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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7)화 (87/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7화

대망의 무도회 마지막 날이 되었다.

건국제 무도회는 항상 마지막 날 무도회가 가장 규모가 크다. 이번 건국제도 마찬가지였다.

무도회장이 크리스털홀이 아닌, 그보다 세 배 더 큰 에메랄드홀로 옮겨졌으며, 전날 무도회보다 세 배는 더 많은 귀족들이 참석했다.

오늘의 지정 액세서리는 브로치이기에 이사벨라와 약속했던 해바라기 브로치를 착용하고 무도회에 들어섰다.

나는 전국 각지에서 온 귀족들을 제쳐 가며 스텔라를 찾아보았다. 스텔라는 하인드와 함께 있었다.

나는 하인드에게 다가가 깍듯이 인사했다.

“좋은 밤이에요, 후작님.”

“메이 왔구나. 스텔라가 어찌나 기다리던지. 스텔라, 메이 왔네.”

스텔라는 뭘 그런 걸 말하냐는 듯 뾰로통해진 얼굴로 하인드를 째려보았다.

곧 어떤 귀족이 하인드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그사이 나와 스텔라는 자리를 옮겼다.

스텔라가 표정을 풀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밀로 만나는 거 맞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좀 이따 후작님께서 우실지도 몰라.”

“당연히 울겠지. 자기 아들을 거의 10년 만에 만나는 거잖아. 뭐…… 오늘만큼은 아빠가 울어도 괜찮아. 오늘 말고는 앞으로 울지 않을 테니까.”

“장하네, 스텔라.”

“밀로는 아직 무도회장에 안 들어온 거지?”

“응. 황제 폐하께서 무도회장에 오신 후에 디아고와 함께 입장할 거야. 그때 펜소가의 만행도 터트릴 거고.”

“오늘 아주 중요한 날이네.”

“그렇지.”

스텔라가 주제를 돌렸다.

“어제 어땠어? 귀족 영식이 아닌 영애로 무도회에 참가한 소감.”

“아…….”

나는 쓰게 웃었다.

“제드한테 차였어.”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스텔라는 화들짝 놀랐다.

“어제 차였다고? 왜? 예쁘게 하고 갔을 거 아냐.”

나는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제드가 처음부터 날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지.”

내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내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서 결혼 상대가 될 수도 있으니 잘해 줬던 것뿐…….”

“사회적 위치? 웃기고 있네. 자기 복을 자기가 찬 거야. 너 같은 여자가 어딨다고.”

스텔라는 쯧쯧 혀를 차자 나는 미소했다.

“요즘 내 칭찬이 많아졌네, 스텔라.”

“그래서 좋니? 난 기분 안 좋은데.”

스텔라는 팔짱을 끼곤 삐졌다는 듯이 행동했다.

“기분이 왜 안 좋은데?”

“그거 달고 왔잖아.”

스텔라가 눈짓한 곳엔 이사벨라가 준 해바라기 브로치가 있었다.

“아, 이거.”

“수호 기사 배지도 있으면서 왜 굳이 그걸 달고 온 거람.”

스텔라가 투덜거리자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황녀님께서 오늘 꼭 하고 오라고 하셨거든. 혹시 이 브로치 때문에 질투하는 거야?”

“누가 질투한대?”

“그러면?”

스텔라는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보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몰라.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

나는 그런 스텔라가 귀여워 실실 웃었다.

“삐지지 마, 스텔라.”

***

그 시각, 에메랄드홀 2층에서는 누군가가 메이와 스텔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에메랄드홀 역시 크리스털홀처럼 2층에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게 가운데가 뻥 뚫린 구조였다.

“망할…….”

그는 다름 아닌 클로빈 펜소였다. 클로빈은 사이 좋아 보이는 메이와 스텔라를 보며 분노했다. 당장이라도 메이를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클라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도 이글이글 빛나고 있었다. 클라라는 자신을 엿 먹였던 저 둘을 자신의 노예로 삼아 다시는 입을 놀릴 수 없도록 때려 주고 싶었다.

클로빈과 클라라는 어제 합의를 봤다.

클로빈이 스텔라를 좋아하니 스텔라의 육체엔 손대지 않기로.

대신 클라라의 복수를 위해 스텔라한텐 무도회가 끝나면 노예 밀로를 죽기 직전까지 패서 선물하기로 했다.

그리고 메이는…….

클로빈이 1층에 있는 한 웨이터를 가리켰다.

“플로티나 공자 뒤에 서 있는 웨이터 보이지? 한쪽 팔 걷은 웨이터. 저 웨이터가 우리의 일을 도와줄 조력자야.”

“브로치를 훔쳐다 줄 조력자?”

그들은 메이가 달고 온 브로치가 황녀의 선물이란 걸 알고 있었다.

갈리와 비르타가 직접 봤다고 알려 줬다. 황녀가 메이에게 선물하면서 마지막 무도회 날 꼭 착용하고 와 달라고 얘기했다는 것까지도.

