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1화
“…….”
마테로진은 에클레어를 먹다 말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부담이 됐으면 미안하구나. 빨리 결정 내리라고 사 온 건 아니었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마음의 문제예요.”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선 그를 향해 허리 굽혀 깍듯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앞으론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메이야.”
마테로진은 나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아빠라고 불러 줄 수 있겠니. 내 마지막 부탁이란다.”
그의 표정이 애절해서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로 나를 딸로 들이고 싶었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그가 청승맞아 보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다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들어주지 못할 부탁도 아니었다. 그가 내 친아빠라는 건 사실이기도 했고, 어차피 딱 한 번이지 않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빠.”
하필 그때였다. 벤치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려 시선을 옮기니 페르시스가 서 있었다.
충격과 함께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짧은 외침이 나왔다.
“……아빠!”
하지만 페르시스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를 잡으려 했다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에 차마 잡지 못했다.
그에게 더는 가족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한 내가, 친아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켰다고 해서 그를 붙잡을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이쯤에서 나도 그를 남처럼 대해야 맞다.
‘그런데 왜…….’
심장이 쿵쿵 뛰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걸까.
분명 상처받은 건 페르시스일 텐데, 내가 상처받은 기분이었다.
***
그날 나는 온종일 상처받은 페르시스의 표정을 떠올렸고, 결국엔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집중을 못 해 조교한테 수시로 지적을 받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밤이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나는 아무도 없는 밤길을 거닐었다.
목적지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익숙한 사내와 마주쳤다.
“메이? 왜 안 자고 여기 있어?”
역시 잠이 오지 않았는지, 늦은 밤에 산책 나온 디아고였다.
나는 그를 무시하려고 했으나 그가 내 소맷자락을 잡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고민 있으면 나한테 털어놔. 나, 의외로 들어 주는 거 잘하니까.”
“…….”
뿌리칠 힘이 없어 순순히 디아고를 따라가 가로등 밑 벤치에 앉았다.
디아고에게라도 털어놓으면 속이 좀 편할까 싶어, 나는 오늘 내게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얼마 후. 디아고는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고심하다가 입을 뗐다.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각하께서 너의 소중함을 깨닫고 과거에 내뱉었던 무책임한 말에 반성하셨겠지. 네가 플로티나로 돌아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별 기대 안 했는데, 그의 말이 위로된다.
딱히 디아고한테서 위로의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막상 위로를 들으니 힘이 생기는 듯했다.
내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할 무렵이었다.
스스슥―
수풀을 지나가는 듯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디아고가 벤치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우리 얘기를 엿듣는 쥐새끼가 있나 본데?”
그는 바로 마력을 발휘해 주변 수풀을 샅샅이 뒤졌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는 곧 무언가를 잡아 왔다.
“어? 잡았어.”
살아 움직이는 정체 모를 큼지막한 걸 잡았다.
“뭐야? 엄청 무거운데?”
수풀에서 인형 뽑기 하듯 마력으로 무언가를 꺼내 올리니 재규어가 들어 올려졌다.
까만 악마의 날개가 달린 재규어였다.
“재규어……? 저 날개는 뭐람?”
내가 궁금해하는 사이, 디아고의 은색 기운이 재규어의 앞발과 뒷발을 묶었다. 덕분에 녀석은 도망갈 수 없게 되었다.
디아고는 그의 앞에 녀석을 내려두곤 물었다.
“너, 미로카곤이지?”
미로카곤은 굉장히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로카곤? 마물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마물 출현 지역이 아닌데…….”
“최근에 헤스티아가 미로카곤 마물을 데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어. 헤스티아가 몰래 마물 출현 지역에서 꺼내 왔나 보지.”
디아고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 그럼 어떻게 죽여 줄까. 넌 어떻게 죽고 싶어?”
미로카곤은 도망치려고 발버둥 쳤지만 실패했다. 미로카곤은 S급 마물 중에서도 약하기로 소문난 마물이었다.
도망칠 수 없다고 판단한 미로카곤은 죽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로 해. S급 마물이라 말할 수 있잖아.”
“하…….”
미로카곤은 헤스티아의 명을 받고 왔다. 지금쯤 마테로진이 메이를 죽였을지 확인하고 오라는 명이었다.
그래서 훈련소에 몰래 들어왔다가 디아고한테 잡힌 것이다.
미로카곤은 머리를 굴려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했다.
“내가 진실을 보는 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알지? 살려 준다면 너희가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을 하나씩 알려 주겠다.”
디아고는 솔깃했다.
“정말로?”
“정말이다.”
디아고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네가 좋다고 하면 살리고, 아니면 죽이게.”
