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8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디아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라도 아버지가 여자로 키우려 했다면 집을 나갔을 것 같군.”
“……막상 집을 나오니까 어딘가 허전해요. 텅 빈 느낌이에요.”
나오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다 잊고 편하게 내 뜻대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안심이 되어 다 말하게 된다. 정말로 그를 용서했나 보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마음이 허전해요. 과연 이게 옳은 일이었나 싶고……. 이러다 평생을 허전하게 살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요.”
“가족이 없어서 허전함을 느끼는 거라면 나인으로 와. 다른 애들 다 내쫓고 너랑 나, 이사벨라만 출입할 수 있게 할 테니까. 나랑 이사벨라를 가족이라 생각하면 허전하진 않겠지.”
“됐네요. 나인은 분위기부터 제가 지낼 만한 곳은 아니에요.”
“그럼 나랑 연애하는 건 어때?”
나는 그가 내린 결론이 황당하여 눈만 껌뻑거렸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더욱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마음이 허전한 게 문제라며. 그러니까 나랑 연애하자고. 연애하면서 네 허전한 마음 전부 채워 줄 수 있으니까.”
내겐 헛소리나 다름없는 말을 아주 자신 있게 하는 그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가족애를 느끼고 싶은 거면 나랑 결혼까지 하고.”
참으로 어이없게도 그는 아량을 베풀듯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나는 그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술 드셨어요?”
“내가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훈련소에선 먹지 않아.”
“그럼 저 웃기려고 하는 말이에요?”
그러자 디아고는 티 나게 눈썹 끝을 축 늘어뜨렸다.
“뭔 말을 그리 서운하게 해? 다 진심인데. 내 말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 그런 거에 상처 잘 받는다고.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듯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그와 눈을 맞추기 어색해 시선을 피했다. 그는 표정을 풀고 내게 조언했다.
“보아하니 허전한 것 외의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은데…… 네 마음이 어떤지 잘 생각해 보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그게 플로티나로 돌아가는 거면 그렇게 해야 하고.”
“……돌아갈 순 없어요.”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지만 몇 년간 쌓아 온 결심을 스스로 부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네.”
“뭔데요?”
내가 궁금해서 다시 그를 마주 보니 그가 피식 웃으며 내게 바짝 붙었다. 그의 양손은 내 허리를 포박하듯, 실질적으로 허리를 잡은 건 아니었으나 도망칠 수 없게 양옆을 막았다.
“허한 마음을 채워 줄 애인을 만들어. 이왕이면 나로.”
그의 몸이 당장이라도 내 몸에 닿을 것만 같았다. 이미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은 내 바지를 적셨다.
“너무 가까운 것 같은-”
디아고가 나를 올려다보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유혹했다.
“나, 잘해.”
그는 마치 인어 같았다. 잡아먹기 위해 사람을 홀리고, 바다로 유인하는 인어.
늠름한 자태에 눈이 멀어 그에게 몸을 맡겼다간 꼼짝없이 잡아먹힐 것이다.
그나저나, 잘한다니? 뭘 잘하길래 주어 없이 말하는가.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뭐를요.”
그렇게 묻는 내 얼굴은 이미 붉어진 후였다.
“무엇이든.”
그의 미소엔 자신감이 묻어났다.
“정말이지…… 황자님은 폭력적인데다가 파렴치하기까지 하시군요.”
“그게 내 매력이지.”
“그 매력, 저한텐 안 먹혀요.”
안타깝지만 그가 나를 완전히 홀리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탕에서 발을 빼곤 일어났다.
“다 간 것 같으니까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메이.”
내가 가려고 하니 디아고가 탕에서 나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손이나 손목, 팔, 어깨 등 잡을 곳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옷자락을 잡은 건 혹여 내가 자신과 닿는 걸 싫어할까 봐 신경 써서인 듯했다.
“네가 어떤 신분이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 절대로 포기 안 해.”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순순히 넘어와. 내가 좀 상처를 잘 받아서 거절당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거든.”
그렇다기엔 그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오만함이 묻어나 뻔뻔해 보였으나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가 볼게요.”
나는 그를 두고 온천탕에서 나왔다.
***
아침 일찍 일어난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훈련에 임하는 중이었다. 팔이 조금 무겁긴 했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암…….”
