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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6)화 (86/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6화

제드는 부정하지 않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내일 일정에 관해서 알려 줄 게 있어서 왔어.”

“일정…… 알려 주러 왔구나.”

낙담했지만 티 내지 않고자 노력했다. 대놓고 슬퍼하면, 너무 없어 보이지 않는가.

제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전에 우리 사이에 오갔던 대화는 모른다는 듯이, 내일 건국제 마지막 무도회 날의 계획을 알려 주었다.

“내일 밀로를 무도회장으로 데려올 거야.”

밀로는 귀한 약초를 사용한 덕에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회복한 상태였고, 움직이는 데에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내일은 황제 폐하께서도 무도회에 참석하셔. 폐하께서 오시면 나와 디아고가 펜소가의 만행들을 폭로하고, 나제트 후작과 밀로를 상봉시킬 계획이야. 나제트 후작에겐 내일 꼭 무도회에 참석하라는 서신을 보내 놨어.”

“……순조롭게 진행되겠네.”

시선을 아래로 떨구곤 뜸을 들이다가 용기 내어 그에게 물었다.

“제드, 정말 이것만 말하려고 온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따로 있다는 걸 제드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제드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난간 앞에 섰다. 한 올 한 올 날리는 보랏빛 까만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감싼 가면에 부닥칠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테라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들어가서 키스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미신이 도는 곳이지. 반대로 키스를 하지 않고 나오면 그 둘은 절대로 사랑이 이뤄질 수 없고.”

“응. 그래서 널 이곳으로 부른 거야. 네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

제드는 몸을 틀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으려고 하니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확인시켜 줄게.”

제드는 가면을 벗어 고귀한 얼굴을 드러냈다.

밤하늘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밤하늘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사람의 미모가 이렇게도 황홀할 수가 있나.

그 고운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일부러 바짝 다가와 숨소리를 공유했다. 마치 입술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그가 키스를 시도한다면 순순히 응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더욱 다가오기를 기다렸으나.

“…….”

끝내 입술이 닿지 않았다.

허탈함에 눈을 떴을 땐, 제드는 어느새 가면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짝사랑을 확실하게 끝내 줄 대답은 그 후에 들려왔다.

“이게 내 대답이야.”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후에야 실연당했음을 자각했다.

내 주제에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보다.

애초에 귀족도 아닌 사람이 제드 블로체와 연인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현실을 직시하며 애써 괜찮다는 듯이 굴었다. 애초에, 이렇게라도 짝사랑을 끝내려고 그를 이곳으로 오게 했던 거니까.

짝사랑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던 내 자신이 싫어서.

내가 주도한 일에 비참한 표정 따윈 짓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진심을 보여 줘서 고마워.”

미소를 지으면 미련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럼에도 그에게 미소를 보이는 건,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주책맞게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아서였다.

“내일 보자, 제드.”

나는 가면을 쓰고 도망치듯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제드는 당연히 날 붙잡지 않았다.

내 짝사랑은 이렇게 간단히도 끝이 나 버렸다.

나는 그대로 무도회장 밖으로 나와 건물 주위를 거닐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긴장이 풀렸는지 표정 관리하기 힘들어졌다. 걷다 보니 주책맞게 눈물이 나왔다.

“어……? 나 왜 울지?”

한 줄기였던 눈물이 두 줄기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가 날 대하는 행동들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근데 왜 울어.

“실연당한 게 뭐라고……. 짝사랑이 실패할 수도 있지.”

솔직히, 금사빠라 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겉모습에 반한 건 맞지만 그가 내게 잘해 줄 때마다 더욱 빠져들어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행동들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기에, 지금 흘리는 이 눈물은…… 배신감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는 더는 걸을 힘이 없어 우뚝 멈춰 서선 가면을 벗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바로 그때였다.

“메이 플로티나.”

뒤편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그 이름을 불렀다. 메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물이 멈췄다.

지금 날 부른 거야……? 어떻게 알고……?

난 지금 남장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말이다.

나는 일단 가면을 쓰고 못 들은 척 걸어갔으나 누군가가 날 뒤따라와 내 손목을 붙잡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가까이서 들으니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왜 도망가.”

이 목소리는…….

붙잡혔으니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다름 아닌, 디아고 스타시아였다.

“황자……님?”

