듬을 때가 된 것 같군.”
“엘렌도 그렇게 말했는데요, 머리를 기를까 고민 중이라서 일단은 보류해 뒀어요. 짧은 머리는 편해서 좋고, 긴 머리는 예뻐서 좋으니 뭘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어떤 머릴 하든 예쁠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아빠는 항상 같은 머리네요?”
까만 머리칼이 반쯤 앞으로 흘러나오고 반쯤은 뒤로 쓸어 넘겨져 있었다.
“이게 편해서.”
“아빠도 어떤 머릴 하든 멋질 것 같아요.”
나는 그의 뒤에 서 있던 요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유디프 경도요!”
요한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페르시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는 건 바로 그때였다.
“……요한은 왜 칭찬하지?”
그는 내가 요한을 칭찬하는 걸 몹시 불만족스러워했다. 그가 요한에게 까칠하게 물었다.
“내 딸이 왜 너한테 칭찬하는 거지? 내 딸을 넘보는 건가?”
요한이 몹시 당혹스러워하니 내가 대신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요한은 항상 칭찬해 줬는걸요? 그래서 저도 칭찬해 주는 건데…….”
페르시스의 표정을 보니 이게 아닌가 싶었다.
“……요한.”
“네, 주인님.”
“요즘 체력이 남아돌지? 연무장 스무 바퀴 돌고 와.”
“네……?”
“당장.”
“네, 주인님…….”
요한이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가자 나는 심술부리는 페르시스를 째려보았다.
“아빠 앞에서 누구 칭찬도 못 하겠네요.”
“네가 칭찬해서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요한이 살쪘어.”
“거짓말.”
“아이스크림 녹겠다.”
“앗……!”
나는 서둘러 다시 아이스크림에 집중했다. 페르시스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하는 듯했다.
***
어느덧 잘 시간이 되어,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자 엘렌이 다가왔다.
“아가씨, 오늘은 주인님께서 재워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아빠가?”
“네.”
엘렌의 말을 끝으로 페르시스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엘렌은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방문을 닫고 나갔다.
“누가 재워 줘야 자는 나이를 훌쩍 넘겼는데요.”
“어렸을 때 못 해 준 게 미안해서 그러니 오늘만 이해해 주렴.”
페르시스는 창문 위 커튼 대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매달았다. 그는 키가 큰 덕분에 커튼 대에 쉽게 손이 닿았다.
“어, 그거 드림캐처 아니에요? 악몽을 잡아 주는 거요.”
“나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요한이 네게 선물하면 좋아할 거라고 하길래 사 와 봤다.”
하얀색 깃털 곳곳에 파스텔 칠이 되어 있는 드림캐처.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너무 예뻐요. 유디프 경 센스 있…… 아니, 아빠 최고예요.”
아까 일을 생각하니 도저히 페르시스 앞에서 그의 칭찬을 할 수가 없었다.
‘유디프 경 미안하고 고마워요……!’
속으로만 요한에게 외쳤다. 나중에 만나면 페르시스 몰래 사과와 감사를 표할 생각이었다.
페르시스는 불을 끄고 내가 누운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가 무언가 말을 꺼내지 않자 나는 어색하여 꿈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꿈에서요, 미로카곤이 저한테 진실을 보는 눈을 쓰게 해 줬었어요.”
“그랬니?”
그다지 궁금한 일이 아닐 텐데도 페르시스는 반응을 잘해 주었다.
“네. 검은 기운이 눈에 들어가더니 허공에 그 당시 쓰러져 누워 있던 저를 간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어요.”
꿈에서 페르시스와 플로아는 곁을 지켜 주었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고 나중에야 생각해 보니 진실을 보는 눈은 사람을 봐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잖아요.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갑자기 허공에 진실들이 보이게 되는 건 아니죠. 그래서 꿈은 꿈이다 싶더라고요.”
“꿈은 꿈이다라…….”
그 말에 페르시스는 깨우침을 얻는 듯했다.
악몽이 그동안 그를 괴롭혀 왔겠지만, 현실에선 힘을 쓰지 못하는 것들이다. 매여 있지만 않는다면, 악몽은 악몽 이상이 될 수 없다.
