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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3)화 (83/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3화

펜소가가 노예를 많이 사들인다는 건 대부분의 귀족들이 알지만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룰이 있었다.

그것은 펜소가의 체면을 무너뜨리는 일이었고, 재력 있는 펜소가를 일부러 등지고 싶어 하는 가문은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 메이가 꺼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클라라는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이내 또박또박 대꾸했다.

“질문부터 틀렸군요. 저희 펜소가가 노예를 많이 사들인다는 증거, 있습니까?”

“대답하기 힘드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그 정도의 배려는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요.”

메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자 클라라는 기가 차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증거가 있냐고 물었잖습니까!”

클라라가 소리치는 그때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보라색 눈을 가진 아리따운 여인이 우아하게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어머, 시끄러워라. 어디서 이런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는 거죠?”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분홍빛이 감도는 백금발과 잘 어우러지는 진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스텔라 나제트.

스텔라는 메이에게 다가오다가 실수인 척 클라라의 발을 밟았다. 날카로운 구두 굽으로 콱! 발등을 찍으니 클라라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악-!!”

아파서 괴성을 지르는 건 덤이었다.

스텔라는 그 괴성에 뒤를 돌아 어머머 하며 완전히 실수인 척 가식적으로 사과를 건넸다.

“펜소 영애, 제가 발을 밟았나요? 미안해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나 봐요.”

개소리만 들리길래 개가 있거니 했지, 설마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겠니?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도 잠시, 클라라는 삐져나온 눈물을 새끼손가락으로 고상하게 닦아 냈다.

그리고 ‘이게 미쳤나? 감히 내 발을 밟아?’ 하고 눈을 부라렸다.

당하고만 있을 클라라가 아니었다.

클라라는 대놓고 스텔라의 발을 밟았다. 위치상 어쩔 수 없이 뒷굽이 아닌 앞굽으로 밟았지만 세게 쿵! 내리쳤으니 자신만큼 아프리라.

“윽…….”

스텔라가 짧게 신음을 내뱉자 클라라는 조소하며 사과를 건넸다.

“어머나. 죄송합니다, 영애님. 저도 실수였어요.”

그러나 당하고만 있진 않는 건 스텔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클라라가 이렇게 똑같이 나오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내 서글픈 표정을 짓더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클라라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야? 왜 이래? 설마 여기서 울려고? 하는 표정이었다.

“흐윽…….”

빙고. 스텔라는 눈물을 뚝뚝 흘려내기 시작했다.

***

“저기 좀 봐요. 나제트 영애님이 울고 계셔요.”

“펜소 영애님과 싸움이라도 난 걸까요?”

스텔라는 될 수 있는 한 불쌍해 보이도록 몸을 떨며 울었다. 메이는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곤 바로 그녀가 그리는 희극에 응했다.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는 듯이, 메이는 클라라를 질책했다.

“펜소 영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애님 발을 일부러 밟으면 어떡합니까. 나제트 영애님께서 실수로 밟아서 사과까지 하셨는데 꼭 그래야만 했습니까?”

“아니, 나제트 영애님께서 먼저 일부러 밟으셨잖아요.”

앙칼진 클라라의 톤과는 다르게, 스텔라는 서럽게 목소리를 냈다.

“실수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영애의 발을 일부러 밟을 이유가 뭐가 있나요.”

메이는 스텔라의 붉어진 발등을 보며 걱정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메이가 근심 어린 낯으로 손을 내밀자 스텔라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곤 살포시 잡았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울먹이는 목소리까지 완벽하다. 메이는 스텔라 곁에 있으니 연기력이 상승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눈물 나는 연기에 여론은 클라라가 나쁘다로 흘러갔다.

“세실 부인, 펜소 영애가 나제트 영애님의 발을 일부러 밟았대요.”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귀족으로서의 품위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군요.”

2대 1의 싸움. 불리함을 느낀 클라라가 팔꿈치로 곁에 있던 클로빈의 허리를 툭툭 쳤다.

“오빠, 내가 당하고 있는데 안 도와주고 뭐 하는 거야? 빨리 내 편을 들어.”

그러나 클로빈은 그의 동생이 아닌, 울고 있는 스텔라를 걱정했다. 그는 스텔라에게 다가가 세상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서 있기 힘드시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스텔라는 붙잡고 있는 메이의 손을 살포시 내보이며 도움을 거절했다.

이를 본 클라라는 짜증 나서 폭발할 지경이었다. 저 도움 안 되는 오빠 새끼!

클로빈은 클라라를 대신하여 사과했다.

