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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2)화 (92/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92화

“네가 때린 나는 사실 분신이었어.”

“분신이라고……?”

“생각해 봐. 펜소가에서 온몸이 멍투성이, 상처투성이로 있어야 할 내가 번듯이 무도회장에 나타났잖아.”

“그럼 분신이면서 왜 맞았다는 소리를 해서 나랑 오빠를 감옥에 가두게끔 한 거야?!”

메이가 클라라에게 일갈했다.

“클라라 펜소, 네가 큰 소리를 낼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메이는 클라라의 눈높이에 맞춰 다리를 굽혔다.

“상황 파악 좀 해. 네가 지금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주위를 살펴봐. 여기, 쿠투스 수감소 앞이야.”

클라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로 대문 간판에 ‘쿠투스 수감소’라 쓰여 있었다.

쿠투스 백작이 운영하는 이 수감소는 스스로 들어가 신체 포기 각서를 써서 강제로 노동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당장 먹을 밥이 없어서 죽을 것 같다거나, 죄를 저질렀는데 잡히면 사형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거나, 노예인데 끔찍한 주인을 만나 평생을 지옥같이 살 것 같다거나 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찾는 곳이었다.

지도관이 나가라고 할 때까지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많이 시킬 뿐, 밥은 맛없지만 꼬박꼬박 나오고, 허름하지만 잘 곳도 있으며 수감소엔 관계자 외의 외부인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어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들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내가 널 탈옥시킨 이유는, 네 죄가 클로빈보다 크기 때문이야. 폭행은 둘 다 했지만 횟수는 네가 훨씬 더 많고, 훨씬 더 많이 괴롭혔다며. 넌 클로빈보다 더 큰 벌을 받아야지.”

“설마 날 여기에 집어넣겠다고……?”

“응. 감옥보다는 여기가 낫지? 여기선 일 잘하면 돈 주고 밖으로 내보내 주기도 한다더라. 어떤 사람은 겨우 3개월 일하고는 집 한 채 값 받고 나왔다던데?”

“장난해? 그건 헛소문이고 다들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애초에 황제가 이런 시설을 짓는 걸 왜 허가했겠어. 감옥이나 다름없으니까 죄수를 이곳에 허가한 거잖아!”

쿠투스 백작은 마물을 파는 상단주이기도 하다. 덕분에 그에겐 잘 길들인 마물이 많아 수감소에서 사건 사고 일으키는 사람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수감소에서의 수익을 백작과 황실이 반반 나눠 갖기까지 하니 황제 입장에선 수감소를 짓는 걸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난 이곳엔 절대 안 가. 차라리 다시 가족이 있는 감옥으로 보내!!”

밀로는 그럴 수 없다는 듯이 신체 포기 각서를 보여 주었다.

“어쩌지? 넌 이미 손도장 찍었는데.”

“뭐……?”

클라라가 그럴 일 없다는 듯이 다급히 신체 포기 각서를 보았다. 서명란엔 그녀의 이름과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밀로는 무도회 전, 그녀가 술에 잔뜩 취한 틈을 타서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게 했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때였다. 정체불명의 두 남자가 수감소 대문을 열고 다가오더니 클라라의 양팔을 붙잡았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준 고통만큼 벌을 받길 바라, 클라라 펜소.”

메이의 말을 끝으로 두 남자가 끌고 가자 클라라는 발버둥 치며 발악했다.

“놔, 이거 안 놔? 나를 수감소에 처넣겠다니, 다들 미쳤어? 난 클라라 펜소란 말이다!!”

그들은 가만히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안 돼! 놓으라고!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온단 말이야! 안 된다고!!! 아아악-!!!!”

클라라는 괴성을 내지르며 쿠투스 수감소 안으로 끌려갔다.

***

돌아가는 마차에서, 나는 스텔라와 밀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다들 피곤하겠다. 수고 많았어. 혼자 왔으면 쓸쓸했을 텐데 함께 와 줘서 고마워.”

“친구니까 같이 가 줘야지. 클라라 펜소가 절규하는 게 보고 싶었기도 하고.”

“저도 클라라 펜소가 합당한 벌을 받는 건 보고 싶었던걸요. 공녀님께서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싶기도 했고요.”

우리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장기간에 걸쳐 성공시킨 사람처럼 표정도 마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문득 호수에서 꿨던 꿈이 떠올라 표정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생각났어?”