어젯밤 있었던 디아고의 이상한 고백 때문에 잠을 설쳐 자꾸만 하품이 나왔다.
고민을 털어놓으니 대뜸 연애하자고 하지 않나. 이왕이면 자기를 애인으로 만들라고 하지 않나. 가족애를 느끼고 싶으면 자기랑 결혼하자고 하지 않나.
몸을 밀착하곤 무엇이든 잘한다며 자신을 어필하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 고백 받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네.
이전 생에서도 내가 고백한 적은 있어도 고백 받은 적은 없었지.
물론 제드가 고백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지만 진심이 아니었으니 제외다.
그래서 고백을 어떻게 거절해야 그가 날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나는 그가 날 포기하게끔 할 생각이었다.
일단 내가 딱히 그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평민과 황자가 연인 사이가 되는 건 말도 안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데…….”
어째서 그는 신분도 상관없다는 말도, 결혼하자는 말도 쉽게 하는 걸까? 도대체 내 무엇이 좋길래…….
생각할수록 참 이상한 사람이다.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긴 했지만.
어젯밤 있었던 일이 계속 떠올라 점차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질 때쯤이었다.
“10분간 휴식 시간을 갖겠습니다!”
때마침 훈련교관이 휴식을 외쳤다.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손으로 내뿜었던 은색 기운을 거뒀다.
마력을 활용한 첫 훈련이지만 실제로 마력을 사용한 지는 꽤 돼서 다른 수호 기사들보다는 그대로 잘 다루는 편이라, 다행히 훈련이 어렵다거나 따라가기 힘들다는 건 없었다.
목이 말라 생수병에 있는 물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벤치에 앉아서 내 쪽을 보고 있는 남자.
왼쪽 눈에 큰 스크래치가 있어 왼눈을 뜰 수 없는 애꾸눈의 남자였다.
‘왜 낯설지 않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러다 그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아! 예전에 플로아랑 기차 여행 갔을 때 봤던 남자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마스크여서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저렇게 잘생긴 외모에 애꾸눈은 흔하지 않으니까.
시선을 살짝 내리니 그가 입은 상의에 달린 배지가 보였다. 3기사단 소속을 뜻하는 보라색이었다.
그 배지를 보고 다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디선가 또 봤던 기억이 있었다.
“설마…….”
남자는 벤치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가까워져서 그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일수록 기억은 선명해졌다.
꿈의 호수에서 봤던 그 남자. 내 친아빠라고 했던 마테로진 키셀.
어느새 내 앞에 당도한 남자는 그 사람이었다.
둘 중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내 앞의 남자였다.
“비체 유리에트…….”
죽은 엄마의 이름. 그 귀한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네가 비체의 딸이구나.”
나는 친부를 만난 게 긴장되고도 얼떨떨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벤치로 이동했다. 친부와 만나서인지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내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친부와 만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나이는 몇이고 사는 곳은 어디인지 친절히 알려 주었다. 미로카곤이 헤스티아에게 내가 비체와 그의 딸이란 걸 알려 주었고, 헤스티아가 그에게 전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헤스티아의 첩이라는 사실도.
듣는 내겐 달갑지 못한 정보였다. 오히려 모르고 사는 게 나았을 정도로.
하지만 그는 친절하고도 상냥하여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설마 비체가 내 아이를 낳았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사인도 몰랐거든.”
“엄마는……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새아빠를 만나서 이렇게 잘 컸으니 다행이구나.”
새아빠……. 그렇구나. 친아빠가 있으니 페르시스는 새아빠가 되는구나.
그 사실이 새삼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네 존재를 알게 되니 처음엔 얼떨떨하다가도 감격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단다. 줄곧 비체를 그리워했거든. 그런 비체가 낳은 딸이라니, 하늘이 내게 선물을 주는 것만 같았지.”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저…….”
“나도 알아. 지금 당장은 나를 아빠로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그러니 천천히 다가갈게. 여태껏 못 키운 나날들만큼 앞으로 너를 내 딸로서 소중히 키울 각오가 되어 있단다.”
마테로진이 나를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난 널 버리지 않아.”
그 말에서 언젠가 나를 고아원에 보내겠다던 페르시스가 떠올라 울컥했다.
“너는 누가 뭐래도 내 핏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