“제 동생도 나쁜 마음으로 발을 밟은 건 아닐 겁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 테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스텔라는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메이에게만 들리게 쯧, 혀를 찼다.

졸지에 클로빈은 스텔라를 위하는 척하면서 동생의 잘못도 사과하고, 스스로는 동생의 허물을 감싸 주는 착한 오라버니가 되었다.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스텔라가 속 좁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스텔라는 하는 수 없이 용서했다.

“알겠어요. 사과를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영애님.”

클라라는 우리가 뭘 사과하냐며 따지려 들었으나 클로빈이 쪽팔린다며 얼른 무도회장 밖으로 데리고 나간 덕분에 하지 못했다.

펜소가 남매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메이와 스텔라에게 관심을 끄고 각자 볼일을 봤다.

스텔라는 언제 울었냐는 듯 무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메이는 그녀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칭찬했다.

“넌 정말 연기 잘하는 것 같아.”

우는 연기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일품이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배우로 데뷔하면 넌 톱 배우가 될 거야.”

“그래? 다음 생엔 배우를 해야겠네.”

스텔라는 연기력에 대한 칭찬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메이는 스텔라를 만나면 해 주려고 했던 얘기를 꺼냈다.

“스텔라.”

“응?”

“밀로, 찾았어.”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밀로가 분신을 만들어 펜소가에서 다른 노예들을 대신하여 맞은 것.

수호신들에게 마력을 빌려 글리우곤을 쓰러트리고 밀로를 구한 것.

밀로가 몸을 회복한 후에 집으로 돌아갈 거란 것과 이번 건국제에서 펜소가를 몰락시킬 계획이란 것까지 전부 얘기했다.

“거의 다 나아서 3일 내로 집에 돌아갈 거야.”

“다행이네…….”

스텔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심으로 다행스러워했다. 그녀는 밀로를 만나 행복해질 하인드를 생각하니 기쁘기도 했다.

“고마워, 메이. 밀로를 구해 줘서.”

“아이리스 님께서 마력을 일찍 부여해 주신 덕분이지.”

그때, 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

그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니 메이의 시야에 멀끔히 차려입은 제드가 들어왔다.

“……제드.”

거리를 두고 지켜보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가 멋있어서 괜히 마음이 흔들렸다.

메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스텔라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곤 제드가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메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스텔라?”

돌발행동에 메이가 스텔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우리 저쪽으로 갈까? 저쪽에 있는 샴페인이 맛있어 보이네.”

“나 아직 미성년자라 술 마시면 안 되는데…….”

“그럼 오렌지 주스나 마시든가.”

“???”

스텔라는 어리둥절해하는 메이를 강제로 끌고 갔다.

“스텔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힘이 쎈 스텔라를 이길 수 없어서 메이는 그대로 끌려가 주었다. 그녀는 메이를 데리고 가며 제드를 째려보았다.

‘네까짓 게 감히 우리 메이를 갖고 놀아? 우리 메이 힘들게 하면 가만 안 둬. 이 오징어야!’

그런 눈빛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제드는 그저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그는 서두를 게 없었다. 어차피 메이는 다시 자신에게 올 테니까.

그렇게 메이를 데려간 곳엔 우연히도 황녀 이사벨라가 있었다.

이사벨라는 메이를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꺄항- 공자님!”

메이는 스텔라의 손목에서 벗어나 황녀에게 인사했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공자님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스텔라는 뚱한 표정으로 메이와 이사벨라를 번갈아 보았다.

‘뭐야, 둘이 친한 사이였어? 언제 친해진 거래? 나한테 따로 얘기해 준 적 없는데…….’

스텔라는 섭섭한 마음을 숨기며 황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타시아에 축복이 있기를.”

“누구……?”

“저는 나제트 후작의 여식, 스텔라 나제트라고 합니다.”

이사벨라는 스텔라를 라이벌 보듯 경계하며 메이의 손을 잡았다. 메이가 스텔라와 붙어 있는 게 싫어서 자기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선포했다.

“공자님은 내 거야.”

어쭈? 스텔라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그녀는 메이의 반대쪽 손을 잡았다.

“그럴 리가요. 제가 황녀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는걸요?”

그들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몇 년 알고 지낸 사람보다 하루 알고 지낸 사람이 더 좋을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죠.”

이사벨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사벨라는 황녀이기에 그간 자신에게 져 주는 사람들만 봐 왔었다.

그런데 스텔라가 져 주지 않으니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쓰곤 메이의 손을 흔들었다.

“공자님, 저랑 둘이서만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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