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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5)화 (105/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5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던 마테로진 키셀의 시신이 떠올랐다.

“아빠, 저요, 사람을 죽였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죽여 버렸어요. 아주 잔인하고, 끔찍하게…….”

저는 벌을 받아야 해요. 그 벌이 무엇일지 몰라 깨어나기가 무서워요.

제가 살인자라, 아주 지독하고 나쁜 사람이라, 살아가면 안 될 것 같아요.

페르시스는 그런 딸을 보며 언젠가의 자신이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두려워했었지. 파스칼을 죽였을 때, 그 당시 사람을 처음 죽여 봤던 나는 내 스스로가 끔찍했었어. 하지만 비체의 말을 듣고 깨달았단다.”

그는 언젠가 비체가 해 줬던 말을 제 딸에게 들려주었다.

“그자는 네가 죽인 게 아니다. 신께서 너의 손을 빌린 것뿐, 그 사람은 마땅한 벌을 받은 거다.”

그 누구보다 사랑한 여자가 그리 말해 줬었어.

“그자는 마땅한 벌을 받은 것뿐이고, 단지 성격 고약한 신이 하필 네 손을 빌린 것뿐이란다.”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로.

“내가 장담하마.”

페르시스의 말로, 내가 만든 나의 상처가 아물고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마테로진 키셀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친부라는 작자는 종종 악몽이 되어 나를 찾아와 괴롭히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가 페르시스를 용서하고, 페르시스가 나를 용서한 이상 죽고 싶지 않다.

우린 이 시련만 거치면 화목한 가족이 될 테니까.

지금 죽기에는, 페르시스의 딸로 살아가는 앞으로가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 무엇도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나 주렴. 널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도 내어 줄 수 있어.

모든 게 거짓말이라 해도, 이것만큼은 진심이란다.

***

깨어나서 보인 건 익숙한 천장. 새벽 달빛이 그려낸 익숙한 그림.

여긴 내 방이고, 내가 멀쩡히 살아서 깨어났음을 자각하자 막을 틈도 없이 눈물 한줄기가 옆으로 흘러나와 베개를 적셨다.

살았어. 죽지 않았어.

속으로 그 말만 몇 번이고 읊으며 눈물을 훔쳤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나를 간호하던 페르시스가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또 눈물을 흘렸다. 나도 그도 살아 있어서. 페르시스를 더 오래 볼 수 있게 되어서.

톡. 톡. 상체를 일으키니 이번엔 페르시스의 손등 위에 톡.

나는 어느새 온 얼굴을 적시며 울고 있었다.

그러다, 힘겹게 겨우 나온 한마디.

“아빠, 좋은 꿈 꿔요.”

오랜 시간 악몽을 꿨던 그이니, 오늘만큼은, 아니, 앞으로는 좋은 꿈만 꿨으면 한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오래도록 그와 함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

한가을의 붉게 물든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내려오다가 플로아의 슈즈 위로 떨어졌다. 그가 있는 가제보 지붕엔 같은 종의 나뭇잎이 수십 개나 쌓여 있었고, 바람이 불면 그것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플로아가 손을 뻗어 슈즈 위에 떨어진 단풍잎을 줍는 사이, 장신의 남자가 가제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호위 기사와 함께였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니, 얼마 있음 겨울이겠군.”

나뭇잎을 주운 플로아가 페르시스를 바라보니 그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조금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아직은 가을이니까요. 가을을 즐겨야죠.”

솨아아― 바람이 불자 플로아가 잡고 있던 나뭇잎이 슝, 하고 날아갔다.

플로아의 시선 끝에 저 멀리 날아간 나뭇잎이 닿을 때쯤, 페르시스가 물었다.

“메이는 자고 있으려나.”

“아무래도요. 어제 늦게 주무셨잖아요.”

그 사건으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치유 마법 덕에 메이는 흉터 하나 없이 회복했고, 다음 날 바로 플로티나의 모든 이들에게 사과했다.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고.

페르시스와 플로아 또한 메이의 심정을 알지 못해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메이 또한 멋대로 집을 나간 것에 대해 사과했다. 같이 마신 홍차와 모두의 용서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비체와의 약속을 멋대로 깬 플로아와는 따로 단둘이 대화했다.

플로아는 자신을 떠난 파사베아로 인해 극심한 우울함을 느끼고 모든 게 지쳐서 그 당시 이성적이지 못한 결정을 내렸었다고 털어놓으며 사과했다. 메이가 이제 괜찮다며 그를 용서하자 그는 눈물을 보이며 그녀와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그렇게, 플로티나가는 다시 생기를 찾았다.

“하긴, 어제 하루 종일 쇼핑을 했으니 힘들었을 만도 하지.”

