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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9)화 (99/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9화

페르시스는 딸이 없는 동안 술 외엔 무언갈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더는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고 공허했다.

생각해 보면 그 아이는 참 밝은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 웃는 빈도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를 빨리 알아차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잡고 해결했으면 평범한 부녀 사이가 되었을 텐데. 그 아이가 집을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마차를 타고 수호 기사 훈련소로 가는 길이 페르시스에겐 조금은 두렵게 느껴졌다. 메이를 만나서 그 아이가 집에 돌아오게끔 해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용기가 나지 않음에도 메이를 만나러 가는 건, 이대로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이대로 메이가 자신과 영영 남이 되어 친부를 찾아가기라도 한다면 그땐 온전한 정신을 갖추지 못할 것만 같았다.

페르시스가 타고 간 마차는 어느새 메이가 있을 훈련소에 도착했다. 그의 몰골이 병든 폐인 같아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거나 깜짝 놀라기도 하였으나 그것 따윈 그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오직 메이 생각뿐이었다.

페르시스는 훈련소에 들어가 아무나 붙잡고 딸을 불러 달라고 했다.

기다리는 내내 메이가 자신과 만나 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얼마 후 시야 끝에 메이가 등장하고 나서야 불안함은 가셨다.

“메이.”

그는 초췌한 낯으로 되도록 환한 표정을 하며 달려갔지만 메이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자는 듯 뒷걸음질했다. 이에 메이에게로 빠르게 향하던 걸음이 점점 늦춰졌다.

메이의 표정은 딱딱하기만 했다.

“왜 찾아오신 거예요?”

차가운 목소리가 가슴을 들쑤신다. 언젠가 자신이 그 아이에게 내뱉었던 잔혹한 말들과 같은 온도였다.

“사과……하려고 왔다.”

그에겐 용기 내서 내뱉은 진심 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메이는 그에게서 사과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다 결단을 내린 상태지만, 그의 사과를 들었다가는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연을 끊겠다고 한 건 사과를 하라는 협박이 아니라 제 진심이고 결심이었어요. 저는 플로티나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차라리 죽기라도 하면 좋을 것을, 파편이 몇십 개가 박혀도, 몇백 개가 박혀도 고통만 느낄 뿐, 죽지도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잔인한데, 정말 잔인한 일은 따로 있었다.

“메이.”

뒤편에서 낯설지 않은 사내가 그 고귀한 이름을 다정히 부르며 다가왔다. 페르시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건 일순간이었다.

마테로진 키셀. 딸의 시선이 양아빠가 아닌 친아빠에게로 향했다.

마테로진은 페르시스에게 고개만 까닥 인사하곤 메이의 손을 잡았다.

“3기사단 숙소 근처에 에클레어 전문 가게가 생겨서 사 왔단다. 함께 먹자꾸나.”

딸은 페르시스의 눈치를 보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기 벤치에서 먹어요.”

딸은 그대로 친아빠라는 작자와 함께 떠나 버렸다.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에클레어를 나눠 먹는 모습이 보였다.

빈손으로 온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아이리스의 성 안에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정원이 있었다.

정원 꽃에 물을 주던 아이리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한숨만 벌써 세 번째. 같이 물을 주던 카시우스가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플로아 때문에 그래?”

“응……. 그때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서.”

아이리스는 페르시스와 메이의 관계를 걱정하며 탄식하는 플로아에게 이리 말했었다.

‘애초에 그들이 틀어지게 된 데엔 네 잘못이 크잖아.’

‘벌 받는 거야, 플로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힘든 와중에 큰 충격이 될 얘기를 했나 싶었다.

“메이가 연을 끊겠다며 출가해서 정신계 마법을 쓰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플로티나 초대 가주가 실종됐을 때 그를 잊으려는 정신계 마법을 자기한테 쓸 뻔했었잖아. 그건 본인한테 엄청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맞아. 그랬었지.”

카시우스는 물을 주면서 아이리스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결심했다.

그가 바닥에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플로아한테 가 보자. 위로하고, 조언해 주자. 우리도 메이가 가족 없이 살기를 바라진 않으니까.”

아이리스도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이 찾아간 플로티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플로아는 늘 그랬듯, 화원 가제보에 앉아 있었다.

“플로아.”

아이리스가 부르니 플로아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말 심하게 해서 미안해. 나는 제3자면서 너무 한쪽 입장만 생각했던 것 같아. 많이 힘들었을 텐데…… 위로는커녕 질타만 해서 너무 미안해.”

