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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3)화 (93/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3화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뭘 미안해하는 걸까. 날 도둑으로 몰아갔던 거? 내 구슬을 훔치려 했던 거? 머리에 위스키를 부었던 거?

아니면, 페르시스의 친자식이 아닌 걸 조롱했던 거?

“너한테 했던 짓들 전부.”

“……어째서요?”

이제 와서 왜?

“내가 널…….”

디아고는 망설인 끝에 내뱉었다.

“널 좋아해서.”

처음부터 네게 관심이 있어서 접근했고, 관심을 갖게 된 네가 남자라서 내 마음을 부정하려 더욱 괴롭혔었어. 미안해. 후회하고 있어.

용기 내어 사죄하는 말이었으나, 내 귀엔 변명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사과도 안 하셨겠네요.”

“……미안해.”

“그 마음, 이룰 수 없는 거 알죠?”

저는 황자님을 좋아하는 일 없을 테니까요.

“다시는 황자님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같은 기사단에 들어가겠지만, 웬만하면 피해 주세요. 저도 피해 드리겠습니다.”

디아고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소맷자락을 더욱 꽉 붙잡았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사과하라면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할 수 있어. 용서도 바라지 않아. 그러니까…….”

다신 내 얼굴 안 본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가 보겠습니다.”

그의 손을 떼어 내니 디아고는 다시금 붙잡으려 했으나 곧바로 생성된 은색 기운이 그를 막아냈다.

디아고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 못했다.

***

디아고는 메이를 놓친 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전날부터 오늘 메이와 만날 것을 기대했었다. 어떻게 사과하고, 어떻게 고백할 건지 전날 수십 번 연습했음에도 막상 그녀를 보니 머리가 굳어 연습한 대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녀의 차가운 모습에 더더욱 그러했다.

나인을 나가겠다고 하기 전에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받았어야 했는데. 그래야 그녀를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자주 봐야 그녀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기회가 주어지니 말이다.

알면서도 바보 같이 놓친 자신이 한심했다. 또한 사과해도 그녀는 용서해 줄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닐까 초조했다.

하지만 지금은 잡아선 안 된다. 그것은 디아고가 메이의 생기 잃은 얼굴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

나제트가 응접실. 나는 그곳에서 스텔라와 함께 있었다.

“아빠는 황실의 은인이니 아마 재판도 우리 쪽에 유리하게 진행될 거야. 우리가 바라는 건 클로빈의 무기징역이니 아마 그렇게 되겠지.”

“잘됐네. 죗값은 응당 치러야지.”

“나중에 클로빈 펜소한테 면회 가자. 꿈의 호수에 들어가게 만든 것에 대한 사과도 제대로 받아 내야지.”

“됐어. 더는 그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이만하면 복수 성공했다고 생각해.”

스텔라는 이렇게 끝낸다는 걸 영 못마땅해했다.

“으이그, 사과를 제대로 못 받은 상태로 용서하면 어떡하냐? 뭐,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만.”

나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마셔 건조한 목을 축였다. 하지만 축여도, 축여도 건조함은 나아지지 않았다.

“펜소 백작과 백작 부인은 사형시킨다던데. 하긴, 자칫하면 켈레샤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사건을 만든 거니까. 황실에선 이에 참여한 헤스티아도 예의 주시하고 있대.”

“헤스티아…….”

그녀가 이끄는 기사단은 제3기사단. 페르시스가 내 친아빠라 추정한 마테로진 키셀은 그 기사단에 속해 있다.

스텔라는 묵묵히 목만 축이는 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네, 메이.”

“그러게. 4시간밖에 안 남았어.”

생일까지 4시간. 그사이에 가문의 힘이 발현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헛된 소망을 품게 되었다.

“내 생일 선물은 제1기사단 숙소로 보냈어. 앞으로 한동안은 거기서 지내는 거지?”

“응.”

“각종 화장품이랑 장신구 보내 놨으니까 자주 사용해. 여태껏 못 꾸민 한을 다 풀어야지.”

“고마워. 아, 늦었으니 가 봐야겠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향하자 스텔라가 날 불러 세웠다.

“메이.”

그 부름에 나는 뒤돌아보았다.

“미리 생일 축하해.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 찾아와.”

“응. 고마워.”

하지만 나는 평소처럼 웃으면서 인사를 해 줄 수 없었다.

홀로 마차를 타고 가는 밤길이 쓸쓸했다.

