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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6)화 (96/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6화

그러면서 내치치 말라는 듯 구슬픈 눈으로 올려다보며 살포시 옷자락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메이한테 사과해. 어서.”

놈들은 체면도 없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내게 껄렁거리던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두 손을 싹싹 빌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입에 담지도 않겠습니다……!”

사과를 받아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들을 벌레 보듯 보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으아아아아악-!!!!!”

그 후 바로 디아고가 결국 발목을 부러트렸는지 식당 밖까지 놈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식당 밖으로 나온 나는 빈 벤치에 앉았다. 앉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평탄한 합숙 생활은 글렀나…….”

플로티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목이 쏠린다. 이는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부정적인 관심도 있으니까.

기사 생활을 순조롭게 보내고 싶은데 어쩐지 첫날부터 망친 기분이었다.

“디아고는 왜 거기서 일을 더 크게 벌여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시야 끝에 디아고가 보였다. 그대로 가 버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어째서인지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하…… 이쪽으로 오네.”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일어나 자리를 피했으나, 디아고는 대놓고 나를 쫓아왔다.

왜 따라오는 거야?

그를 떨어트리려고 냅다 달리니 디아고도 달려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붙잡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봤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으세요?”

짜증이 섞인 어조에도 디아고는 화를 내긴커녕 시선을 떨군 채로 고개를 저었다.

불쌍해 보일 수 있게끔 행동하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먹히지 않았다.

“말로 하세요. 고개만 젓지 말고.”

“……제대로 사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전에 하셨잖아요. 이제 하실 필요 없어요.”

“용서해 준 건 아니잖아.”

하긴, 사과를 받아내는 것도 지쳐서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다.

“……호수에 빠졌던 저를 구해 주셨으니 용서해 드릴게요. 됐죠? 그러니까 이제 저 좀 그만 따라오세요.”

내가 그를 떼어내곤 갈 길을 가려다가 멈춘 건, 그가 내 앞을 막아섰을 때였다.

“내게 만회할 기회를 줘.”

적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칼이 부드러운 바람에 휘날렸다. 나를 담은 녹색 눈동자는 페리도트에 가까웠다.

그의 화려한 얼굴에서 선하다 느껴지는 부분은 찾아보기 힘들어도 눈빛만큼은 확실히 선했다. 선한 눈빛은,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확실히 그는 수려했다. 합숙을 위해 편한 단색차림의 옷을 입고 있어도 그의 얼굴은 화려했고, 들여다볼수록 뇌쇄적이었다.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소문을 달고 있었던 그가 어찌 저런 선한 눈빛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한동안은 제드에게 콩깍지가 씌어 몰랐지만 확실한 건, 남주인공에게 가려지기에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고, 애초에 가려질 만한 외모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용서했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용서 안 했잖아.”

“…….”

“용서 안 한 게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그럼 진심으로 용서하면 되는 거죠?”

솔직히, 그날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호수에서 꿈만 꾸다가 질식사했을 것이다. 디아고는 내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저를 괴롭혔던 것에 대한 화는 이미 다 풀렸어요. 황자님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고는 해도 이건 진심이에요. 사과하셨고,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시기도 했으니까요.”

“엮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뭐야.”

“그냥……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어딜 가나 주목받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안 그래도 원치 않은 관심을 받아 피곤하니까.

게다가 그는 나를 찬 제드와 친한 사이이지 않은가. 그와 함께 있으면 제드와 마주치는 일이 많을 터.

“그러니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고, 앞으로는 기사단 동기 정도로 해 둬요.”

나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떠났다.

‘안 따라오지……?’

걷다가 뒤를 돌아 디아고가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디아고는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용서했으니 앞으론 날 찾아오거나 따라올 이유도 없겠지.”

이제 다 끝난 거야.

신경을 끄기로 하고 몸을 바로하다, 바로 앞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 몸이 굳어 버렸다.

디아고보다 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제드…….”

멋대로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으나 이내 이성을 잡고 앞만 보고 걸었다.

이대로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가려고 했으나 제드가 내게 말을 거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파양, 진짜야?”

힘이 빠지는 말이었다.

나를 찬 후, 처음 거는 말이 겨우 파양에 관해서라니.

솔직히 대답해 주기도 싫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 계속 입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기사단 내부에도 소문이 잔뜩 났을 테고, 조만간 공식적으로 플로티나가에서 파양을 알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보면 돼.”

