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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5)화 (85/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5화

밤이 늦어 황녀가 돌아간 후, 메이는 스텔라에게 브로치를 자랑했다.

“짠, 황녀님께서 주신 거다. 예쁘지?”

스텔라는 뾰로통한 반응이었다.

“넌 그걸 나한테 자랑하고 싶니?”

“아까 두고 가서 삐졌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내일은 무도회 안 올 거야. 재미도 없고, 너는 날 두고 다른 사람한테 가 버리니까.”

“미안해. 황녀님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용서해 주라. 메이가 스텔라 손을 잡고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애교 부리자 스텔라는 바로 화를 풀었다.

“알겠어. 내가 착하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준다.”

“고마워.”

스텔라는 제 손을 잡고 생긋거리는 소녀에게 당한 기분이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내일 정말 안 올 거야?”

“원래 무도회는 하루 혹은 이틀만 참석할 계획이었어. 알잖아, 사람 북적이는 곳 안 좋아하는 거.”

“알지. 그치만 내일 지정 액세서리가 가면이어서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별로. 가면 쓰면 답답하기만 하지. 화장도 다 뭉개지고.”

“그래도 얼굴을 가리니까 그간 도전해 보지 못했던 스타일의 옷을 입어 볼 수도 있잖아.”

스텔라는 얘가 이런 말을 왜 꺼내나 하는 표정이다가 눈치챈 듯 자세를 달리했다.

“너 혹시…….”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도전해 보려고.”

***

다음 날 밤, 두 번째 무도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귀족들로 가득 찬 연회장 안은 전날과 달리 은은한 밝기의 램프 빛만이 장내를 밝혔다.

지정 액세서리가 가면인 만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끔 하기 위함이었다.

또각또각. 나는 구두 소리를 내며 크리스털홀에 들어섰다.

빙의한 이후 처음 신는 높은 구두. 그 위로 벨라인의 연분홍색 드레스가 살랑거렸다.

히아신스가 파릇파릇 돋아나는 듯한 디자인의 레이스가 붙어 있어서 마치 봄의 요정이 입을 것만 같은 드레스였다.

높은 구두도 어색하지만 더 어색한 건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칼.

나는 내 머리색과 같은 백금발 가발을 착용해 누가 봐도 귀족 영애처럼 보일 수 있도록 꾸몄다.

페르시스의 아들, 메이 플로티나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모습으로.

가면을 써서 얼굴이 가려지기에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를 터였다.

‘스텔라는 오늘은 쉬고 내일 참석한댔지?’

덕분에 입장할 때도 명부에 스텔라 이름을 작성했다.

긴 머리에 드레스 차림인데 메이 플로티나라고 적을 순 없으니까.

전날 스텔라한테 허락받아서 가능했다.

나는 연회장 안을 돌아다니며 제드를 찾아다녔다. 제드라면 분명 춤을 신청하는 영애들을 거절하고 있을 터였다.

음악이 흘러 귀족들은 하나둘씩 짝을 지어 춤을 췄고, 나는 춤추는 귀족들을 피해 가며 바삐 걸었다.

귀족 영애처럼 꾸민 모습을 제드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다. 이제껏, 여자로서 매력을 보여 준 적이 없으니까.

시야 끝에 제드가 등장하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예상대로 제드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남자주인공이라 특유의 아우라가 보여서 가면을 썼음에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 영애들 사이를 비집고 그의 앞에 섰다.

제드는 오늘도 근사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제드만 근사한 게 아니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블로체 공자님.”

처음엔 내 겉모습만 보고 날 못 알아보나 싶었으나, 목소리를 듣고 알아보는 듯했다. 내 부름에 제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거릴 때, 내가 그에게 손을 건넸다.

“저와 춤 한 곡 추시겠나요?”

주위의 영애들은 나 또한 그들처럼 거절당하리라 생각한 듯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가 승낙해 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드는 나한테 만큼은 승낙해 주었다.

“그리하도록 하죠, 영애.”

제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영애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철벽남이 이름 모를 영애의 춤 신청을 받아 주다니! 뭐 대충 그런 눈빛이었다.

나와 제드는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서로에게 예의상 인사를 하는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맞다. 나 춤 못 추지……?

빙의 전에야 당연했고, 메이가 된 후에도 춤은 배우지 못했다.

춤을 조금도 못 추면서 다들 춤추길래 대책 없이 춤 신청을 해 버렸다.

이제 어떡하니……. 발 엄청 밟게 생겼네.

음악이 바뀌고, 다들 새롭게 춤을 추자 제드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내 허리를 감쌌다.

그의 미성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어.”

나는 왼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을 뗐다.

“너 보여 주려고 꾸미고 온 거야.”

제드는 내 말을 듣고 미소하며 나를 리드했다.

