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9화
“오빠,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왜지……?”
클로빈과 클라라가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그때, 기사들이 그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레드카펫 위에 내팽개쳤다.
“윽……!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게야?!!”
클라라가 버럭 화를 냈지만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클라라는 당황스러웠다.
‘왜, 왜 이러는 거지……?’
모두의 반응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불안함이 밀려오자 클라라와 클로빈은 겁먹은 얼굴로 기어서 서로에게 딱 달라붙었다.
디아고가 그들 앞으로 걸어와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여유롭게 말려 올라갔다.
“인생 망한 거 축하해, 펜소 공자, 펜소 영애.”
펜소 남매는 영문을 알 수 없었음에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망했다뇨?”
“뒤돌아 봐.”
디아고의 지시에 클라라와 클로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이 흰자가 다 보일 정도로 커졌다.
밀로를 포함하여 나제트 일가가 서 있었기 때문에.
펜소 남매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미, 밀로, 네가 여긴 어떻게…….”
클라라의 입에서 밀로의 이름이 나오자 하인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제 아들을 감금한 죄, 폭행한 죄로 저들을 고소하겠습니다.”
무도회장은 또다시 술렁였다. 하객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낯으로 수군댔다.
“후작님께 아들이 있었나요?”
“아주 오래전에 후작님께서 아들을 잃어버리셨다고 들었어요. 계속 못 찾고 계신 줄 알았는데 찾으셨나 봐요.”
“그럼 후작님 옆에 계신 분이 나제트 공자님이신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후작님과 많이 닮았잖아요.”
“방금 후작님께서 아들을 감금 폭행한 죄로 고소하겠다고 하셨죠? 그렇다는 건…… 펜소 공자와 영애 때문에 지금까지 실종됐었던 건가요?”
“세상에, 그런 거예요?!”
하객들의 대화 소리가 점점 커지자 황제가 일갈했다.
“조용히들 하게. 나제트 후작이 발언하고 있지 않나.”
황제의 말에 하객들은 전부 입을 다물어 장내가 그제야 조용해졌다. 황제는 하인드 옆에 서 있는 밀로를 보며 생각했다.
‘후작과 닮은 걸 보니 아무래도 저 아이가 잃어버린 아들인 것 같군.’
“자세히 말해 보게, 후작.”
하인드는 밀로에게서 그동안의 일들을 들었다.
처음부터 밀로를 납치, 감금한 건 글리우곤이고, 펜소가에 노예로 있던 밀로는 분신이란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는 글리우곤뿐만 아니라 펜소 남매에게도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인드는 펜소 남매를 감금, 폭행죄로 고소하기로 했다. 분신이든 아니든 노예로 부리며 감금하고 폭행했던 건 사실이니까.
“제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실종됐었던 제 아들입니다. 펜소 남매는 그간 제 아들을 노예로 부려 감금하고 폭행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니?”
황제가 묻자 밀로가 대답했다.
“네. 사실입니다. 클로빈 펜소와 클라라 펜소는 저를 감금한 거로도 모자라 수많은 어린 노예들과 함께 폭행했었습니다. 손과 발로 때리는 건 기본이며, 어느 날은 채찍으로, 어느 날은 목검으로 사람이 기절할 때까지 때렸습니다.”
밀로의 폭로를 들은 이들은 전부 경악했다. 황후, 황태자도 같은 반응이었으나 황제는 침착하고자 했다.
클로빈과 클라라는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인생이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큰 소리로 우겼다.
“저희는 그런 적 없습니다. 감금하고 폭행했으면, 나제트 공자님이 어떻게 이곳에 있겠습니까!”
실제로 그들은 의문이었다. 펜소가에 노예들과 함께 상처투성이로 있어야 할 밀로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몸으로 이곳에 왔단 말인가.
“나제트 공자는 누가 봐도 후작님의 핏줄인 걸 알 정도로 후작님과 닮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미쳤다고 공자님을 감금하고 폭행했겠습니까? 노예들에겐 그런 적이 있을지는 몰라도 공자님껜 절대로 그런 적 없으며,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클로빈과 클라라의 말이 그럴듯하여 하객들은 긴가민가했다. 확실히, 감금 폭행당했다기엔 밀로는 멀쩡했다.
지켜보던 디아고는 그들이 발뺌할 걸 알았다는 듯이 다시 기사들한테 눈짓했다.
기사들은 이번엔 사진을 꺼내서 황실 일가와 펜소 남매, 주변 귀족들에게 나눠 주었다.
밀로는 분신이 펜소가에서 다쳤을 때마다 나중에 증거자료로 남기기 위해 펜소가 문양이 있는 가구, 혹은 펜소가 가족사진이 있는 곳에서 다친 부위와 함께 사진을 찍었었다. 노예들을 때리기 위해 채찍을 들고 있는 클라라를 몰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증거 사진만 해도 200장이 넘어갔다.
