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100화
아이리스와 카시우스 덕분에 정신을 차린 플로아는 당장 페르시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메이에게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잊었다.
페르시스의 침실 문을 여니 술 냄새가 진동했다. 페르시스는 빈 술병을 잡은 채 소파에 누워 있었다.
플로아는 그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고 외쳤다. 쥐고 있던 술병도 뺏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술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메이 님이 친부를 찾아간다면…… 앞으로 다시는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요……!”
그러나 페르시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눈꺼풀을 반쯤 내리뜨며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비체 님께서 이런 상황을 바라 페르시스 님께 메이 님을 맡긴 게 아닐 겁니다.”
“…….”
“아직 비체 님을 사랑하시잖아요. 그만큼 딸인 메이 님도 사랑하시잖아요.”
플로아는 그에게 진심을 토해 냈다.
“저는…… 메이 님과 평생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메이 님께 플로티나가 아닌 다른 가족이 생기는 거, 원치 않는단 말입니다. 페르시스 님도 원치 않으시잖아요.”
“이미…….”
그의 나지막한 첫마디엔 덧없는 체념이 묻어났다.
“이미 메이는 친부를 만났어.”
그 사실을 몰랐던 플로아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찾아갔었는데, 키셀 남작의 손을 잡고 벤치로 가서 에클레어를 나눠 먹더군.”
단 한 번도 메이와 디저트를 나눠 먹은 적 없던 자신과 비교되었다. 그녀가 디저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도 잘 내주지 않았다.
“내겐 플로티나로 돌아갈 마음 없다고 했다.”
페르시스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플로아는 그의 상체를 일으켜 앉히곤 각오를 다졌다.
“메이 님께 계속 다가가서 사과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더욱 멀어질 겁니다.”
“계속 다가가는 건 메이가 원치 않을 거다. 그 아이에게 끝까지 내 마음만 고집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아.”
“이대로 포기하면 그거야말로 메이 님께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남는 거란 걸 어찌 모르십니까.”
플로아는 제 앞의 사내가 정신 차릴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까지는 메이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앞으로는 메이가 행복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그녀가 일단은 플로티나로 돌아와야 한다고.
“우리에게 메이 님은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우릴 밀어낸다고 해서 그대로 두면 안 될, 우리가 지켜 주고 방향을 제시해 이끌어 줘야 하는 소중한 아이요.”
“소중한 아이…….”
소중하다, 겨우 그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곁에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사과하러 가요. 메이 님의 마음이 바뀔 수 있도록 해요.”
페르시스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페르시스는 포기하지 않고 매일 내게 찾아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모진 말을 했었던 것, 내 기분에 관심 갖지 않았던 것, 방치하여 키웠던 것. 사과할 것은 끝도 없었다.
“네가 아들로 살아간 것조차 내 강요였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도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다시는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네 마음을 세심히 살피는 아빠가 될게. 너와 평생 가족이 되고 싶어. 그러니까 합숙 훈련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메이.”
차분한 어조였지만 집중해서 들으면 떨림이 느껴진다. 명망 높은 가문의 가주로 살아온 그에게 사과는 어색하고도 어려운 것이며, 용기를 내야만 할 수 있다는 거 알지만 나는 조금 마음이 흔들릴 뿐, 결단은 확고했다.
집에서 나와 홀로 잘 살아가는 게 내 오랜 꿈이었으니까.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이렇게 불려 나올 때마다 동료들에게 주목받는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찾아오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그 후에 내린 결심은 순순히 따를 거야. 우리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약속해 줘.”
“……쉬는 시간 끝나서 가 봐야 해요. 앞으로는 불러내도 오지 않을 거니까 찾아오지 마세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서도 하루가 지나면 페르시스는 또 이곳으로 찾아와 나를 기다렸다.
웬만하면 그와 만나 주지 않으려 했지만 비가 오는데도 계속 서 있길래 하는 수 없이 만나 주었다.
그는 늘 그랬듯 내가 오면 폐인과 다름없는 얼굴로 미소를 보였다. 오늘은 한 손엔 우산이, 한 손엔 상자가 들려 있었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합숙 훈련 끝날 때까지 계속 찾아올 셈이에요?”
페르시스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상단 마물 수급 계약을 파기하고 오는 길이야. 그 외에도 너와의 시간을 방해할 만한 모든 계약을 파기했다. 앞으론 너한테만 집중할 수 있어.”