페르시스와 플로아가 나를 붙잡긴 했지만 내가 집을 나왔으니 곧 호적에서도 파낼 터였다. 나도 집으로 돌아갈 마음도 없고.

제드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뗐다.

“그래.”

그리고 그대로 제 갈 길로 가 버렸다. 나는 황당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겨우 이게 끝이라니.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적이 없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과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그러다가도 현실을 자각해 수긍했다.

“신분이 달라졌으니 대우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겠지.”

제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더는 앞만 보고 걸을 기력이 없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제국 3대 수호신 중 한 명인 헤스티아는 훈련소를 거닐고 있었다. 한가한 듯 둘러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고, 기사들은 잠시 동안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풍성하고 긴 곱슬머리와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는 헤스티아의 외적 특징이었다.

훈련소에선 바지만 입는 아이리스와는 달리 헤스티아는 어디서든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 곁엔 검은 악마의 날개가 달린 재규어가 있었다.

헤스티아는 돌아다니며 기사들의 외모를 살폈다.

“역시 우리 기사단이 외모가 제일 출중하네. 얼굴만 봐도 어느 기사단 소속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잖아. 안 그래, 미로카곤?”

날개 달린 재규어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진 S급 마물, 미로카곤이었다. 헤스티아의 명을 따라 제드 블로체에게 마력을 부여한 마물이기도 했다.

“황실 쪽은 외모가 수려한 편이지 않나. 파생된 블로체 가문도 그렇고.”

“제드 블로체가 훌륭하긴 하지. 나한테 넘어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지만. 디온 스타시아는 매력이 없어서 별로고, 디아고 스타시아는 성격상 나한테 넘어올 리 없으니 손도 안 댔…… 어?”

헤스티아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냐, 헤스티아.”

“저 애…….”

170 가까이 되는 키에 짧은 백금발을 가진 소녀.

헤스티아는 그 소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몸이 굳어졌다.

“……비체 유리에트?”

미로카곤은 헤스티아가 왜 이러나 싶어 진실을 보는 눈으로 그 소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윽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확실히 제 어미를 많이 닮았어.”

헤스티아의 안면이 차갑게 식었다.

“저 여자애. 아빠 되는 사람이 누구야.”

“키운 아빠를 묻는 건가, 혈육 아빠를 묻는 건가.”

“둘 다 말해.”

“페르시스 플로티나. 그리고 마테로진 키셀.”

“…….”

“네 첩의 딸이네.”

헤스티아는 아무런 반응 없이 메이 플로티나를 응시했다.

‘마테로진의 애라니.’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첩이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였다.

“어떻게 죽일까.”

***

헤스티아의 성엔 성의 주인보다 먼저 와 있던 남자가 있었다.

백금발의 애꾸눈 사내, 마테로진 키셀이었다.

마테로진은 마력을 가진 다른 수호 기사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이는 30대 후반이었지만 마력 덕분에 외모는 20대 후반으로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응접실에서 홀로 로즈마리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여왕님께서 드십니다!”

그 알림에도 마테로진은 가만히 있었다. 헤스티아 성 내에서 그녀의 칭호는 여왕이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헤스티아는 큰 보폭으로 곧장 마테로진한테 향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네 딸이 살아 있어.”

마테로진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 딸이라니.”

“말 그대로야. 네 전 애인, 비체 유리에트가 낳은 네 딸이 살아 있다고.”

그 이름을 듣자마자 마테로진의 안광에 이채가 스쳤다.

“어떻게 할 거야? 날 진정 사랑한다면 그 앤 죽여야지.”

“…….”

마테로진은 시선을 피했다. 헤스티아는 그의 옆에 앉아 몸을 붙였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마테로진의 귓가로 향했다.

“꼭 죽여, 마테로진. 내 핏줄이 아닌 네 애는 살아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역겨우니까.”

마테로진은 대답이 없었다. 헤스티아는 마테로진의 뜨지 못하는 왼쪽 눈을 매만졌다.

“어차피 너도 그 여자 증오하잖아. 네 눈을 이렇게 만든 거로도 모자라 널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간 사람이야. 그러니 죽여 버려.”

마테로진은 헤스티아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떼어 냈다. 그러는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헤스티아를 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

“벌써? 나 지금 왔는데?”

조금 더 있지 그러냐는 말에도 그가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헤스티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미로카곤이 헤스티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마테로진이 과연 메이 플로티나를 죽일까?”

헤스티아는 싸늘한 낯으로 대답했다.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어. 못 죽이면, 내가 죽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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