머릿속은 복잡하면서도 복잡하지 않다. 기분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아직은 익숙지 않은 기사단 숙소. 지정된 내 방에 들어가 이불 속에 몸을 파묻으면, 정말로 이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아마도 자정이 될 때까지 눈을 못 붙이겠지.

나한텐 이리저리 부딪혀 터진, 콩알만큼 작은 희망이 있으니까.

겨우 그 콩알만 한 희망에 놀아나 자정을 맞이했다.

댕― 댕― 댕―

종이 열두 번이나 울리고서야 ‘역시, 그럼 그렇지’라는 멋없는 말을 내뱉으며 희망을 놓아주었다.

나는 열여섯 살이 되었고, 끝내 가문의 힘은 발현되지 않았다.

***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일날, 몇 주 만에 집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애 같아지지 않는다면, 철든 것일 텐데. 나는 애처럼 감정에 치우쳐지지 않았으니 철든 것일까.

하나, 감정을 느끼지 못함에도 이 소설의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을 심산이었다.

지금 내 처지에선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마차는 막힘없이 달려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플로티나가에 도착했다. 천천히 가 주길 바랐으나 진작에 마부에게 그리하라 명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느릿느릿 마차에서 내려와 익숙한 땅에 두 발을 내디디니, 페르시스 플로티나라는 가깝지만 먼 존재가 화원 중앙에 우뚝 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나는 더 가까워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게서 가문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곱씹고, 또 곱씹다가…… 내 친부의 존재를 떠올리고 있을까?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꿈의 호수는 원래 진실의 호수라는 이름이었는데 아주 오래전 개칭되었다고 한다.

어쩌다 그 호수에 들어가게 된 이가, 물속에서 본 진실을 믿기 싫어 꿈일 것이라며 부정했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본 것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겠지. 내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과, 내 친부가 살아 있다는 걸 페르시스가 알게 된 일이. 어쩌면 그는 이미 내 친부에 대해 조사한 후일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던 이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가문의 힘이 생겨 당당하게, 보란 듯이 그에게 찾아가 그가 그간의 일들을 후회해 주길 바랐는데 전부 헛된 꿈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버리고 싶었던 감정 한 줄기가 돋아났다.

체념.

체념한 나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내게 모진 말과 모진 태도를 보였던 그에게도 이제는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명망 높은 플로티나의 가주라는 사내는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 주었다. 어릴 때 한두 번 빼곤 그에게 안겨 본 적 없어 낯선 품이었다.

“생일 축하한다.”

축하의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무엇이 그를 지치게 했을까. 친딸이 아니라는 충격? 친딸이 아닌 아이를 키웠다는 허탈감? 친딸이 아닌 아이에게 돈을 썼다는 분노? 불행하게도, 셋 다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리우곤 수배금…… 도착했죠?”

절대로 그가 나를 키운 게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자 수배금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나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게 다시 화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이, 할 얘기가 있어. 산책 좀 할까.”

“……네.”

그와 함께 넓은 화원을 거니는 내내 나는 시선을 떨군 채로 있었다. 아리따운 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말 또한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열 손가락도 되지 않을 듯 적은 나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읊으며 그때의 기분을 알려 주었다.

플로아에게 안겨서 자신에게 오지 않았을 땐 질투가 났었다는 둥, 원래 초콜릿은 입에 대지도 않지만 내가 준 초콜릿은 맛이 괜찮았다는 둥. 그는 내가 들으면 기분 좋을 법한 얘기만 꺼냈다. 마치, 떠나려는 사람을 미리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글리우곤을 잡았다고 들었다. 다치진 않았지?”

“네. 그 글리우곤 수배금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네가 내 딸로 살길 바라면.”

페르시스는 걸음을 멈추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애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주 큰 욕심일까.”

참고 있던 말들을 토해 내듯 내게 묻는다. 입가의 근육들이 서툴게 떨리며 움직였다.

“지금이라도 너와 잘해 보고자 한다면 이기적인 거니?”

“…….”

“이제 와서 네가 내 핏줄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하면…… 난 너한테 정말로 모진 사람인 거니?”

차마 묻는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껏 상처받아 온 건 나인데,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다 받은 표정으로 내게 물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을 전하러 이곳에 온 것이다.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기억나세요? 제가 각하의 아들로 살아가겠다고 했을 때요, 제가 친자식이 아니거나 도중에 아들로 사는 것을 포기하면 키워 준 값의 두 배로 갚겠다고 했었죠.”

“줘도 받지 않을 거다. 내게 그런 돈 따윈 필요 없어. 그러니 돈을 갚고 떠날 생각은 하지 마.”

“하지만 각하, 각하께선 제게 가산을 관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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