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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4)화 (104/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4화

메이가 의식을 잃었을 때쯤, 페르시스는 허벅지가 찢어져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이 찢기는 고통에도 그는 끝까지 헤스티아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참담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자가 한 말이 사실이야?”

메이의 예상대로 페르시스는 메이가 마테로진과 함께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따라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폐가나 다름없는 곳으로 메이를 인도하는 그가 수상쩍어 허겁지겁 따라 들어온 것이었건만…….

그는 마테로진이 내뱉은 혐오스러운 음성을 전부 들었다. 그가 비체를 어떻게 대했는지. 어떤 더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대했는지. 그래서 비체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충격을 받아 그 무엇도 할 수 없었고, 정신이 들어 달려가니 이미 딸은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진 상태였다.

“마테로진 키셀이 비체를 그리 대한 게 사실이냐고!!”

붉어진 눈시울엔 비참한 눈물이 맺혔다.

페르시스의 고함에 헤스티아는 뻔뻔하게 지껄였다.

“사실이면, 그게 뭐? 그 여잔 이미 죽었고, 너도 오늘 저 꼬맹이와 함께 여기서 죽을 텐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집착으로 뒤덮여 있었다.

헤스티아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손을 움직였다. 자신이 다쳐도 상관없다는 듯, 그들이 있는 이 어둡고 서늘한 지하에 폭발 마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보라색 마법진이, 쓰러져 피를 흘리는 소녀 밑에 새겨졌다.

폭발이 일어나면, 그 소녀는 흔적도 남지 않고 죽게 될 터였다.

이를 본 페르시스는 사색이 되었으나 헤스티아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아내느라 메이에게 갈 수 없었다.

“차라리 나만 죽여. 나만 죽이라고!”

“내가 왜 그런 아량을 베풀어야 하지? 나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냥 못 보내. 죽여 버릴 거야.”

마법진이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폭풍을 일으켰다. 그 폭풍이 모든 이들을 감싸기 직전.

“페르시스 님!!”

플로아가 등장해 헤스티아를 제압했다. 플로아의 붉은 기운이 마법진을 덮어 잠재우고, 헤스티아의 손과 발을 묶었다.

“쯧, 성가신 게 따라들어 왔군.”

그녀는 손과 발을 묶은 붉은 기운을 튕겨낸 후 페르시스 앞에 선 플로아에게 있는 힘껏 공격을 가했다.

콰광―!

헤스티아의 보라색 기운과 플로아의 붉은 기운이 만나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을 냈다.

그들은 서로를 쓰러트리려 안간힘을 다해 마력 기운을 밀어냈다.

플로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서…… 어서 메이 님을 데리고 대피하십시오……!”

그 말에 페르시스는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 제 딸을 안아 들었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뒤라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차가웠다.

그가 손으로 그녀의 복부를 지혈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메이…… 조금만 참아. 바로 의원에 데려갈 테니 조금만 참아……!”

메이의 몸이 들어 올려지더니 따뜻한 품에 안겨 흔들린다.

그 흔들림에 잠깐 정신이 돌아왔다. 메이는 어디론가 급히 데려가는 그의 온기는 고스란히 느꼈지만 더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젠 정말로 죽는 거겠지.

어차피 죽을 거, 좀 더 일찍 죽을걸 그랬어.

복부가 찢어져 죽나, 클라라 펜소에게 맞아 죽나. 아픈 건 똑같잖아.

나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질 거였음 그냥 죽어 버릴걸 그랬어.

원작대로, 정해진 운명에 맞게 죽었으면…… 적어도 페르시스는 행복했을 텐데.

소설 <페르시스의 입양딸>의 페르시스처럼, 자신을 버린 여자와 자신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를 꼬맹이 따윈 잊고 행복하게.

‘나만 아니었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죄책감에 눈을 뜰 수 없다. 그냥 이대로 세상을 떠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게 없는 것 같아서.

***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떴을 땐, 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짙은 안개 속 세상에 서 있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는 낯설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죽어서 올라온 천국이라면 기꺼이 현실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여긴 어디일까.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다.

악마의 날개가 달린 재규어, 미로카곤이 흰 땅에 우뚝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여긴 무의식의 세계다. 플로아의 정신계 마법으로 만들어 낸 공간이지. 네 영혼이 죽지 않도록 무의식을 살려 두고 있어.”

“그렇다는 건…… 난 죽지 않은 거야?”