“지금 제가 멀쩡한 이유는 황자님께서 귀한 약초를 써서 저를 치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증거 사진이 나오고, 디아고까지 맞다고 하니 클로빈과 클라라는 나라라도 잃은 표정이 되었다.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는 하인드가 나섰으니, 부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직감한 탓도 있었다.
곧 감옥에 들어가게 될 거라는 것까지도.
“이 또한 건국제가 끝난 후 경위를 살피겠다. 저들도 끌어내.”
황제가 명하자 기사들은 클로빈과 클라라를 끌어냈다.
클라라와 클로빈은 울먹이며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밀로를 붙잡고 늘어지려 했지만, 밀로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스텔라는 꼴좋다는 표정으로 메롱 했다.
폭로를 끝낸 디아고는 만족스러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이도 통쾌해하겠군. 클로빈이 계속 시비를 걸었으니.’
어제는 울었으니 오늘은 웃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 디아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메이를 찾아보았다.
“어……?”
그런데 무도회장에 있어야 할 메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 통쾌한 장면을 안 보고 집에 갔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메이는 오늘 밀로가 나제트가의 아들로 인정받고 펜소가 몰락의 계기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디아고는 메이와 가장 절친한 스텔라에게 물었다.
“나제트 영애, 메이 플로티나가 어딨는지 아나?”
마침 스텔라도 메이를 찾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펜소 영식을 따라가고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클로빈을?”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디아고가 인상을 썼다.
‘걘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디아고는 무도회장 밖으로 나가 펜소 남매를 끌고 가는 기사들을 잠깐 멈춰 세웠다. 디아고가 클로빈에게 물었다.
“너, 메이 플로티나를 데리고 나갔다면서.”
클로빈은 눈물범벅 된 얼굴로 디아고에게 싹싹 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감옥 가기 싫습니다, 황자님……!”
황자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조금이라도 제 죄를 경감시킬 생각뿐이었다.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자 디아고는 안면을 싸늘하게 굳히며 클로빈의 복부를 냅다 걷어찼다.
“으헉-”
쿠다당― 그대로 쓰러진 클로빈은 아파서 눈물을 흘려냈다.
디아고는 쓰러진 클로빈의 멱살을 잡아 들며 험악한 목소리를 냈다.
“빨리 메이가 어딨는지나 얘기해. 죽여 버리기 전에.”
클로빈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메이를 어디로 데리고 갔었는지 불었다.
“꾸, 꿈의 호수에서 브로치를 찾고 있을 겁니다…….”
“호수에 들어갔다고?”
“네…….”
디아고는 바로 클로빈을 내동댕이치고 호수 쪽으로 달려갔다.
‘거길 왜 들어가, 이 바보가!’
***
호수에 입수한 나는 마력으로 빛을 내며 호수 밑바닥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브로치에 있는 보석이 반짝거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브로치를 잡은 나는 헤엄쳐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방에서 모여든 정체불명의 파동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대로 의식을 잃고 눈을 떠보니 그곳은 물속이 아니었다. 옷이 물에 젖지 않은 걸 보니 꿈속인 듯했다.
‘여기는…….’
플로티나 1층 응접실 안이었다. 나는 창가에 서 있었고, 소파엔 페르시스와 어떤 여자가 마주 보고 앉아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페르시스를 보니 가슴이 쓰라렸다. 그는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걸까, 나는 언제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꿈이 아니었다면 궁금해도 참고 넘어갔겠지만, 꿈속이니 물어보려고 그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네 발짝 내디뎠을 때쯤, 충격적인 말을 듣고 말았다.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눠 낳은 아이를 키우고 싶으신가요?”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이름 모를 여자가 언급한 ‘아이’가 나를 가리킨다는 단번에 알아차려서였다.
내가 아빠의 친딸이 아닐 거란 건 예상했지만 막상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하니 머릿속이 까매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비정한 말을 들었다.
“파양하세요. 그 아이를 계속 플로티나 공자로 키우는 거, 그보다 미련한 짓이 없으니까요.”
여자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하께선 제 첫사랑이니 충고해 드린 겁니다. 꼭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를.”
여자가 응접실 밖으로 나가도 페르시스는 고개를 떨군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두통이 온 듯했다.
나는 머릿속이 까매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으나 굳어진 몸이 풀려 움직일 수는 있었다. 바로 페르시스에게 다가가 그가 들고 봤던 사진을 집어 들었다.
하나는 어떤 남자의 단독 사진이었다. 뒷장엔 ‘마테로진 키셀’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사진을 집어 드니 방금 봤던 남자와 비체 유리에트로 추정되는 여자가 다정하게 있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내려놓고 마테로진 키셀이라 적혀 있는 사진을 다시 보았다. 가슴께에 제3기사단 배지를 단 그가 외적으로 나와 닮은 점이 많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놀랍지도 않지만 정말로 나는 페르시스의 친딸이 아니었던 거다.
그 사실을 깨닫곤 허탈하게 사진을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을 때쯤, 페르시스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비체, 넌 도대체 왜…….”
참 슬프게도, 메이를 왜 자신의 아이라고 했었냐는 원망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