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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7)화 (97/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7화

그날 밤, 기사단 숙소 안.

자정을 코앞에 두고도 디아고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떻게 해야 날 밀어내지 않을까.’

그가 갖고 싶은 걸 두고 이리 고민한 적은 처음이었다. 갖고 싶은 건, 아주 쉽게도 바로 제 손에 들어왔었으니까.

그런데 메이의 마음만큼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메이의 철벽을 뚫는 것일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디아고는 바람 쐴 겸 밖으로 나왔다.

건물들은 이미 소등하여 달빛과 곳곳에 놓인 가로등 불만이 거리를 비췄다. 거리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디아고는 벤치에 앉아서 메이를 떠올렸다.

메이가 구하러 호수에 뛰어들었을 때, 그만큼 필사적이었던 때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죽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심폐소생술도 간절한 마음으로 행했었다.

그리고…….

디아고는 그다음 장면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미쳤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봐선 안 될 걸 봤던 장면에 대한 기억을 떨치고자 벤치에서 일어나 무작정 걸었다.

그랬더니, 운명처럼 백금발의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꾸미지 않은, 순백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그 아이가.

옷을 갖고 샤워실이 있는 건물로 향하는 걸 보아 씻으러 가는 듯 보였다.

‘새벽 1시 다 되어 가는데 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다가가 말이라도 걸고 싶었으나 방금 떠올렸던 기억 때문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아 참았다.

디아고는 하는 수 없이 가던 길이나 마저 걷기로 했다.

2분쯤 지났을까. 그는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잠깐…… 왼쪽이면 남탕 아닌가?”

샤워실 건물은 남녀 입구 위치가 달랐다. 남탕 입구는 왼쪽에, 여탕 입구는 오른쪽에 위치했다.

그런데 언뜻 본 메이는 맨 왼쪽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얘가 설마……!”

디아고는 뒤를 돌아 서둘러 남탕으로 달려갔다. 메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황자로서의 품위는 잊어버린 채 말이다.

거칠게 문을 열어 남탕 안으로 들어가니 관리자는 없었다. 황급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리를 두리번거리니 다행히도 혼자 있는 메이의 모습이 보였다.

디아고는 그녀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정신을 어따 팔고 다니는 거야!”

그 목소리에 정신이 든 메이는 그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자님……? 황자님이 여긴 왜…….”

“여기 남탕이라고.”

“네……?”

메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탕이라 쓰여 있는 푯말을 보곤 화들짝 놀랬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고자 서둘러 단추를 채우는 그때.

입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우리가 마지막이겠지?”

“그렇지 않을까? 다들 저녁 먹고 바로 씻은 것 같던데.”

“야호! 우리 세상이다!”

하필이면 지금 누군가가 씻으러 들어온 것이다!

메이와 디아고는 대화를 듣고 남자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망할…….”

디아고는 작게 읊조리곤 곧바로 메이의 팔을 끌어다 그의 뒤로 숨겼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어디든 좋으니까 일단 숨어.”

“수, 숨으라고요? 숨을 데가 없는데…….”

샤워실은 입구, 캐비닛 공간, 여러 사람이 씻을 수 있는 샤워 공간, 온천탕 순으로 일렬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공간마다 큰 미닫이문이 있지만, 문이 전부 열린 상태라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들킬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에 숨어야 하지? 캐비닛이 작아서 안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급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남자 무리의 목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빨리!”

디아고가 외치자 메이는 일단 몸부터 숨기고 보자는 생각에 서둘러 샤워 공간으로 넘어갔다. 샤워 공간 안쪽이 보이지 않게 열려 있던 미닫이문도 닫았다.

디아고는 메이가 샤워 공간으로 들어간 걸 보고 답답해했다.

‘바보……! 거긴 숨을 곳이 더 없지!’

그사이,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남자 무리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디아고를 발견했다.

“황자님! 황자님도 지금 씻으시려는 겁니까?”

“저희가 마지막인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군요.”

“그, 그렇지 뭐…….”

디아고는 머릿속에 메이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상태로 어색하게 그가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어나갔다.

디아고가 잠시 시간을 끌어 준 덕에 일단 샤워 공간으로 도망친 메이는 허겁지겁 숨을 곳을 찾으며 자책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지……! 남탕에 들어오면 어떡해?”

딴생각에 사로잡혀서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겼더니 남탕에 들어와 버렸다.

‘남장을 너무 오래 했나……. 스스로 남자처럼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 아니, 그렇다 해도 어떻게 이런 혼동을…….’

하지만 지금은 자책할 때가 아니다. 들키지 않게 얼른 몸을 숨겨야 했다.

