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4화
‘메이 플로티나, 내게 가산을 관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언젠가 내게 퍼부었던 막말이 그도 떠오르는지 그는 나라라도 잃은 낯이 되었다.
“그런데 제가 가산을 펑펑 썼으니…… 갚아야 맞죠. 글리우곤의 수배금 정도면 저를 키우는 데에 들어간 비용의 두 배는 족히 될 것 같아요. 그거로 갚을게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그간 저를 키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는 플로티나의 성을 떼고 살아가려고 해요. 그러니 각하께서도 파양 신청을 해서 호적에서 저를 빼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온 거예요.”
고개를 들어 다시 본 페르시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상했었는지 눈시울도 붉어진 상태였다.
내가 뭐라고 그는 슬픈 낯을 보이는 걸까. 나는 그의 친딸도 아니고, 가문에 도움도 되지 않는데. 내가 뭐라고.
그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저릿했으나 난 끝까지 작별을 고했다.
“생일 축하는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각하.”
나는 그를 두고 마차를 향해 걸었고, 그는 나를 따라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페르시스가 달려와 내 앞길을 막은 건, 내가 겨우 열 걸음 걸었을 무렵이었다.
“아니야. 이젠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메이.”
언제나 표정 없던 그가 내가 떠나려 하니 감정에 휩싸여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에, 이질감이 드는 액체가 고였다.
그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런 거 다…… 네가 없으면 필요 없다.”
조금 놀랐다. 그에게 나는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그러나 내가 플로티나를 떠나려는 것은 하루아침에 난 결정이 아니었다. 줄곧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저버릴 정도로 페르시스와의 관계가 깊었던 게 아니기에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켜 주세요, 각하.”
“아빠가 잘못했어.”
처음 듣는 진심 어린 사과는 생각보다 나를 후련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눈물을 보니 나까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렸다.
“비켜 주세요.”
“누가 뭐라 해도 내게 너는 딸이다.”
“비켜 주세요…….”
“메이, 제발…….”
애원하는 그를 더는 보기 힘들어 모진 말이 멋대로 나왔다.
“저는 이제 각하가 없어도 된다고요.”
애써 눈물을 참으며 한마디, 한마디 그의 심장에 아프게 꽂았다.
“각하를 더는 아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저를 잡지 말아 주세요.
끝까지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나는 옆으로 빠져나와 도망치듯 마차로 걸어갔다.
하고 싶은 말을 했음에도 후련하지 않고 갑갑한 이 기분을 얼른 떨쳐 내고 싶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페르시스 대신 플로아가 따라와 다시 나를 붙잡았다.
“어찌 떠나시려는 겁니까.”
그 청승맞은 목소리에 나는 무시할 수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 끝에 닿은 플로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페르시스 님은 진심이십니다. 앞으로 메이 님께 남장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메이 님을 힘들게 할 일도 만들지 않을 겁니다.”
“플로티나를 떠나는 건 제 오랜 계획이었어요. 플로아는 알잖아요.”
“하지만 용서하셨잖습니까. 같이 추억도 많이 쌓았고, 페르시스 님도 바뀌셨는데 어째서 떠나시려는 겁니까.”
“플로아.”
내 부름에 그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소설 <페르시스의 입양딸>에서 인상 깊게 남았던 구절을 떠올렸다. 그것은 파사베아의 어록 중 하나였다.
“……제가 플로아를 쉽게 용서하긴 했었죠.”
플로아는 내 목숨이 달린 정신계 마법을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풀어 버렸다.
그로 인해 고아원에 가게 되어 사기꾼에게 노예로 팔릴 뻔한 상황이 발생했었다.
“쉽게 용서했던 이유는 제게 꼭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플로아는 파사베아에게 직접 들었을 테니 내가 무얼 말하는지 알 터였다.
쉽게 용서했던 이유는 꼭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우습게 봐도 상관없다.
어차피 목표만 이루면 다신 안 볼 사람이니까.
플로아는 알아차렸는지 눈동자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감정이 일렁였다.
용서받는 것, 추억 쌓는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에 떠나려는 목표를 갖게끔 만들어선 안 됐던 거다.
나는 플로아가 이를 깨달아 주길 바랐다.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이젠 안 볼 사이이니 큰 상관은 없지만.
“이제 더는 남장을 하지 않을 것이니 정신계 마법을 풀어 주세요. 그리고…… 그간 제 검술 스승이 되어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는 페르시스와 같은, 모든 걸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잘 있어요, 플로아.”