메이는 앞으로 페르시스의 딸로 살아가기로 했다. 공작가의 영애로 지내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을 사느라 하루를 다 써먹었다.

플로아는 페르시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요즘 좋은 꿈을 꾸거든. 꿈이란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항상 악몽만 꾸던 그에겐 꿈이라는 존재는 눈을 감았을 때만 들이닥치는 자객과도 같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좋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떤 꿈을 꾸십니까?”

“비체와 함께 데이트를 하는 꿈. 생각해 보니 그녀와 교제할 때 데이트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항상 이곳에만 있었지.”

언제나 자신을 안아 주며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던 그녀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기도 했다.

“……더 잘해 줬어야 했는데. 청혼을 거절한 것도…… 이젠 이해해.”

자신은 좋은 애인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녀의 의사보단 자신의 의사가 우선이었고, 그녀는 항상 맞춰 주었기에 자신과 그녀가 항상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청혼을 거절당했을 땐 세상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플로아 대신, 익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체 유리에트는 그저 공작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었다. 후회할 거면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에 후회할 게 아니라 결혼을 재촉한 것에 후회해야지.”

악마의 날개를 달고 있는 재규어, 미로카곤이 어느샌가 등장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미로카곤은 그 사건 이후 계속 플로티나 공작저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미로카곤이 왜 계속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플로아의 육신에서 붉은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미로카곤을 공격하려 하자 미로카곤은 황급히 페르시스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사, 살려 달라, 인간. 아직 내 역할이 남아 있어서 여기에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날 죽일 생각은 마라, 가문의 수호신이여.”

플로아가 미로카곤을 주시하며 페르시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페르시스 님.”

대답하지 않고 페르시스는 미로카곤에게 물어보았다.

“네 역할이 뭐지?”

“아직 모르잖아. 비체가 배 속의 아이를 공작의 아이라고 한 이유.”

“…….”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 지하에서 마테로진이 메이에게 했던 말을 엿들었기에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임신 시기가 불명확해서 그랬던 거겠지. 그 자식보다 내 자식으로 키우고 싶었으니 그랬을 거고. 나를 사랑해서……일 수도 있고.’

그녀가 자신을 생각한다고 하니 괜히 쑥스러워져 페르시스는 헛기침했다.

“알진 모르겠지만 나는 지정된 구역에서만 사는 게 답답하여 헤스티아의 명을 받드는 조건으로 마물 출현 지역에서 나왔다. 한때 그녀가 마테로진 키셀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내가 그녀의 명을 받들고 그와 그의 전 애인, 비체의 과거를 봤었지. 그래서 알려 줄 수 있어. 들을지 말지는 공작이 선택해.”

페르시스의 눈빛이 떨리더니 이내 어렵게 입이 열렸다.

“……듣지 않겠다.”

“왜지?”

“그녀를 원망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10여 년이나 된 이야기지. 들을 필요 없다. 오히려 저를 닮은 예쁜 딸을 맡겨 줘서 고맙게 생각하니까.”

“그렇군……. 그럼 가문의 수호신만 듣는 거로 하지.”

플로아가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내가?”

“가문의 수호신이니 플로티나와 엮인 건 다 알고 있어야지.”

플로아는 미로카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지 페르시스에게 허락을 맡았다.

“페르시스 님, 제가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든지.”

페르시스는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그대로 가제보와 멀어지나 싶었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우뚝 멈춰 섰다.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일부러 안 듣겠다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비체의 상황과 심정을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도 있어, 발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미로카곤은 멈춰 선 페르시스를 힐끗했다.

‘결국엔 들을 생각인가 보군.’

미로카곤은 플로아에게 마테로진과 엮인 비체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처음엔 비체와 마테로진은 평범한 연인 사이였다. 평범하게 교제하다가 마테로진의 본색이 점점 드러나 비체가 힘들어하게 되었지. 마테로진이 폭력적이었거든. 도박을 좋아해서 돈을 다 잃고 비체의 돈까지 끌어다가 쓰기도 했었다. 그래서 비체는 그에게 일방적으로 결별 통보를 했고, 마테로진은 그건 절대로 안 된다며 그녀를 감금까지 했었어.”

“악질이었군…….”

“결국엔 도망치다시피 그와 결별하고 페르시스를 만나게 되었지. 어떻게 교제했는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플로아도 페르시스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랑해요, 페르시스. 모두가 당신의 적이라 해도 나만은 당신 편일 거예요.’

‘나도 평생 그대의 편일 거다. 사랑해, 비체.’

“서로 신뢰하고 사랑했음에도 비체가 청혼을 거절하고 떠났던 이유는 마테로진이 감금했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어. 물론 페르시스 플로티나가 자신을 감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고, 트라우마 때문에 결혼을 마냥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탓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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