가면을 쓰지 않았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는 은은한 술 냄새가 났다. 보아하니 무도회도 뒷전으로 두고 근처 정원에서 혼자 술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 남자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는 건가 싶어 주위를 살필 때쯤, 디아고는 내가 무방비한 틈을 타, 내 가면을 벗겨 버렸다.

“!”

화장한 내 얼굴을 본 그의 녹안이 커졌다. 그는 잠시 넋을 놓았는지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역시 너였네. 간도 크군. 무도회에 여장을 하고 오다니.”

대놓고 여자처럼 꾸며도 성별을 모르는 디아고를 보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저인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성별도 못 맞추면서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았대?

그는 대답하길 조금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체구, 걸음걸이.”

답변을 들은 나는 조금 놀랐다.

“고작 그런 거로 알아채셨다고요?”

“딱 보면 알지.”

내가 짝사랑 상대를 바로 알아본 것처럼, 디아고 또한 그러한 걸까. 가면을 썼음에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테라스에서 나와 무도회장 밖으로 황급히 뛰쳐 나가길래 따라왔단다.

“저인 걸 확인했으면 손목 놔주시죠?”

그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까 제드랑 단둘이 테라스에 있던데, 눈물을 보아하니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나 봐?”

“……황자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내가 선을 그으니 그가 인상을 쓰곤 이를 아득 물며 손목을 자신 쪽으로 휙 끌었다.

“……!”

재빨리 중심을 잡아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그의 품에 안기기라도 할 뻔했다.

“이게 무슨-!”

“그럼 신경 안 쓰이게 하든가.”

“네……?”

화가 나 보였던 그의 안면이 처량함으로 물들여졌다.

“네가 미치도록 신경 쓰이는데 나더러 어떡하라고.”

……신경 쓰인다고? 어째서?

당황스러웠다. 신경 쓰이게 할 만한 행동을 내가 언제 했다고 이런단 말인가.

굳이 날 찾아와서 나인에 초대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범인으로 몰아가고, 가만히 있던 내 머리에 위스키를 부은 건 너였잖아.

그 일들을 떠올리니 화가 나, 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절 싫어해서 제가 뭘 하든 신경 쓰이는 거겠죠. 저를 싫어하는 그 마음부터 고칠 필요가 있겠네요.”

디아고의 눈썹이 불만족스럽다는 듯 꿈틀 움직였다.

“네 눈엔 내가 널 싫어하는 것 같아 보여?”

“아니에요? 하, 그럼 싫어하지도 않는데 괴롭히는 거였어요? 본인 재미를 위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하니 내 손목을 억누르는 힘이 거세졌다.

“차라리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네가 재미 삼아 갖고 놀만 한 장난감이었으면 이딴 쓸데없는 감정 소모는 없었을 테니까.”

나는 당최 그의 말뜻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손목이 슬슬 아프기도 하고, 그가 술에 취해 술주정 부리는가 보다 싶어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황자님 말씀대로 제드한테 차여서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니 제발 저 좀 놓고 가 주세요.”

디아고는 짜증이 치솟는지 얼굴을 구기며 까득 이를 물었다.

“그 새끼를 왜 좋아하는 건데. 걔가 뭐가 좋다고.”

손목을 쥐는 힘이 점점 세져 아팠다.

“읏…….”

표정을 찡그리며 짧게 신음을 내뱉고 나서야 디아고는 움찔하곤 바로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붉어진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힘을 더 가했으면 멍이 들 게 분명했다.

디아고는 그런 나를 청승맞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넌 왜 남자여서…….”

내가 남자여서 무얼 어쨌다는 건지, 뒷말은 삼키곤 그는 어이없는 명령을 내렸다.

“차라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네?”

너무 어이없어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먼저 다가와 놓곤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다 그는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시선을 피하곤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받아.”

그가 내게 가면을 던지자 얼떨결에 받아 버렸다. 아까 그가 벗긴 내 가면이었다.

“이것도.”

그리고 포켓에 꽂힌 행커치프를 내게 휙 꺼내 던졌다.

은색의 황실 문양이 들어간 남색 행커치프였는데,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새것이었다.

받은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건 왜…….”

그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집에 돌아가. 남들한테 추한 모습 보여 주지 말고.”

추한 모습이라니? 내 모습이 뭐 어때서?

디아고는 내게 시비를 걸고 떠나 버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디아고를 째려보다가 행커치프로 시선을 옮겼다.

“울어서 화장이 번지기라도 했나…….”

난 그가 준 행커치프로 아까 흘린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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