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6화
“전 애인한테 감금당했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렇게 플로티나를 떠나자마자 불행하게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테로진과 마주쳐. 비체는 도망쳤지만 그가 잡아서 끌고 갔지. 그리고 닷새 전, 네가 카시우스와 함께 헤스티아를 물리친 그 지하 감옥에 감금했었어.”
“그곳에 감금했다고?”
빛 한 줄기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그곳은 보통 사람이라면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 곳이었다.
“대략 석 달간 그곳에 감금당해 있었어. 원치 않은 관계를 강제로 맺기도 했었지.”
플로아는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한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보다 더 충격일 수 없었다.
“그러다 비체는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비체는 절대로 배 속의 아이가 마테로진의 아이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어. 자신이 사랑한, 페르시스 플로티나의 아이일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어.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지. 미쳐 버린 상태였어.”
비체는 감옥을 탈출할 생각으로 마테로진에게 예쁜 꽃을 담은 화병을 갖고 싶다며 졸랐다. 마테로진이 화병을 사온 날, 바로 화병을 깨트려 부서진 파편으로 마테로진의 눈을 지익 긋고 도망쳤다.
“그렇게 비체는 배 속의 아이가 공작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플로티나에 석 달 만에 돌아온 거다.”
“……그렇게 된 거였군.”
미로카곤은 멀찍이서 듣고 있었던 페르시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가 뒤돌아 서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어떤 표정일지는 미로카곤은 예상할 수 있었다.
페르시스와 함께 미로카곤의 이야기를 들은 요한은 어쩔 줄을 몰라 그의 눈치만 살폈다.
이윽고 페르시스의 지시가 들려왔다.
“……요한, 비체의 묘소로 가자.”
까만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페르시스는 아무도 없는 묘소를 적적하게 걸었다.
그의 손엔 하얀 국화꽃으로 가득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왜……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묘소 자리만 알아보곤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었다.
어쩜 이리 매정한 사람이 다 있을까, 그 여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를 터였다.
페르시스는 붉고 노란 나뭇잎이 가득 쌓인 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은 탓에 다른 묘보다도 나뭇잎이 많이 쌓였다.
간신히 묘비에 쓰인 ‘비체 유리에트’, 그녀의 이름만 보일 정도였다.
페르시스가 잠긴 목으로 간신히 인사를 건넸다.
“나 왔어, 비체.”
묘비가 전부 보이게끔 나뭇잎을 쓸어내는 그의 손이 자그맣게 떨렸다.
“조금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줄걸.”
그게 한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네 마음을 이해하고자 해 볼걸.”
떨어진 눈물이 모래가 쌓인 묘비 바닥을 적셨다.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묘비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네가 좋아하던 장미꽃은 다음에 찾아올 때 사 올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하늘에서 그녀가 꼭 듣고 있기를 바라며.
페르시스는 그녀의 행복을 위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
“와, 아가씨 너무 예쁘세요!”
아들로 살겠다고 선언한 이후 처음으로 플로티나에서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고 조안이 한 말이었다.
엘렌 또한 잘 어울린다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어엿한 플로티나의 공녀님이시네요.”
“응!”
드디어 나는 정식으로 페르시스의 딸로 살아가게 되었다. 고대했던 순간이 오니 괜히 가슴이 떨렸다. 페르시스는 이미 호적에 딸로 내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이제 곧 수업이 있으니 도서실로 내려가셔야 할 듯해요.”
“그래. 가자.”
나는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도서실로 가서 미리 와 있던 아틸라 유디프 부인을 맞이했다.
유디프 부인과 6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지만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처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부인.”
언젠가 그녀에게 배운 여성식 인사법으로 그녀에게 인사하니 아틸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눈이 부시군요, 공자…… 아니, 공녀님.”
딸로 살게 되니 자연스레 호칭도 공녀로 바뀌었다.
“감사해요, 부인. 오늘 수업은 무엇인가요?”
내 물음에 아틸라는 큼큼거리곤 평소의 그녀로 돌아왔다.
“오늘 수업은 없습니다.”
“없다는 건…….”
“이제 더는 가르칠 게 없어서요.”
나는 입을 떡 벌리다가 틀어막았다.
“정말요?”
“네.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는 건 다 가르쳤습니다. 공녀님께선 다 배우셨어요.”
나는 감격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유디프 부인의 두 손을 잡았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찾아가도 되죠?”
“그럼요. 언제든 찾아오세요.”
“감사해요, 부인.”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아틸라를 보내니 엘렌과 조안이 내가 있는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오늘 마지막 수업이셨다면서요?”
조안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지막으로 요즘 정계가 어떤지 복습하고 끝났어.”
“이제 진짜 어른이 되셨네요.”
엘렌에게 그 말을 들으니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엘렌의 손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진짜 어른이 되긴 멀었는지 커피부터 생각났다.
“엘렌, 그럼 나 이제 커피 마셔도 돼?”
엘렌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도대체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예요. 마셔 본 적도 없으시면서 정말 신기하다니까요.”
마셔 본 적 없다는 말에 뜨끔해서 눈을 피했다.
“호, 호기심이지.”
“마침 나제트 영애님과 공자님 오셨으니까 티타임 하실 때 내어 드릴게요.”
“스텔라랑 밀로가 왔어?”
“네. 조금 전에요.”