안타깝게도 샤워 공간은 부스가 없고 양옆에 작은 칸막이 처리가 되어 있는 게 다였기에 전체적으로 뻥 뚫려 있어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메이는 어쩔 수 없이 온천탕 구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행히 탕 옆에 성인 몸의 두 배만 한 큰 바위가 있어서 그곳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메이는 바위 뒤에 쭈그려 앉은 채로 안도했다.

“휴……. 여기에 있다가 다들 나간 후에 나가야지.”

한편, 아까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얼떨결에 다시 씻게 된 디아고는 멋쩍게 남자 무리와 함께 탕에 당도했다.

디아고는 큰 바위를 보자마자 확신했다.

‘저기에 숨었구나.’

들킬 일은 없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디아고는 남자 무리와 함께 수증기를 내뿜는 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혹여나 그들이 바위 쪽으로 갈까 봐 자신이 먼저 바위를 등지고 앉아 자리를 선점했다.

“은근 사고를 많이 치는군.”

디아고의 말에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메이는 뜨끔했다.

‘나한테 한 말이겠지? 여기에 나 말고 사고 친 사람 없으니까…….’

다음부턴 정신 차리고 다니리라 굳게 다짐하며 안 들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분간 아무 말 없이 온천물을 만끽하다가 남자 무리 중 한 명이 디아고에게 말을 걸었다.

“황자님, 요즘엔 마음에 드는 분이 없으십니까?”

“그건 왜?”

“한동안 사교계 연애 고수로 뽑히시던 분이 요샌 연애를 안 하시는 것 같아서요.”

“내, 내가 언제?”

디아고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괜히 바위 뒤에 있을 메이가 신경 쓰였다.

“에이, 아닌 척하시기는. 저희가 사교계에 얼마나 빠삭한데요. 이미 만날 분 다 만나서 안 하시는 건가요?”

“그만!”

디아고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자 남자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디아고는 메이에게 점수가 깎일까 봐 초조했다. 남자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자, 그는 인상을 구기며 다시 앉았다.

‘망할. 엿 먹이는 거야, 뭐야.’

그들은 얼른 따라서 일어나 허리 숙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을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최근에 제가 연모하게 된 분이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그분과 연애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습니다. 황자님께서 연애를 잘하시는 것 같아서 여자의 마음을 쟁취하는 법을 알고 싶었습니다……!”

디아고의 녹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설마 메이 플로티나는 아니겠지?”

“아닙니다. 다른 분이에요.”

자신의 경쟁 상대가 아니란 걸 알게 된 디아고는 경계를 풀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자들도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여자 마음? 간단하지. 섹시하면 돼.”

말해 놓고는 디아고 본인도 깨달음을 얻었다.

섹시……. 답은 섹시인가.

“감사합니다! 꼭 나제트 영애님의 마음을 쟁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하면 이제 나가. 혼자 있고 싶어.”

“넵, 황자님!”

“문 닫고 나가.”

“넵!”

탁― 황자의 명이라 무서웠는지 아니면 정말 그것도 연애 팁이라고 고마웠는지, 그들은 친절하게도 문을 닫고 나가 주었다.

***

그들이 나가 준 덕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나는 덕분에 다리를 쫙 펴고 편한 자세로 바꿨다.

디아고는 그의 큼지막한 손으로 앞으로 흘러나온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나와.”

나는 바위 옆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며 눈치를 보다가 디아고 외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왔다.

“혹시 모르니까 쟤네 완전히 간 후에 나가고.”

“네.”

그 남자 셋이 완전히 나간 뒤에 나가려면, 이 안에서 조금 기다려야 할 거 같긴 했다. 마냥 기다리고만 있자니 심심해서 나는 탕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따뜻해 보이는 온천물에 시선을 뺏겼다.

밤바람이 쌀쌀해서 그런지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발만 넣을까? 어차피 좀 기다려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결국 탕 안에 발만 넣고 앉았다. 반바지를 입은 덕에 엉덩이 쪽을 조심해서 앉으니 옷은 젖지 않았다.

아……. 발만 담갔는데도 노곤해지네.

디아고는 온천물을 가로질러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하체에 수건 하나 걸친 거 빼고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그의 육체를 보고, 그가 내 육체를 보는 일이 몇 번 있어서일까. 그의 몸을 보는 게 쑥스럽지는 않았다.

“그래서, 뭐 때문에 본인이 남탕에 들어갔다는 것조차 몰랐던 건데.”

“그냥…… 딴생각하느라요.”

“플로티나 공작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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