“혹시 빠트린 거라도 있습니까?”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숨길 수 없었나 보다. 특히나 눈치 빠른 밀로와 스텔라 앞에서는. 내가 머뭇거리자 둘은 얼른 말해 보라며 나를 보챘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 꿈 내용을 들려주었다. 마테로진 키셀이 내 친부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니 그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아닐 거라고 말하면 내가 페르시스의 자식일 거라는 희망을 주는 꼴이니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이를 알아채곤 먼저 괜찮다며 부담감을 덜어 주었다.

“그런데 괜찮아. 친부가 누구든 상관없거든. 그냥 조금…… 허탈했을 뿐이야.”

옆에 앉은 스텔라는 내 팔을 그녀의 품으로 당겨 안아 주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내 포옹 돈 주고도 못 사는 거니까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해.”

스텔라가 꽉 안는 바람에 조금 답답했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나는 가만히 안겼다.

“고마워.”

얼마 후 몸을 떼니 이번엔 밀로가 내게 물었다.

“저도 안아 드려도 됩니까? 안아 드리고 싶습니다.”

“어? 응. 그래.”

순간 조금 놀랐지만 나를 위해서 안겠다고 하는 것이니 수락했다. 밀로는 천장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살짝 일어나 마주 보고 앉은 나를 안아 주려고 했으나.

쿵, 마차가 돌덩이를 밟는 바람에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밀로는 머리를 매만지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나만 안을 수 있다는 신의 계시 같은데?”

스텔라가 킥킥 웃어대자 밀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하십니다, 누님.”

그들을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잡생각이 날아가 다시금 표정이 밝아지게 되었다.

“마차에서 내리면 안아 줘, 밀로.”

“네, 공녀님.”

밀로는 나와 안는 게 좋은지 싱글싱글 웃었다.

***

오늘은 나인 회원들의 정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난 나인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오늘이 나인에 가는 마지막 날이야.’

이제 더는, 나인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내일이 드디어 내 생일이다. 성인이 되는 날.

나인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디아고가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나를 기다린 듯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처량한 표정이었는데 나는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디아고는 내게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나 하지 않았다. 나는 딱히 궁금하지 않아 무시했다.

“제 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나는 망설이는 디아고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앞으로 이곳에 올 일이 없으니 짐을 챙겨야 했다.

하나, 내 방에 들어가 챙길 짐을 찾아보니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나인 회원으로서 이용한 물건들뿐, 내 개인 소유품은 없었다.

내가 가져갈 거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빈손으로 방에서 나와,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작별 인사는 해야지.”

나는 메인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늘 그랬듯, 나인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감옥에 간 클로빈을 제외한 디아고, 제드, 비르타와 갈리.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이 내게 주목했다. 그들은 어쩐지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비르타와 갈리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플로티나 공자가 여자라는 거지? 황자님이 술에 취해 헛소리한 게 아니라는 거지?’

‘블로체 공자님께 들었잖아. 플로티나 수호신이 성별을 알 수 없게 하는 정신계 마법을 걸어서 우리가 몰랐던 거라고.’

그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예상 가능했다.

보나 마나 내가 여자라는 걸 디아고와 제드한테서 들었겠지. 이에 대해 눈짓을 주고받는 것일 테고.

그렇지 않고야 내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디아고는 이질감이 느낄 정도로 내 눈치를 봤다.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제가 나인에 가입한 이유는 사과를 받아 내기 위함이었죠.”

디아고는 애처로운 눈을 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과는 물에 빠진 절 구해 주신 것으로 받았으니 나인을 나가겠습니다.”

디아고는 내가 더는 그에게 볼일이 없다는 걸, 그리하여 나인을 탈퇴할 거란 걸 이미 예상했던 듯하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충격이라는 듯 흔들리는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나는 시선을 비르타와 갈리에게로 옮겼다.

“비르타, 갈리.”

그들은 침을 꼴깍 삼키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담담하게 일침을 가했다.

“그렇게 살면 평생 나인 회원밖에 못 돼.”

“…….”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들은 내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에 은근슬쩍 짜증을 표했으나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반성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본인들이 이제껏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제드를 마주했다. 제드는 내게 어떠한 미련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랬다.

차이고 나서 미련을 가졌었다. 제드의 마음을 확인하지 말걸 그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호수에 들어갔다 나온 후, 정신을 차렸다.

포기했어. 이젠 널 좋아하지 않아.

나는 제드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피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메인룸을 나갔다.

문을 닫고 막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문이 다시 한번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디아고가 나를 따라 나와 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미안해.”

그의 음성이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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