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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3)화 (103/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3화

“내가 비체를 이 집에 데려온 날이 알고 보니 페르시스 플로티나를 버리고 온 날이라 하더군.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속박되고 싶지 않아 청혼을 받아 주지 못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던데. 사실은 나한테 오고 싶어서 그를 찬 게 아닐까?”

그는 아주 거칠게 내 하관을 붙잡았다. 움켜잡는 힘이 강해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보니 그 여자가 죽은 이유도 알겠어. 애를 낳다가 죽은 게 아니라 애를 보고 죽은 거야. 임신 시기가 정확하지 않으니 애 아빠가 페르시스 플로티나일 거라 믿었을 테고, 결국엔 아니어서 자살한 거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이길 간절히 바랐을 텐데. 끔찍했을 전애인 때문에 억지로 가진 아이라니. 얼마나 죽고 싶었겠어.

“안 그래?”

나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애써 참고 있던, 내 자존심이나 다름없던 눈물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돋아났던 은색 기운이 사방으로 폭주했다.

“아니라고!!!!”

내 하관을 붙잡은 손을 내치니 은색 기운은 그대로 마테로진의 멀쩡한 눈을 직격했다.

“으아아아악-!!!!”

마테로진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오른쪽 눈을 감싸며 절규했다. 피는 막아 보려 해도 막아지지 않고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내 그마저도 참을 만해졌는지 다시금 망언을 쏟아냈다.

“다, 다 비체 잘못이라고.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하면 안 되지. 헤어지자고 안 했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쫘아악― 나는 그대로 그의 입을 찢어 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계속, 계속, 계속,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마테로진을 공격했다.

얼굴, 몸통, 팔다리. 주체할 수 없는 힘이 그의 온몸을 헤집어 놨다.

시간이 꽤 지난 후, 더 이상 비명이 들리지 않았을 때, 많은 양의 피를 보고 난 후 정신이 들었다.

비명도, 신음도 들리지 않는다. 이곳에 살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비명을 지를 사람도 없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그 사실을 온전히 자각할 때쯤, 계단에서 누군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헤스티아. 내가 죽인 남자를 애지중지하며 첩으로까지 삼았다는 수호신이었다.

헤스티아는 피와 살덩이가 된 마테로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안 돼……. 안 돼, 마테로진. 그렇게 피를 쏟으면…….”

죽잖아.

붉은 피가 천천히 걸어오는 헤스티아의 발끝에서 멈추고서야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절망과 분노가 교차하는 얼굴.

눈이 마주치고, 내 시야에 들어온 헤스티아의 얼굴에 살기가 가득 올라오는 걸 깨달은 순간.

푸슉.

칼날보다 날카로운 헤스티아의 마력이 내 몸통을 관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친아빠라는 작자와 친엄마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 알게 되니, 이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쩌면, 어쩌면 좋은 가족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이.

“메이!!!”

그때, 내가 찾던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사납긴 해도 정감 있고 익숙한 목소리.

페르시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페르시스는 황급히 달려와 내 상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놀라 손을 떨며 간절히 외쳤다.

“메이, 정신 차려. 메이……!!”

“아……빠…….”

울컥울컥. 입에서도, 복부에서도 피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내게 닿는 온기는 분명히 페르시스의 것인데, 시야가 흐릿해 그의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까만 머리칼과 붉은 눈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오늘도 찾아왔다가 내가 마테로진과 함께 마차에 타는 걸 보고 따라온 걸까.

그는 그만큼이나 나와 계속 가족이 되고 싶은 건지.

조금은 미련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친자식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쌓은 추억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그가 나를 구하러 와 줬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다.

정말로 딸을 구하러 온 다정한 아빠가 된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페르시스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 있는 까만 머리칼과 붉은 눈조차도 점점 뿌예진다.

죽기 전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페르시스가 내가 있는 훈련소에 찾아와 돌아오라며 그간의 일들을 후회한 일. 내가 그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집을 나간 일. 그가 처음으로 내게 딸이 되라고 한 일…….

기억들이 역순행으로 눈앞에 스쳐 내가 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날까지 떠올랐다.

그리고 더 전에. 내가 메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때.

그 오래된 기억마저도 떠오르게 되었다.

페르시스처럼 까만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진 사내.

어라. 그 사내는 누구였지? 어릴 적에 분명 만났던 기억이 있다.

이전 생에서,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페르시스와 같은 까만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아저씨와 만났었다.

‘아저씨, 연예인이에요?’

‘왜, 잘생겼느냐?’

‘아니면 뱀파이어에요? 저 물 거예요?’

