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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4)화 (84/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4화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뭔가 할 얘기가 있었던 거겠지만 황녀의 부탁도 무시할 수는 없다. 메이는 스텔라에게 양해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럴까요?”

스텔라는 퍽 아니꼬웠으나 메이를 난처하게 만들긴 싫어서 결국 한숨을 쉬며 그리하라고 고개를 끄덕했다.

“고마워, 스텔라. 둘이서 놀아요, 황녀님.”

“꺄항-!”

황녀는 신나서 콩콩 뛰었다.

“2층으로 가요!”

메이는 황녀를 따라서 계단을 올랐다.

크리스털홀 2층은 복도식 구조로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그 덕에 난간을 잡고 내려다보면 1층이 훤히 다 보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대화를 나눴다.

“공자님은 요새 뭐 하고 지내셨어요? 저는 큰오빠랑 작은오빠랑 술래잡기 하면서 지냈어요.”

디아고, 자기 동생한텐 잘해 주는구나.

메이는 그가 자신의 머리에 위스키를 쏟아부었던 걸 떠올리며, 이쯤 되면 그가 이중인격인 게 아닐까 싶었다.

“저도 잘 지냈어요. 최근엔 마음 놓고 푹 쉬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수호 기사도 됐고, 나제트 공자도 구출했거든요.”

“들었어요. 아카대회에서 3등 하셨잖아요! 그래서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어요.”

“선물이요?”

이사벨라는 호위기사한테서 미리 맡겨 놨던 작은 상자를 받아 메이에게 건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까만색 벨벳 상자였다.

“열어보세요.”

상자를 여니 까만 쿠션 위에 해바라기 모양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노란 잎 하나하나 다 반짝거리는 레몬쿼츠였다.

“켈레샤 제국에서 유명한 브로치 장인이 만든 브로치예요. 제가 직접 디자인한 거라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인 브로치예요.”

“황녀님께서 직접 디자인하셨다고요?”

“네. 잘 보시면 제 이름과 공자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자세히 보니 브로치 중앙에 ‘이사벨라’와 ‘메이’가 쓰여 있었다. 중간에 그려진 하트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때요? 예쁘죠?”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건국제 마침 마지막 날 무도회 지정 액세서리가 브로치니까 그날 이 브로치를 하고 와 주세요.”

“네. 꼭 하고 올게요.”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황녀는 메이에게 이곳 크리스털홀에 전해 내려오는 미신을 알려 주었다.

이사벨라가 난간 사이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난간 위로 손을 뻗을 수 없는 건, 그녀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세 번째 테라스 보이죠?”

메이는 이사벨라의 작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총 6개의 테라스 중 오른쪽에서부터 세 번째 테라스였다.

“저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들어가서 뽀뽀하면 사랑이 이뤄진대요.”

뽀뽀라니. 이사벨라의 입에서 나오자 그 단어가 귀엽게 느껴졌다.

“반대로 단둘이 들어갔다가 뽀뽀를 못 하고 나오면 그 둘은 절대로 사랑을 이룰 수 없다고도 해요.”

이를 들은 메이는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짝사랑을 끝낼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그 결과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메이는 1층에 있는 제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외모가 남들에 비해 눈에 띄어서 큰 연회장 속에서도 잘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를 보며 결심했다.

‘……시도해 보자.’

미신을 통해 제드의 마음을 확인하고 짝사랑을 끝낼 것이다.

그런 각오를 다질 때쯤, 이사벨라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요, 공자님. 혹시 우리 오빠가 또 잘못을 저질렀나요? 오빠가 계속 공자님을 쳐다보는 것 같은데.”

“네……?”

오직 제드에게만 꽂혀 있던 시선을 옆으로 옮기니 디아고와 눈이 마주쳤다.

디아고는 바로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안 본 척 제드와 무어라 떠들어 댔다.

“저렇게 쳐다보는 거, 미안할 때 그러는 거거든요.”

이사벨라는 디아고와 가족이기에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오빠가 말을 심하게 할 때가 있는데, 제가 삐져서 아무 말도 안 하면 저렇게 빤히 쳐다보다가 끝내 사과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저번에 공자님께 화를 냈던 게 미안했나 봐요.”

‘글쎄. 과연 그럴까.’

메이는 디아고가 적어도 자신한테만큼은 미안함을 느끼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면, 애초에 괴롭힐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이사벨라의 말이 맞다면 그건 더 싫었다.

실컷 괴롭혀 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양심도 없지. 자기한테 미안해할 자격이 어디 있다고.

***

클로빈은 클라라의 손목을 끌고 무도회장 밖으로 나왔다. 밖은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놔!”

