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2화
“헤스티아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고?”
운이 좋게도 아침부터 훈련소에 찾아온 아이리스와 카시우스 덕분에 셋만의 자리를 쉽게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밤에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네. 미로카곤이 알려 줬어요. 그 마물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진짜로 절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카시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헤스티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해. 자기 첩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를 죽이려 한다니…….”
아이리스는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카시우스는 내 왼팔을 잡더니 마법을 걸었다.
“너한테 위치 추적 마법을 걸게. 상시로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마법이야.”
금색의 마법진이 팔뚝에 그려지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팔뚝을 꾹 눌러. 그러면 나한테 신호가 오니까 신호 받으면 바로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감사해요, 카시우스 님.”
아이리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아 주었다.
“일단은 우리가 헤스티아랑 잘 얘기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감사해요, 아이리스 님.”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를 보낸 후, 나는 훈련을 위해 운동장으로 향했다.
마법이 걸려 있을 팔뚝을 훑어보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걸음을 멈췄다.
뭐지? 시선이 느껴져. 누군가 날 숨어서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아.
설마…….
나는 바로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 인기척이 난 곳으로 겨눴다.
칼끝엔 마테로진이 있었다.
마테로진은 움찔 놀라다가도 이내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남작님……?”
검을 내리자 마테로진이 씁쓸한 어조로 사과했다.
“찾아오지 말랬는데도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몰래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
“……남작님.”
나는 검을 다시 검집에 꽂고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제 우연히 미로카곤을 만났다가 헤스티아 님이 저를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어요. 남작님도 알고 계셨나요?”
마테로진의 벽안이 놀라 커지다가 낮게 가라앉았다.
“알고 있었단다.”
“헤스티아 님과 대화를 해 보고 싶어요. 제가 남작님의 딸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 저를 헤스티아 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세요.”
남작님은 헤스티아 님이 어디에 있는지 아실 거 아녜요.
마테로진은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가서 대화를 나눠 보자꾸나.”
나는 조교의 허락을 받고 훈련소를 외출했다.
마테로진의 마차에 올라탈 때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애써 무시했다.
설령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고 한들, 지금으로선 그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무엇보다 헤스티아와 대화를 나누는 게 시급했다.
“이랴-!”
마부의 채찍질로 마차는 출발했다.
마차 안은 조용하면서도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헤스티아가 나를 죽이려 들면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지금 이렇게 침착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건, 밤새 많이 떨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떠는 시기는 지났고, 이젠 맞서 싸워야 한다.
물론 대화로 잘 해결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마테로진이 정적을 깨고 내게 말을 걸었다.
“정말로…… 내 딸로 살 생각은 없는 거니?”
그의 모습이 퍽 측은했으나 이미 마음을 굳게 다진 후였다.
“네. 죄송해요.”
이런 상황까지 닥친 마당에 그의 딸이 되고 싶진 않다.
“……그렇구나.”
마테로진은 씁쓸하게 미소하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점점 굳어지더니 제 앞의 소녀에겐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싸늘한 표정이 되었다.
그 소녀와 꼭 닮은 푸른 눈동자엔, 살의가 돋아났다.
***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헤스티아의 성에 찾아갔다. 그들이 응접실에서 수 분간 초조하게 기다리니 헤스티아가 등장했다.
그녀는 그 어떤 계략도 꾸미지 않는다는 무고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머, 아이리스, 카시우스. 예고도 없이 내 성에 찾아오고…… 무슨 일 있어?”
아이리스는 진지하게 물었다.
“너, 메이를 죽일 생각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되묻는 말이 두 박자나 늦었다. 이내 헤스티아는 계획을 간파당했다는 얼굴을 했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마물 미로카곤에게서 들었어. 네가 메이를 죽이라고 했다는 걸.”
헤스티아는 혀를 쯧, 차며 인상을 구겼다.
‘미로카곤, 쓸데없는 얘기를.’
헤스티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미로카곤을 찾아보았지만 미로카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헤스티아는 짜증 났지만 티는 내지 않으려 했다.
“우린 네게 경고하러 왔어. 정말로 메이를 죽일 생각이라면 관둬. 어차피 그 아인 마테로진 키셀의 딸로 살아갈 마음 없으니까.”
아이리스는 최대한 좋게 말하며 그녀를 말렸으나 헤스티아에겐 딱히 먹히지 않았다. 헤스티아는 오히려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너희들 알 바 아니니까 돌아가. 그 애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내 자유야.”
“헤스티아……!”