춤을 못 추는 나는 계속해서 그의 발을 밟았다.

“아프지……? 미안. 정식으로 춤을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나. 같은 곳을 연속으로 밟고 있으니 분명 멍이 들 터였다.

제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로 살게 되면 많은 영식들에게 구애를 받겠어.”

“응?”

“아름다워서.”

다른 누구도 아닌 제드가 한 말이어서 그런지 오그라들기보단 설렜다.

그러나 난 쑥스러워하지 않고 당돌하게 굴었다.

“그렇게 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냐니?”

“내가 다른 남자한테 고백받도록 놔둘 거야?”

“그럴 리가.”

내 허리를 감싼 팔이 그의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고백하기 전에, 내 목소리만 들리도록 만들어 놔야지.”

나는 그의 짙은 스킨십에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마. 이미 남들 목소리는 안 들린 지 오래야.”

알잖아? 나, 너 좋아하는 거.

춤의 흐름은 어느새 내가 이끌게 되었다.

제드는 멍청히 눈만 깜빡거리다가 살풋 웃었다.

“적극적이네.”

“적극적이지 않으면 묻힐 거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나야말로 너 말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다시 제드가 날 리드하고, 음악은 절정에 달했다. 나는 몸을 그에게 맡긴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절정에 달해 빨라진 템포와 달리 심박수는 느려졌다. 호화롭고도 사치스러운 이 무도회에 나만 붕 떠 있는 느낌.

그럴 만하다. 나는 이제 곧, 플로티나라는 가면을 벗고 귀족도 뭣도 아닌 고아가 될 테니까.

나는 눈을 뜨고,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플로티나 사람이 아니어도?”

“……뭐?”

제드는 나를 리드하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양옆, 앞뒤에서 짝을 이뤄 빙글빙글 도는 귀족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생각을 좀 해 봤어. 네가 갑자기 날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자꾸만 내가 다른 남자에게 한눈팔지 못하도록 한다. 그만큼 날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결혼 상대로 적합해서 그런 거지? 아들 행세를 관두고 플로티나의 하나뿐인 공녀가 되면 적어도 이 스타시아 제국에선 나보다 더 뛰어난 결혼 상대가 없을 테니까.”

곧 음악이 끝나고, 춤을 췄던 귀족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인사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말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지. 나, 건국제가 끝나면 아빠랑 절연할 건데.”

“…….”

“더는 플로티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을 거야.”

제드의 눈이 커지다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만일 내 추측이 틀렸고, 내가 플로티나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날 좋아하는 거라면 저 테라스로 와 줘.”

나는 세 번째 테라스를 가리켰다. 이사벨라가 알려 준 미신이 도는 테라스.

황궁에 자주 드나들었던 제드라면 저 테라스에 어떤 미신이 있는지 알 터.

나는 오늘 밤, 테라스에서 제드의 진심을 확인해 짝사랑을 끝낼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게.”

한층 애처로워진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꼭…… 와 줬으면 좋겠어.”

이번만큼은 내 추리가 완전히 빗나가기를 빌었다.

내가 갑자기 그에게 스며든 것처럼, 그도 그렇기를.

예를 갖춰 인사한 후 테라스 쪽으로 향하자 제드는 그 자리에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테라스로 나온 나는 답답해서 가면을 벗었다. 얼굴에 닿는 밤바람이 차가울 정도로 시원했다.

나는 불투명 유리로 된 문 너머 무도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미신이 도는 곳이니 제드 외의 사람이 들어오진 않을 것이다.

제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난간을 잡고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제드를 연상케 하는 밤하늘의 검은색과 짙은 보라색의 조합이 몽환적이어서 아름다웠다.

밤하늘을 감상하던 나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추리가 맞는 것 같아서.

제드는 내가 페르시스의 딸이 될 걸 기대하고 내게 잘해 준 걸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날 좋아한다고 할 리 없으니까.

아마도 제드는 테라스에 오지 않겠지.

차라리 안 오는 게 낫다. 굳이 와서 확인 사살을 시키는 건 바라지 않는다. 안 와도…… 그것만으로도 짝사랑을 끝내기엔 충분하니까.

그런데도 나는 테라스에서 제드를 30분이나 기다렸다. 내 추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아주 작은 희망에 밤바람을 맞고, 또 맞았다.

슬슬 기다리는 게 지쳐 이만 집에 돌아갈까, 싶을 때쯤이었다.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유리문이 열리더니 제드가 테라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뒤돌아서 그를 마주 보았고, 그는 가면을 벗은 내 얼굴을 보더니 수 초간 넋을 놓았다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와 줬네.”

제드가 와도 어쩐지 기쁘지 않다. 내 이성은 확신했다.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러 온 거지?”

내가 플로티나든 아니든 상관없이 좋아해서 온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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