클라라는 클로빈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큰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오빠는 거기서 스텔라 나제트를 위로해 주면 어떡해? 시비는 그쪽에서 먼저 걸었잖아!! 오빠 때문에 내가 말싸움에서 졌어. 알아?”

어찌나 큰지 근처에서 꾸벅꾸벅 졸며 보초를 서던 기사의 잠이 확 달아날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사과한 덕분에 소란스럽지 않게 넘어간 건 맞잖아.”

“오빠가 내 편을 잘만 들어 줬어도 우리가 사과할 일은 없었어.”

클라라는 분해서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었다.

“스텔라 나제트도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클라라가 손톱을 바짝 깨물어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피 따윈 안중에도 없는지 복수할 생각에 실실 웃었다.

“그 여잔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나한테 밀로 나제트가 있는데.”

클라라는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자주 때리는 노예가 하인드의 잃어버린 아들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때렸고,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오히려 나중에 원하는 게 생기면 아들로 협박이나 할까 고민했다.

물론 그 밀로가 언제든 없애 버리면 그만인 분신이라는 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클라라가 무언가 결심해 입에서 손을 뗐다. 피가 손등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그래, 스텔라 나제트부터 날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클라라는 손수건에 피를 대충 닦아 버리고 다시 무도회장에 들어갔다.

그녀가 찾는 스텔라 나제트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남자들은 스텔라 주위에서 치근덕거렸다.

“나제트 영애, 이번 주말에 제가 소유한 공원에 오시지 않겠습니까?”

“영애님, 수도는 오랜만이시죠? 제가 이 근처 맛집을 잘 알고 있어서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 시간 되시나요?”

“제겐 요즘 인기 많아서 구하기 어렵다는 연극표가 있습니다. 저와 보러 가시죠.”

스텔라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샴페인만 음미했다.

클라라는 스텔라를 발견하곤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스텔라 주위를 둘러싼 남자들을 밀어내며 그녀 앞에 섰다. 순식간에 클라라를 마주한 스텔라의 얼굴이 굳었다.

“나제트 영애님. 저와 대화 좀 하실까요?”

아, 귀찮은 게 왔네. 스텔라는 클라라의 면상을 본 것만으로도 불쾌해졌다.

“여기서 하세요.”

“제게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안 될 텐데요?”

클라라가 스텔라 귀에 가까이 대고 협박했다.

“당신의 동생이 제 노예로 저희 펜소가에 있거든요.”

“…….”

“영애님께서 제 심기를 건드리시니까 어차피 노예인 거, 그냥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자 스텔라가 다 마셔서 빈 샴페인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클라라를 응시했다.

“왜요, 안 믿기시나요? 꼭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으시려나요?”

안 믿는 게 아니다. 메이한테 들어서 안다.

스텔라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펜소가에 있는 밀로가 진짜가 아닌 분신이라는 것도 알고.’

스텔라도 클라라의 귀에 대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주위 남자들이 다 들릴 정도로 컸다.

“짜증 나니까 꺼져.”

이를 들은 남자들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천사 같은 얼굴에서 저런 험한 말이 나오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기엔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짜증 나니까 꺼져.

짜증 나니까 꺼져. 이 말이 자꾸만.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하나둘씩 자리를 비켰다.

“그, 그러고 보니 그 공원 쿠투스 가문에 인수됐었지?”

“생각해 보니까 제가 알던 맛집들이 전부 폐업한 것 같네요. 하하…….”

“사실 저도 오는 길에 깡패한테 표를 뜯겨서…….”

클라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 앞의 여자가 미쳤나 싶었다.

“지금 제정신이세요……?”

“아니? 취했어. 보면 모르니?”

스텔라는 웨이터에게서 새 샴페인 잔을 받아 마셨다.

“이 무슨 무례한……!”

“가, 가자, 클라라.”

그때였다. 스텔라에게 삿대질하며 황당함을 표현하던 클라라는, 어느새 다시 자기를 따라온 클로빈의 의해 끌려갔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하얗게 질려 있어 보였다.

“오빠, 저 여자 미친 거야? 아무리 펜소가가 나제트가보단 못하다 해도 이런 취급을 받으면 안 되는 거잖아.”

“모, 몰라. 갑자기 나제트 영애님이 무서워졌으니까 다른 곳으로 가자.”

클로빈이 생각했던 스텔라의 이미지는 청순하고,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요조숙녀 이미지였기에 그녀의 본모습을 본 그는 충격과 공포뿐이었다.

“아니, 무서워하면 어떡해……!”

그녀를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직감한 클로빈은 동생의 말을 무시하곤 어서 그녀를 끌고 갔다.

“이제야 혼자 있게 됐네.”

스텔라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보며 만족스럽게 샴페인을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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