‘눈이 빨개서?’

‘네.’

‘둘 다 아니란다. 난 여행자다.’

나는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그 아저씨와 친구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 사람들이 저더러 문제아래요. 오늘은 반 친구가 아빠 없다고 계속 놀리길래 주먹으로 때렸더니 선생님이 그 친구한테 제가 아빠 없어서 샘을 내는 거니까 네가 이해하라며 달래 줬어요. 억울해요.’

‘그 선생이란 작자도 때리지 그랬느냐.’

‘어제는 옆집 아주머니가 저희 엄마더러 애를 혼자 키워 불쌍하다며 안타까워했어요. 저랑 엄마는 하나도 안 불쌍하고 단둘이서도 행복한데 말예요.’

돌이켜 보면, 주된 대화는 내 하소연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왜 나를 가만히 못 둬서 안달인가. 그 당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그런 내게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널 괴롭히는 이들에겐 복수하렴. 죽여서라도 복수해. 복수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돼. 복수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망가진단다.’

‘아저씨 엄청 무서운 아저씨군요?’

‘그럼. 엄청 무서운 아저씨지. 무서운 사람이 되면 그 누구도 괴롭히지 못한단다. 그러니 너도 꼭 복수하렴. 죽여도 괜찮아.’

아저씨는 섬뜩한 조언을 남기곤 말도 없이 사라졌었다. 여행자이니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 후론 내 기억 속에서도 점점 잊혀 갔었다.

헤스티아가 페르시스에게도 공격해 오자 페르시스는 나를 끌어안고선 맞서려 했다.

분명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 텐데도 나 하나 지키기 위해.

페르시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수호신인 헤스티아의 힘을 견뎌 내기엔 벅찼다. 게다가 나를 보호하려 신경을 써야 했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그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기다리렴. 금방 끝내고 올게.”

그는 내가 두려움에 떨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전부 괜찮다는 듯이. 기필코 지켜 주겠다는 듯이.

자식을 향한 그의 사랑이 느껴져 가슴이 따뜻해졌다.

찬 바닥에 추워진 몸을 따뜻한 피가 녹여 주는 듯했다.

눈에서도 따뜻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아저씨, 제가 아저씨 조언대로 죽여 봤는데요. 아저씨 말이 틀린 것 같아요. 저는 이미 망가졌거든요.

망가진 건 고칠 수도 없어요. 고칠 자격도 없어요. 아빠에게도, 플로아에게도, 엘렌에게도, 조안에게도 상처를 줬거든요. 저는 벌 받는 거예요.

마력과 마력이 부딪히는 굉음이 들려온다.

시야엔 헤스티아의 힘을 못 이겨 뒤로 밀리는 페르시스가 보인다. 그러다 다른 공격을 피하지 못해 허벅지에서 피가 흩뿌려져 나온다.

나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어라 외칠 수도, 그를 도울 수도 없었다.

……아저씨 말은 다 틀렸어요.

어차피 안 볼 사람이니 용서한다고요? 개뿔, 그런 게 어딨어.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해야죠. 어차피 안 볼 사람이니 용서하는 건, 이기심으로 용서를 남용하는 거라고요.

참다가 떠나는 건 답이 아니었다. 내가 페르시스를 떠나는 것 또한 답이 아니었다.

결국에 그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며 나를 지키고 있고, 나는 이런 꼴이 되었으니까.

내가 잘못했어. 페르시스한테 사과하고 싶어.

그러나 더는 숨을 쉬기 힘들었다. 살려고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안간힘을 쓰던 내 마력들도 힘이 빠져 사라졌다.

나는 나로 인해 페르시스가 크게 다칠까 봐 두려웠다. 아무나 붙잡고 도움을 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된 기억 속, 그 남자라도 좋으니.

애한테 나쁜 조언을 해 준 게 미안하면 지금 당장 와서 우리 아빠 좀 구해 줘요.

당신, 제국을 세우는 데에 큰 공을 세울 정도로 강했다며.

무서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며.

한가하게 여행 따윈 집어치우고 우리 아빠 좀 살려 달란 말이야.

당신, 페르시스의 가족이잖아. 플로티나잖아.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파사베아.’

‘파씨에요?’

‘아니. 성은 플로티나.’

파사베아 플로티나.

우리 아빠 좀 도와줘요.

내가 그의 자식으로 살지만 않았어도 그는 지금쯤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을 거라고.

내가 그의 인생을 망치는 것만큼은 용납 못 한다고.

그러니 페르시스만큼은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내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말이다.

그 소망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흐트러져 더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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