나는 페르시스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계약들을 파기했다니? 그가 돈을 벌지 않으면 플로티나가는 누가 유지하냔 말인가.
그러나 걱정도 잠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퉁명스러웠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가문 망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러자 페르시스가 놀라 황급히 부정했다.
“협박이 아니야. 오로지 너한테만 집중할 준비 되었다는 뜻이야. 그간 너한테 소홀했던 만큼, 앞으론 널 잘 챙겨줄 거다.”
“또…… 제 생각은 안 하시죠. 제가 언제 계약을 다 파기해 가면서까지 저를 챙겨 달라고 했었나요. 각하의 행동이 제게 큰 부담이 될 거란 건 생각 안 해 보셨나요?”
“……미안하다. 하지만 계약은 언제든 다시 잡을 수 있어. 난 메이 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언제든 계약을 다시 잡을 수 있다니까 그제야 나는 차분해질 수 있었다. 나로 인해 가문이 적자 나서 엘렌이나 조안, 요한 같은 이들이 일터를 잃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스는 내게 상자를 내밀었다. 한 아름보다 조금 더 큰 흰색 상자였다.
“원래는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었는데 그날 네가 바로 가 버린 바람에 주지 못했는데……. 네가 예전에 갖고 싶어 했던 드레스란다.”
나는 드레스를 갖고 싶어 했던 적 없다. 드레스를 선물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는 도대체 어떤 드레스를 준비해 왔다는 걸까.
“받지 않을 거예요.”
“다른 건 다 받지 않아도 되니 이것만은 받아 줘. 예뻐서 눈을 떼지 못했었잖아.”
그제야 나는 그 드레스가 무엇인지 떠올랐으나 여전히 받을 마음은 없었다.
“전에 왔을 땐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겠다면서 또 강요하시네요.”
“부탁할게. 이건 받아 주렴.”
“싫어요.”
그가 자꾸 내게 바짝 상자를 내미니 뒷걸음질했다. 끈질기게도 상자를 계속 내밀자 나는 거칠게 상자를 내쳤다.
“안 받는다고요!”
툭. 힘없이 떨어진 상자는 뚜껑이 열렸고, 안에 든 흰 드레스가 밖으로 나왔다. 땅에 고인 흙탕물이 흰 드레스를 얼룩덜룩, 누렇게 물들였다. 그 위로, 비는 무색하게 쏟아졌다.
엉망이 된 드레스를 보곤 내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드레스를 엉망으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계속 강요하는 그에게 화가 나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 것뿐.
절대로 드레스를 흙탕물에 젖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페르시스는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 들지 않게 바로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괜찮아. 새로 주문 제작하면 돼.”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처량하게 엉망이 된 드레스를 줍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나는 영락없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았는데.
그 때문일까. 내 입에선 모진 말만 나왔다.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부탁드릴게요.”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
비가 온 다음 날은 내 기분과는 달리 화창했다. 나는 어제 일로 죄책감을 느꼈고, 마음이 복잡했으나 나를 찾아온 마테로진 앞에서는 티를 낼 수 없었다.
“전에 맛있게 먹길래 또 에클레어를 사 왔단다.”
그는 밝게 웃으며 손잡이 달린 디저트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저번처럼 벤치에 앉았다. 나와 그 사이에 상자를 두었고, 그는 상자를 열어 내가 먹을 수 있게끔 해 주었다.
“먹어 보렴. 이번엔 딸기 크림 에클레어란다.”
에클레어가 무척 맛있어 보였으나 나는 지금 달콤한 걸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그는 먼저 에클레어 하나를 꺼내 먹었다. 맛있다는 걸 표정으로 드러내며 먹기를 권하는 듯했으나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나와 같은 백금발, 생머리, 벽안.
함께 있으면 우리는 누가 봐도 부녀 사이처럼 보이겠지. 페르시스와는 다르게…….
그가 친아빠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지만 내가 이미 열여섯이나 되어서일까. 역시 아빠로 대우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딸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희망 고문 시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용기 내어 목소리를 냈다.
“남작님.”
“응?”
에클레어를 먹던 마테로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얘기할 수 없어 앞을 보고 시선을 떨궜다.
“아무래도 저는 남작님을 아빠로 여기기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