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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2)화 (82/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2화

페르시스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기억이 중간중간 끊긴 듯 이상하다. 요 며칠 새 악몽을 꿔서 그런가.

메이를 입양한 후 꾸지 않던 악몽. 비체가 자신을 버리는 꿈.

5년 만에 다시 꾸게 되어 밤잠을 설쳤다.

그게 이틀이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반복되는데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내가 왜 황궁으로 가고 있지?’

일 때문이었나? 하지만 자신은 최근에 황궁에 갈 만한 일을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집사가 그에게 무어라 전달했었다. 분명 메이에 관해서였고, 그를 들은 뒤에 자신은 마차에 올랐다.

아, 그렇구나. 메이가 데려오라고 했나 보다. 역시 플로티나가가 아닌 곳에서 지내기엔 불편했겠지.

그 아이를 데려갈 생각을 하니 생기 없는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참에 외박은 하지 말라고 일러둬야겠군. 세상엔 흉흉한 일들이 많으니…….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는 또 깜빡 정신을 빠뜨리고 말았다.

눈을 감았다 뜨니 황제의 알현실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황제의 호탕한 웃음이 알현실 안에 울려 퍼졌다.

“하하하- 공도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가 있나 보군. 내가 공을 불렀다니. 난 그런 적이 없어.”

“하지만…….”

“플로티나 공자가 글리우곤을 무찔러 그에 대한 수배금을 전달하긴 했었지. 액수를 보고 놀라서 찾아왔나?”

“그럴 리가…….”

갑작스러운 소식에 머리가 어지러운데 황제의 옆에 있던 황녀, 이사벨라가 꺄르르 웃어 댔다.

“플로티나 공자님 너무 멋져요! 저번에 황궁 왔을 때 슬쩍 물어봤는데 그 돈 다 안 쓰고 각하께 드릴 거래요.”

“……나한테?”

그 아인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 왜 집사는 자신에게 이 소식을 알려 주지 않았는가.

……아니다. 집사는 알려 줬었다.

‘방금 황실에서 보낸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도련님께서 글리우곤을 잡아서 수배금을 보냈다고 합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 오늘 아침, 집사가 황실에서 수배금을 보냈다는 걸 전달했었다.

황제는 요 며칠 새 달라진 안색의 페르시스를 걱정했다.

“안색도 안 좋아 보이는군, 공. 너무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쉬도록 해. 내일 시작될 건국제에 빠져도 이해해 줄 테니까.”

내일부터 건국제가 시작된다는 것도 페르시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신이 온전치 않다. 메이가 떠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 이후로 줄곧.

***

페르시스의 피폐한 기운은 플로아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플로아 또한 페르시스만큼은 아니어도 제대로 숙면하지 못했다.

페르시스가 메이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며 이제야 좀 화목한 가족이 되나 싶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생일 때까지 집에 오지 않겠다는 걸 보니 역시…… 떠날 생각인 거겠지.

5년간의 남장과 아빠와의 소통 단절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그녀의 앞길을 막을 수가 없다.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본 지 오래돼서일까. 기운이 나지 않는다. 떠나도록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기 전, 파사베아의 실종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

다시는 그런 폐인으로 살기 싫으니까.

그런 내면의 갈등에서 플로아는 숙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수호신 회의에 참석하고서도 집중할 수 없었다. 회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상념에 잠겼다.

모두들 회의가 끝나서 나가고, 아이리스와 카시우스, 플로아 셋만 남았을 때 카시우스가 큰 목소리로 그를 불러 깨웠다.

“플로아!”

네 번째 부름에서야 플로아는 정신을 차렸다.

플로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회의는?”

“이미 끝났어.”

“벌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회의에 집중을 못 한 거야?”

“…….”

플로아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대답하길 망설였으나 이내 털어놨다.

“메이님께서 떠나실 것 같아서.”

플로아는 요 근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페르시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자식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메이가 받아 주지 않아 힘들다는 심정도.

그러나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에게서 돌아온 건 위로가 아니었다.

“예상은 했는데…… 역시 그거였구나.”

카시우스가 회의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대했다.

“어쩔 수 없지. 예정된 일이었잖아.”

“뭐……?”