“글쎄. 살아 있다고도 보기 힘든 상황이라서. 네 의지에 따라 죽을 수도 있겠지. 너, 아주 위험한 상태거든.”

가까이 다가온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이 더욱더 짙어지더니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미로카곤의 눈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내 눈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앗, 따가워.”

“참아. 보여 주려고 하는 거니까.”

따가움을 참고 눈을 뜨니 허공에 어떤 장면이 보인다.

침대에 눕혀진 내 양옆에서 아이리스가 치유 마법을, 플로아가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고, 페르시스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있었다.

그 방 밖으론 엘렌, 조안, 요한, 집사 등 플로티나가의 수많은 이들이 나를 걱정하며 내가 깨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중간에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합세해 치유 마법으로 너를 살리고, 헤스티아를 죽였다. 고로 네가 깨어날 일만 남아 있어.”

“……너는 그걸 나한테 왜 알려 주는 거야? 넌 헤스티아를 위해 일하는 거 아니었어?”

“살면서 인간 편을 드는 마물을 봤나? 헤스티아가 있어야 마물 출현 지역이 아닌 곳을 나돌 수 있어서 그녀를 따른 것뿐이다.”

한평생을 마물 출현 지역에서만 살기엔 삶이 아깝잖아?

“너도 마찬가지야, 진실을 보는 눈으로 네 과거를 보곤 연민을 느낀 것뿐. 절대로 인간의 편을 들어 주는 게 아니다.”

“그래, 뭐…… 그렇다 쳐 줄게.”

미로카곤이 마냥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미로카곤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내 속마음을 읽어낸 듯했다.

“너, 죽고 싶은가.”

예상치 못한 물음에 움찔, 놀랐다.

“어……?”

“불행하기 싫어서, 죽고 싶냐고.”

“…….”

답을 할 수 없다. 여긴 무의식의 세계. 깨어날 의지만 있다면 깨어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런데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건, 내겐 깨어날 의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착각하지 마, 하영.”

하영이라니. 그 이름이 미로카곤의 입에서 나온 순간 눈빛이 떨린다.

“너…… 알고 있었구나.”

진실을 보는 눈을 사용할 줄 안다길래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도 알까 싶었는데.

미로카곤은 이전의 내 삶까지, 내 모든 것을 본 것이었다.

“네가 인생을 두 번 살았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다. 세 번 살아도, 네 번을 살아도, 몇 번을 살아도 모든 이치를 깨우치진 못해.”

너는 신이 아니니까.

“사람은 평생 불행하지 않아. 불행할 때가 있으면 행복할 때도 있는 거라고.”

“…….”

“심지어 너는 네 행복을 방해하는 녀석들을 전부 다 처리했다. 그랬으면서 왜 불행할 걸 두려워하는 거지?”

눈앞에 깔린 게 전보다 나아진 미래인데.

“여기서 죽으면 넌 정말 내가 본 인간 중 최고로 바보 등신인 거다.”

“……말이 너무 심해.”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려고 남장까지 했던 게 아니잖아.”

그의 말이 맞다. 죽으려고 살아온 게 아니다. 오히려 죽기 싫어 살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돌아가야지. 너를 기다리는 집으로.”

네 소중한 사람들 곁으로.

터벅, 터벅. 때마침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로카곤은 자리를 피해 주었다.

미로카곤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방황하던 내 뒤로 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페르시스 플로티나의 목소리가.

뒤를 도니 또렷하게 페르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고민하지 않고 달려가려다가 멈추었다.

더는 마음속에 그를 향한 응어리가 남아 있지 않다. 위기의 순간에 나를 구하러 와 준 그를 보고 응어리는 사라졌다. 그래서 달려가 안고 싶은데 계속 그를 밀어냈던 내 입장에서 그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안지 않으면 평생 안지 못할까 봐.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않으면 평생 사과하지 못할까 봐. 미련 없이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행히도 페르시스는 밀어냈던 내가 싫지 않은지, 오히려 이제라도 다가와 줘서 고맙다는 듯이 나를 감싸 안아 주었다.

“아니야. 네 잘못은 없어. 전부 내 잘못이야.”

뭐가 페르시스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는 내가 그의 아들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적어도 지금보단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당신 자식이 너무 하고 싶었나 봐. 그래서 다른 부모 알아볼 생각도 안 하고 아들이 되어서라도 당신 밑에 있으려고 한 거겠지.

이제야 내 마음을 깨달았다. 시작이 그에 대한 내 욕심이었다는 것도.

“죄송해요…….”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속죄해야 할 건 그것뿐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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