헤스티아는 자신을 설득하려는 아이리스의 말을 무시하곤 응접실에서 나가 버렸다.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뒤쫓아 응접실에서 나왔지만 그녀는 사라진 후였다.
***
그 시각, 남작가 마차가 도착한 곳은 헤스티아의 성이 아닌, 정확히 어딘지 모를 마을이었다.
사람 보기가 힘든 이 고요한 마을 속 어느 큰 저택. 마차는 그 저택 대문 앞에서 멈췄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마테로진에게 물었다.
“어라? 여긴 어디예요? 헤스티아님이 여기 계세요?”
헤스티아는 그녀의 성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
마테로진은 대답이 없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내리길래 나도 따라서 내렸다.
앞마당엔 무수한 잔디뿐인 저택. 휑한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더니 저택 안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테로진을 따라 들어간 저택은 사람도, 가구도 하나도 없어 스산하고 어쩐지 무서운 분위기였다.
먼지가 많고 거미줄이 처져 있는 걸 보아 사람이 안 산 지 꽤 된 것 같았다.
“따라오렴.”
착각일까. 목소리가 전보다 건조해졌다. 내가 딸로 살 마음이 없다고 해서 삐진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이상함을 느낀 건, 그를 따라서 저택 지하로 내려갈 때였다.
‘왜 나를 지하로 인도하지?’
마테로진은 마력으로 불빛을 만들어 지하로 가는 깜깜한 길을 밝히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깜깜하다는 건, 적어도 목적지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 않나.
분명 헤스티아를 만나러 따라온 건데, 마테로진이 헤스티아가 없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아서 너무나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남작님, 왜 저를 깜깜한 곳으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꼭 알려 주고 싶었던 게 있어서.”
수상스러웠지만 일단은 따라갔다. 위험에 처하면 카시우스 님을 불러낼 수 있기도 하고, 나도 마력이 있으니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지하엔 방이 하나 있었다. 벽 대신 철창이 있어서 감옥 같은 방. 안에선 열지 못하도록 문고리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철창 사이로 보이는 그 방엔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 보였다.
“비체 유리에트가 이 집 어디에서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니? 바로 여기란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엄마가 여기에 머물렀다고요……?”
말도 안 돼. 비체 유리에트가 이런 방을 썼다고? 아니, 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감옥에 더 가까운 구조였다. 어째서?
곧이어 믿을 수 없는 음성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을, 구역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운 음성이.
“하도 헤어지자길래 내가 이 방에 가둬 놨었거든.”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평생 내 여자일 수 있게끔.
“그런데 어느 날 문을 잠깐 열어 둔 틈을 타 도망쳤어.”
쿵, 쿵쿵, 쿵쿵쿵. 거세게 바둥거리는 심장 소리만 해도 시끄러운데, 놈의 목소리까지 들으니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잡으러 가진 않았다. 생각해 봐. 아름다운 꽃이 길가에 나도는데 누구든 갖고 싶어 하지 않겠어? 그 여잔 마음이 약해 자기 좋다는 남자는 다 만나고 다녔겠지. 더러워진 꽃은 내 쪽에서 사양이거든.”
몸이 덜덜 떨렸다. 역겨운 음절들이 손을 맞잡아 나를 에워싸 괴롭혔다.
“그, 그만해…….”
뒤로 한 발짝, 두 발짝. 모든 걸 부정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어도 놈은 끝까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2년 후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비체를 만났을 땐 생각이 바뀌었지. 더러워졌어도 그보다 아름다운 꽃은 없으니 꼭 가져야겠다고. 그래서 그녀를 다시 이곳에 감금했어.”
“하지 말라고……!”
눈을 부릅뜨며 붉어진 흰자위를 드러냈다.
마력을 조절하는 건 생각이 아닌 마음이라 했던가.
붉어진 흰자위를 감싸 눈물이 채워지는 속도와 같게 스멀스멀 내 육신에서 은색 기운이 돋아났다.
마테로진은 가소롭다는 듯이 내게 다가오며 역겨운 면상을 들이밀었다.
“두 달 후였나, 석 달 후였나. 소리 지르고, 물건을 내던지고, 난리란 난리를 치다가 내 왼쪽 눈을 이딴 식으로 만들고선 도망쳤지.”
애꾸눈을 가리키던 손이 분노에 깃들어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는 내 앞에서 더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10여 년이 지났더니만 비체와 내 사이에 딸이 있다네?”
그는 미치광이처럼 낄낄대며 웃었다. 이를 보는 사람이 제정신일 수 없을 정도로 침을 튀겨 대며 웃어 댔다.
내 몸의 떨림이 거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