나도 미로카곤의 제안이 솔깃했던지라 차마 죽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쁘지 않은 거래인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미로카곤한테서 하나씩 알고 싶은 진실을 확인하기로 했다.
디아고는 내게 비밀로 하고 싶은지 미로카곤을 데리고 10m 이상 멀어졌다. 그러고는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쑥덕거리더니 이내 흡족한 얼굴로 미로카곤과 함께 돌아왔다.
디아고가 내 옆에 앉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물어봤길래 표정이 좋아요? 저를 힐끗 쳐다보기도 하던데.”
“별거 아니야.”
눈치 없는 미로카곤이 대신 답해 주었다.
“네가 제드 블로체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봤다.”
“야! 그런 건 비밀로 해야지!”
디아고가 화를 내자 미로카곤은 놀라서 크게 움찔했다. 디아고는 내 눈치를 보며 큼큼거렸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 메이.”
“기분 나쁜 건 아니지만…… 물어볼 게 그렇게 없었나 싶긴 하네요. 누가 봐도 이제 제드 안 좋아하는걸요.”
“그렇다 해도 확답을 듣고 싶어서……. 아무튼, 난 물어봤으니까 이번엔 네 차례야.”
나는 디아고와 미로카곤이 대화를 나눌 동안 어떤 질문을 할지 고민했었다.
궁금한 게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궁금한 건 이거였다.
“우리 엄마가 임신해서 날 가진 후에 아빠한테 찾아갔었다고 들었어. 배 속의 아이가 아빠의 애라고 하면서. 그런데 난 아빠의 핏줄이 아니었거든. 그렇다면 엄마는 왜 아빠의 애라고 했던 거야?”
내가 답을 기다리며 미로카곤을 빤히 보니 미로카곤이 눈을 피했다.
“……그건 모르는 게 나아.”
“그런 게 어딨어? 살려 주는 대가로 궁금한 거 알려 준다면서.”
“차라리 다른 걸 질문해.”
“싫어. 난 이게 제일 궁금하다고.”
“그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알려 주지. 네 목숨이 달린 이야기야.”
내 목숨이 달려 있다니까 디아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이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미로카곤이 나와 눈을 맞췄다. 나름 진지한 눈빛이었다.
“헤스티아가 널 죽이려고 하고 있어. 네가 마테로진 키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게 무슨 소리야……? 날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 내가 남작님의 자식인 게 헤스티아 님과 무슨 상관인데?”
“마테로진 키셀은 헤스티아의 첩이다. 물론 너는 마테로진이 첩이 되기 전에 만난 여자와 낳은 아이이고.”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처음 알았다. 친아빠의 존재를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에 대해 조사도 해 보지 않아서 살아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런데 헤스티아의 첩이었다니…….
헤스티아 입장에선 내 존재가 달갑지 않으리란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게 죽이기까지 할 일이란 말인가.
“남작님과는 이미 관계를 정리했어. 아빠로 대하기 힘들겠다고, 앞으론 찾아오지 말라고 했으니 헤스티아 님도 생각을 바꾸시지 않을까.”
“글쎄. 헤스티아는 그냥 네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가증스러워하던데.”
그럼 나더러 뭘 어쩌란 걸까. 나는 그냥 태어났을 뿐이다. 그런 내게 뭘 어쩌라고.
디아고의 미간이 처참히 구겨졌다.
“망할 헤스티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군.”
“그럼 난 볼일 끝났으니 간다.”
미로카곤은 포박했던 은색 기운이 느슨해진 틈을 타 도망쳤다. 폭탄 발언을 던져 놓곤 도망치는 꼴이 얄미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스티아 님과 대화해 봐야겠어요. 남작님의 자식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다고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요.”
“…….”
디아고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인상만 구겼다.
헤스티아는 미친 여자다. 정말로 이 작은 소녀를 죽일지도 모른다.
“숙소로 돌아가겠습니다.”
디아고는 떠나려는 나를 붙잡았다. 이번엔 옷자락이 아닌, 손이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엔 근심이 가득했다.
“혼자 있으면 무섭잖아.”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순 없잖아요.”
“…….”
“일단은 눈 좀 붙이고, 날이 밝으면 헤스티아 님을 찾아가야겠어요. 아이리스 님과 카시우스 님께 이 상황을 알려 드리고 나서요.”
다행히 내겐 내 편이 되어 줄 든든한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있다. 설령 헤스티아가 날 죽이려고 한다 해도 그들이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의 이름을 들으니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디아고가 손을 놓았다.
“……그래.”
나는 두려움에 떠는 손을 숨기며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