나는 그대로 마차에 올랐고, 페르시스도 플로아도 그 누구도 나를 잡지 못했다.
***
딸을 보낸 페르시스는 그 아이를 놓친 그 자리에서 비가 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져 그를 적시니 그제야 안절부절못하던 집사가 우산을 들고 황급히 달려 나와 그를 저택 안으로 들였다.
집사는 비에 젖은 그에게 옷을 갈아입겠느냐 물었지만 그가 대답이 없어 시종들과 함께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기만 했다.
그 후에야 알아차린 것인데, 그의 얼굴을 적신 건 비가 아니라 눈물이었다. 시종들은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으나 그가 어디론가로 걸어가는 바람에 그대로 두었다.
페르시스가 걷는 복도는 고요했다. 시종들은 그의 망가진 표정을 보고 놀라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것이 제 주인을 위한 배려였다.
페르시스는 홀로 도서실에 들어갔다. 언젠가의 기억이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도서실 안쪽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몸을 맡기곤 눈을 붙였다.
마음에 안정이 필요할 때면 항상 이곳에 누워 잠시간 잠을 잤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잠을 자야겠다는 마음과 딸을 잡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투를 벌이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도서실 안이 캄캄해질 시각이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겨우 얕은 달빛이 들어와 어둠을 녹여 내는 중이었다.
수 분간 그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겨우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자신의 자식이 아닐지도 모를 아이를 호화로운 저택에서 또래에게 뒤처지지 않을 교육을 받게 하고, 먹고 싶어 하는 거 다 먹이며 키웠다.
이 정도면 양부모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페르시스는 벌써 6년이나 된 일을 떠올렸다.
자신은 이곳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가 그 여자의 꿈을 꿨다. 한동안은 매일매일 꿨던 지긋지긋한 악몽. 그 악몽을 메이가 깨워 줬었다.
깨울 때 분명 아빠, 라고 불렀었지.
그때는 메이를 자식으로 인정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그 꼬맹이는 처음부터 제 앞의 모진 남자가 아빠였다는 듯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를 그런 온정 있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와 꼬맹이는 서로 너무나도 닮지 않았는데. 그 꼬맹이는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이.
그런 순수한 아이에게 자신은 이리 말했었다.
네가 무엇을 증명하든 넌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그러니까 포기하고 고아원에 가라고.
과거 일을 회상하던 페르시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비체에게 버려졌던 날 이후 오늘 처음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비체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때 자신은 어땠었는가. 슬퍼하고, 울부짖고, 괴로워하지 않았었나.
오랫동안 그때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했으면서 자신은 너무나도 쉽게 그 아이를 버릴 생각을 했었다.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꼬맹이를.
자신을 아빠라고 여기는 꼬맹이를.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낳은 아이를.
그랬더니 그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화를 냈는가? 울기라도 했나?
아니다. 그 아이는…….
‘제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으면 키웠을 거죠?’
고아원에 가지 않기 위해, 순순히 남자애로 살게 되었다.
페르시스는 6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깨달은 그의 눈에선 다시금 눈물이 새어 나왔다.
메이가 자신의 아들로 살았던 것은, 그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강요였음을.
***
“아가씨, 플로티나 공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정말?”
한가롭게 소설책을 읽던 스텔라는 앤의 말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책을 테이블에 올려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그런데 저 좀 혼란스러워요…….”
“뭐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요, 지금 보니 공자님이 여자이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지, 확실히 여자셔요. 그 외모와 그 목소리에 남자일 수가 없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몹시 혼란스러워하는 앤과 달리 스텔라는 앤이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정신계 마법을 풀었나 본데……?”
“……정신계 마법이라뇨?”
“나중에 설명해 줄게. 메이 지금 어딨어?”
“1층 응접실에 계셔요.”
스텔라는 바로 응접실로 내려가 메이와 만났다.
오늘 생일인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태어난 걸 축하받지 못한 사람처럼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스텔라…….”
스텔라는 그녀가 안쓰러워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가가서 안아 주었다.
“공작님과 얘기하고 왔어?”
“응……. 힘들면 오라고 하긴 했는데…… 너무 빨리 왔지?”
“아니야. 잘 왔어.”
스텔라는 하나뿐인 친구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 그 친구는 그녀의 품에서 눈물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