엘렌과 조안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란히 앉은 스텔라와 밀로가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게 달려들었다.
“메이, 괜찮아?”
“공녀님, 일어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바짝 달라붙은 그들이 부담스러워 나는 한 걸음 뒤로 떨어진 후 대답해 주었다.
“응. 아이리스 님의 치유 마법으로 완전히 회복했는걸? 편지로 괜찮다고 알려 줬었잖아.”
사건 이후로 3일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페르시스가 공작저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했었다. 나는 그동안 스텔라, 밀로와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덕분에 그들은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전부 알고 있는 상태였다.
“넌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하는 애니까 그렇지. 보아하니 괜찮은 것 같네. 그럼 됐어.”
스텔라는 다시 소파에 가 앉았다. 밀로는 손을 내밀어 나를 에스코트하고자 했다.
“가다가 쓰러지실 수도 있으니 제 손을 잡으세요, 공녀님.”
“소파까지 3m도 안 되는데 잡으라고……?”
과보호 받는 거 아닐까……?
밀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자 하는 수 없이 손을 잡았다. 그는 나를 친히 3m 거리에 있는 소파에 데려다주었다.
“고마워, 밀로.”
“별말씀을요.”
이어서 하녀들이 우리가 마실 것들을 가져왔다. 내 것은 엘렌에게 부탁했던 대로 커피였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향을 들이마셨다.
이 향을 몇 년이나 기다려 왔는가. 고작 향을 맡았다고 벌써 카페인에 취하는 것 같았다.
바로 커피를 입안에 머금고는 목을 축였다. 황홀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너무 좋다…….”
내 모습이 웃겼는지 스텔라는 쿡쿡 웃어 댔다.
“커피가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너, 내가 놀러 가서 우리 집은 커피 못 마시게 한다고 딱 한 잔이라도 좋으니 마시게 해 달라고 했더니만 항상 거절했었잖아.”
커피를 마셔도 상관없는 스텔라는 얄밉게도 내 앞에서 자기 혼자만 커피를 마셨었다.
“그게 너희 집 규율이면 따라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이젠 마시게 됐네.”
“그렇긴 하지. 성인이 됐으니까!”
반면에 밀로 앞에 내어진 잔엔 초코우유가 있었다.
“저는 왜 초코우유입니까……? 누님도 커핀데…….”
“방금 말했듯이 성인 되기 전엔 커피 못 마시는 게 우리 집 규율이거든.”
나이는 밀로가 메이보다 한 살 더 많았지만 남자와 여자, 성인으로 간주하는 나이가 다른 제국법으로 인해 밀로는 아직 성인이 아니었다.
“……빨리 어른이 되도록 해야겠군요.”
밀로가 초코우유를 들이켰다.
“밖은 헤스티아의 죽음으로 떠들썩해. 전국 각지 신문에 헤스티아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린 것 같더라.”
“그런 것 같더라. 나도 기사 봤어.”
신문엔 대부분 사실 그대로 실렸으나 딱 한 가지, 마테로진을 죽인 사람이 내가 아닌 페르시스로 바꿔 언급되어 있었다.
괜히 나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페르시스의 배려였다.
“헤스티아가 죽어서 3기사단도 해체된다더라. 3기사단이 모여서 시위하고 난리도 아니래.”
밀로가 초코우유가 조금 남은 컵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헤스티아가 죽어 마력도 쓸 수 없으니 곧 탄압될 겁니다. 수호 기사의 본분을 다했으면 아이리스 님과 카시우스 님이 1기사단이나 2기사단으로 이적시켜 주셨을 텐데…… 그걸 본인들만 모르는 듯하더라고요.”
나는 벌써 다 마셔서 빈 커피잔을 보며 혼잣말했다.
“결국엔 디아고가 원하는 대로 됐네…….”
황태자의 오른팔을 못 쓰게 만든 주범 중 하나인 3기사단이 해체되었으니 황실에서 제일 기뻐할 터였다.
스텔라가 내게 물었다.
“그럼 넌 언제 다시 입소해?”
“다음 주에.”
아이리스 님과 카시우스 님이 나랑 아빠를 구해 줬음에도 그들이 헤스티아의 죽음과 3기사단 해체로 인해 바빠 볼 틈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
감사하다고 편지는 보내 놨으나 다음 주에 훈련소 들어가서 만나면 제대로 감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밀로가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다음 주는 너무 이른 거 아닙니까? 몸에 무리라도 가면…….”
“아이리스 님의 치유 마법이 얼마나 강한데. 나 정말로 다 나아서 지금 당장 훈련소 갈 수도 있어.”
무엇보다, 빠지면 빠진 만큼 대체 훈련해야 하니 안 빠지는 게 좋다.
내 말을 들은 밀로가 수줍게 고백했다.
“멋있으십니다, 공녀님. 어린 나이에 수호 기사가 되시고 늘 씩씩하시고…….”
스텔라가 큼큼거리며 그녀의 존재를 알렸다.
“밀로, 나도 있으니까 고백은 나중에 해 줄래?”
“고백 아닙니다. 고백은 나중에 제가 더 멋있어졌을 때 해야죠.”
“정말이지…… 내 동생 아니랄까 봐 메이를 좋아하네. 밀로 너, 내 라이벌이야.”
“누님이라고 안 봐 드립니다.”
못 본 사이 그들은 온전한 남매가 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