“그 꿈에는 아빠도 나왔었어요. 얼굴을 보는 건 그 꿈에서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의 품에 안겨서 사과했다. 가족이 되고 싶다며 다가오는 그를 매몰차게 대한 게 미안해서, 그리고 그럼에도 나를 계속 딸이라고 생각해 주고 구하러 와 준 게 고마워서.
“그 꿈은 나도 꿨단다.”
“어? 그럼 꿈에서 만났던 거예요?”
“그런가 보군.”
나는 신기해서 토끼 눈을 하다가도 미소했다.
“그만큼 그리워했나 봐요.”
“너를 만난 이후로 너 없이는 하루도 제대로 산 적이 없단다. 앞으로는 쭉 함께 있자.”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으나 문득 결혼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이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하면 떨어져 있는 날들이 많지 않을까요?”
아무런 의도 없는, 그와 더 대화하고 싶어서 하는 순수한 질문이었으나 페르시스는 진지했다. 그의 눈빛이 한층 침울해졌다.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해. 그리고 여자도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게끔 법을 개정하도록 내가 황제를 설득해 볼 거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곳에서 살 생각은 하지 마.”
“알겠어요. 저도 여기가 좋아요.”
페르시스가 벽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자. 벌써 10시네.”
“잘게요. 아빠도 자러 가요.”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눈을 감으니 페르시스는 내 백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좋은 꿈 꾸렴.”
그는 내가 깨지 않게 문을 살살 닫고 나갔다.
***
다음 날, 나는 거울 앞에서 내 머리칼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다가 결심했다.
“나, 머리 기를래, 엘렌. 짧은 머리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일단은 길러 볼래.”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뒷머리 기장은 줄이지 않고 눈을 찌를 것 같은 앞머리만 잘라 드릴게요.”
“응!”
엘렌이 커트용 가위로 내 앞머리를 자를 무렵, 조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황자님께서 오셨어요.”
……디아고가?
앞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곤 안뜰로 내려가니 디아고가 보였다.
디아고도 나를 발견했는지 바로 내게 달려와 내 양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 상태를 물었다.
“괜찮은 거야? 의사가 뭐래? 괜찮대?”
나는 이 상황이 떨떠름했다. 그가 직접 찾아올 줄도 몰랐거니와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괘, 괜찮대요. 치유 마법으로 다 치료해서 아무런 문제 없다고…….”
그러자 그가 나를 덥석 품에 안았다.
“다행이야……. 정말 걱정했어…….”
허락도 없이 안다니. 이 사람이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나는 바로 그를 밀치듯 떼어 내곤 화를 내려고 했으나.
“갑자기 찾아와선 이게 뭐 하시는…… 울어요?”
그가 눈물을 보이는 바람에 화는 내지 못했다.
“아니, 왜 울어요?”
누가 보면 당신이 내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하지만 그가 내뱉은 대답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쳤다는데 눈물이 안 나오겠어?”
그의 폭탄 발언에 안뜰에 있던 시종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를 따라온 엘렌과 조안은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어머.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여기서 더 대화했다간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 그의 손목을 끌곤 아무도 없는 응접실로 데려갔다. 페르시스가 봤다가는 크나큰 오해를 해 여러 사람에게 까칠하게 굴지도 모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쿵, 내가 그를 벽에 밀쳤다.
내 바로 앞에 있는 디아고는 어느새 눈물을 그친 상태였다.
나는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으로 벽을 짚었다.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게 나왔다.
“황자님, 제가 황자님을 안 좋아하는 제일 큰 이유를 알려 드릴까요?”
디아고의 눈빛이 일순 흔들린다.
“저는 본인 생각만 하는 사람을 싫어해서요. 그래서 안 좋아하는 거예요.”
은근 상처를 쉽게 받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가 눈동자를 떨다가 이내 시선을 떨궜다.
“황자님은 남 생각 안 하고 자기감정대로만 행동하시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보는 이들이 있는 앞에서 저를 껴안고, 좋아한다고 하면 제가 부담스러울 거란 생각은 안 하세요? 그것도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요.”
“…….”
“애초에, 괴롭혔던 상대한테 이렇게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용서했다고 하더라도요. 조금은…… 어려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가 나를 도둑으로 몰아가고, 내 멱살을 잡고, 내 머리에 위스키를 부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는 너무 쉽게도 내게 마음 표시를 한다.
디아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려워해. 어려워하지. 너무 어려워서 미칠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