“저 친구, 아주 손기술 좋은 친구야. 음지에서 소매치기로 유명해. 플로티나 공자는 브로치가 없어졌는지도 모를걸?”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다 가져오면 펜소 남매는 브로치로 메이를 협박해 골탕 먹일 계획이었다.

클라라는 난간에 팔을 걸치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머, 벌써 훔쳤는데?”

“정말로?”

고용주인 클로빈도 놀라 메이의 옷을 보니 정말로 해바라기 브로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예상했던 대로 메이는 브로치가 없어졌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클로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거 참…… 음지에서 유명할 만하네.”

곧 웨이터가 2층으로 올라와 클로빈에게 훔쳐 온 해바라기 브로치를 건넸다.

“가져왔습니다, 주인님.”

“잘했어, 가 봐.”

“네.”

웨이터는 언제 클로빈을 만났었냐는 듯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일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클라라가 미소하자 클로빈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야지. 내가 메이 플로티나 때문에 어떤 모욕을 당했는데.”

클로빈은 메이한테 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아카 대회 2라운드에서 목에 칼을 들이미는 바람에 실례를 하는 모습까지 보인 것도 모자라 반복해서 사과까지 한 것.

해골 귀신으로 협박해서 자신을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든 것. 그런 자신에게 더럽다고 한 것.

떠올리니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무조건 복수해야지.”

클로빈은 해바라기 브로치를 부서져라 꽉 쥐었다.

***

나와 스텔라는 여러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스텔라의 말대로, 사교계엔 우리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듯했다.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는데…… 혹시 두 분 교제 중이신가요?”

“네?”

나는 잠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잊어 무척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스텔라가 태연하게 대처했다.

“교제는 아니고, 친한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어머, 그렇군요. 말 안 해 주셨으면 교제 중이라 오해했을 거예요. 두 분이 항상 같이 다니셔서요.”

스텔라가 내게 팔짱을 꼈다.

“저희가 워낙 친해서 그렇죠, 호호.”

스텔라의 가식적인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까지 가식을 부려야 될 것만 같았다.

“저희가 많이 친하긴 하죠, 하하…….”

스텔라와 달리 내 웃음소리는 어쩐지 어색했다.

역시 연기는 스텔라가 잘해.

우리 사이를 오해하던 영애들이 가고, 나와 스텔라 둘만 남게 되었다.

스텔라는 우연히 내 상의를 보더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었다.

“너 은근 센스 있네?”

“응? 뭐가?”

“내가 싫어하는 티 내니까 뺐잖아.”

“뭐를?”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브로치 말이야.”

“브로치……?”

시선을 내리니, 내 왼쪽 가슴에 꽂혀 있어야 할 해바라기 브로치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뒤늦게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브로치를 찾아보았다.

스텔라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실망했다.

“뭐야, 일부러 뺀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였어?”

“그런가 봐. 어떡해. 황녀님께서 주신 건데…….”

곧 있으면 황제와 함께 황녀가 들어올 것이다. 내 가슴에 브로치가 달려 있지 않으면 분명 실망할 터.

꼭 찾아야만 한다.

내가 바닥을 보며 브로치를 찾는 그때, 누군가 내 앞을 막았다.

“해바라기 브로치를 찾으십니까?”

고개를 들어 보니, 클로빈이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어디에 있는지 알려 드릴 테니까.”

나는 클로빈을 따라서 무도회장 밖으로 나와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브로치가 어디에 있길래 날 밖으로 데려가는 거지?”

클로빈은 건성건성 대답했다.

“따라와 보시면 압니다.”

수상쩍었지만 브로치를 찾아야 하니 하는 수 없이 계속 따라갔다.

놈은 나를 어느 호숫가로 데려갔다.

유니콘 조각상 뒤로, 이팝나무에 둘러싸인 드넓은 호수가 보였다.

“여기는…….”

밀로를 구출한 날, 제드가 경치 좋다며 어느 게스트룸 테라스로 인도해 본 호수였다.

이팝나무를 보니 가슴이 쓰라렸다.

영원한 사랑. 이팝나무의 꽃말처럼 영원히 자신만을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제드의 말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드가 했던 말은 왜 떠올리니. 진심으로 좋아해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

우울함에 젖어 있을 때쯤, 클라라 펜소의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지금 딴생각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클라라가 호수 앞에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내가 찾던 해바라기 브로치가 있었다.

나는 브로치를 보자마자 정색했다.

“영애께서 가지고 계셨군요. 내놓으시죠.”

클라라는 씨익 웃더니 그대로 호수에 브로치를 빠트려 버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머나, 이걸 어쩌죠? 놓쳐 버렸네요.”

나는 클라라의 안하무인 태도에 분노해 양손 주먹을 꽉 쥐곤 성큼성큼 호수 앞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벗고 뛰어들려고 하니 클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떤 호수인지 모르시나 봅니다? 겁도 없이 들어가려고 하시는군요.”

“……꿈의 호수잖아.”

들어가면 꿈을 꾸게 된다는 꿈의 호수. 수심 5m에 달하는 깊은 호수였다.

클라라가 얄밉게 말했다.

“그런데도 들어가시려고요? 브로치를 찾기는커녕 꿈을 꾸느라 물속에 잠겨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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