“나도 미안해, 플로아.”

아이리스도 카시우스도 고개를 숙인 채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플로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무슨 일 있었어? 왜 사과하는 거야?”

“수호신 모임 있던 날, 회의 끝나고 우리 셋만 남았을 때 네가 플로티나 공작과 메이의 관계를 두고 한탄했었잖아. 그날 내가-”

플로아는 아이리스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갸웃했다.

“메이? 그게 누군데?”

“뭐……?”

아이리스의 눈빛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리고, 회의 끝나고 우리 딱히 대화 안 하지 않았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설마…….”

플로아는 메이의 존재를 깔끔히 잊었다. 정확히는, 정신계 마법으로 기억 속 그녀의 존재를 숨겼다.

다시는 그녀를 기억해서 슬퍼할 일 없도록.

스스로에게 정신계 마법을 걸었다는 걸 알아차린 카시우스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그에게 물었다.

“너 제정신이야? 이러면 마력이 폭주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녀를 기억에서 숨겼으니, 그녀를 잊고자 정신계 마법을 걸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플로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카시우스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아플 거야. 그래도 참아. 널 위해서 하는 거니까.”

펑―! 곧바로 마력이 발휘되더니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아는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으윽…….”

그의 어깨에서 붉은 액체가 떨어져 나왔다.

“어서 메이가 누군지 기억해 내.”

정신계 마법은 온전한 마법이 아니다. 마법 발휘자가 다칠 경우 정신계 마법은 크게 흔들린다.

카시우스는 이 점을 이용해 정신계 마법을 깨려고 플로아를 다치게 한 것이었다.

플로아는 카시우스를 떼어 내겠다는 듯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왜 이러는 거야……. 누군지 모른다니까?”

펑―! 예고도 없이 다시 한번 그를 공격했다. 이번엔 입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기억해 내. 메이 플로티나. 누군지 알잖아. 네가 하도 소중히 여겨서 나랑 닿는 것도 경계했었잖아.”

“그만……해…….”

카시우스는 다시 마력을 발휘했다. 아이리스는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또 한 번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플로아가 다량의 피를 토해 냈다.

“그만…….”

“정신계 마법을 계속 유지하면 이보다 더한 고통이 따를 거야. 죽을 수도 있다고. 그래도 상관없어? 네가 수호해야 할 플로티나를 두고 저승으로 떠나도 괜찮은 거야?”

플로아는 그제야 흐릿한 이미지로 머리 짧은 소녀를 떠올렸다.

자신이 수호해야 할 소녀. 자신의 가족과 다름없는 소녀.

그 소녀의 모습이 뚜렷해지다가도 다시 흐릿해진다.

“정신 똑바로 잡고 기억해 내.”

플로아는 피를 토하며 그 소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메이.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소녀의 이목구비를 기억해 내니 정신계 마법이 깨졌다.

“메이 님……!”

플로아가 정신계 마법을 푼 듯 보이자 아이리스가 얼른 다가가 치유마법으로 그를 치료했다. 카시우스는 자리를 두 발짝 물러서선 손수건으로 손과 팔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아이리스가 더 치료할 곳은 없나 살피며 말했다.

“치유마법을 사용하니까 치료를 다 받고 나면 몸에 문제는 없을 거야.”

“…….”

“메이는, 기억해 냈어?”

플로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대충 피를 다 닦은 카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정신계 마법으로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할 게 아니라 메이한테 제대로 사과해야지.”

플로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하지만 안 받아 주실 거야…….”

이미 그녀는 마음의 문을 꽉 닫은 것만 같아 보였다.

“받아 주든 안 받아 주든 후회 없이 사과해야지.”

그러나 플로아는 나약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이젠 그만하고 싶어. 더는 버려져 상처받기 싫어…….”

“그래서 죽을 거야?”

그 단호한 목소리에 플로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신 영원히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죽는 방법도 있잖아.”

“…….”

“그럴 수 있겠어? 상대를 못 볼 뿐 아니라 기억조차 못 한다고. 여태껏 쌓았던 추억? 추억은 기억해야 존재하는 것이니 싹 다 사라지는 거야. 그래도 되겠냐고.”

“아니…….”

“그럼 사과해. 메이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네 사과를 받아 줄 때까지 계속해.”

모두가 행복할 방법은 그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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