“이런 일이 없게끔 초반에 노력하지 그랬어. 딸을 아들로 키우게 해선 안 된다든가, 자식을 입양했으면 대화를 해야 한다든가. 플로티나 공작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끔 초반에 계속 말했어야지. 그게 네 역할이잖아. 플로티나 가문을 지키는 거.”

“…….”

“메이가 떠날 만하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아이리스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들이 틀어지게 된 데엔 네 잘못이 크잖아.”

플로아는 정신이 쇠약해져 무기력함에 그 무엇도 하기 힘들어졌었던 거라며 합리화를 했지만, 결국엔 귀찮다는 이유로 메이를 고생길을 걷게끔 한 것이었다.

“벌 받는 거야, 플로아.”

만삭의 몸으로 무릎까지 꿇던 비체와의 약속을 어긴 죄로.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한 죄로.

“나중에 보자.”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회의실에서 나갔다.

홀로 남겨진 플로아는 뒤통수를 방망이로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벌을 받는 거라니.

이내 그는 반쯤 정신을 잃은 낯이 되었다.

***

드디어 건국제 당일이 되었다. 건국제는 3일간 치러지며, 매일 밤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 무도회는 날마다 지정 액세서리가 정해져 있어 필히 착용하고 가야 했다.

지정 액세서리는 첫째 날은 리본, 둘째 날은 가면, 셋째 날은 브로치였다.

밤이 되어 황궁 연회장 중 가장 큰 크리스털홀에 입장하기 전, 메이는 손목에 묶은 붉은색 리본이 풀리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단단히 묶인 걸 확인한 메이는 무도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주목받았다.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모여 그녀를 힐끗거리며 수군덕거렸다.

“저분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플로티나 공자님 아니신가요?”

“플로티나 공작 각하께 자식이 있었어요?”

“어머, 세실 부인, 모르셨어요? 각하께서 비밀리에 입양아를 들여서 키우셨다잖아요. 이미 몇 달 전부터 세간에 떠돌았던 사실이에요.”

메이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자리를 이동했지만 호기심 많은 귀족들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 주위에 몰려들어 인사 세례를 하니, 메이는 벌써부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메이는 애써 미소를 띠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텔라는 언제 오려나…….’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꺼내 줄 유일한 친구를 찾다가 그만 누군가를 보고선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저 여자는…….”

그녀의 시선 끝엔 더티블론드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언젠가 페르시스 플로티나를 찾아왔던 사악한 여자와 같은 색의 머리칼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오빠와 함께 다른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펜소 영애.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호호호, 제가 아름답긴 하죠.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은 덕분이에요.”

“백작님께서 인물이 있으시긴 하죠. 펜소 공자도 못 본 새 더 멋있어지셨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메이는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눈 깜짝할 사이, 더티블론드 머리의 여자 앞에 당도했다.

여자는 넌 뭐야? 라는 눈빛으로 메이를 쳐다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이는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원작 메이를 때려죽인 그 쓰레기란 걸 알아서.

“클라라 펜소 영애.”

메이는 클라라에게 비소를 보였다. 모든 불행의 시초가 제 앞에 있는 사납게 생긴 여자였으나 주눅 들면 안 된다. 오히려 당당하게 굴어야 한다.

“저는 메이 플로티나라고 합니다.”

너한테 맞다가 죽지 않으려고 이만큼이나 성장했다는 걸 보여 줄 기회였으니까.

메이의 이름을 들은 클라라는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클라라는 클로빈에게서 메이가 그를 무시했다는 소리를 들은 상태였다.

‘우리 오빠를 개무시한 사람이 내게 먼저 인사를 건다라.’

친오빠인 클로빈을 무시한 건 곧 펜소가를 무시한 것이고, 이는 결국 자신을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가만 안 둬.’

“소문으로만 듣던 플로티나 공자님이시군요? 각하께서 입양하셨다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물어봐도 될까요?”

“떳떳하게 물을 수 있는 거면, 하시죠.”

“제가 입양된 경험이 없어서 그런데, 입양되면 어떤 기분인가요? 그것도 플로티나의 핏줄도 아니면서 플로티나에 입양된 기분이요.”

제3자가 듣기에도 무례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하지만 클라라의 고약한 성격을 알기에 직접 나서서 그녀를 말리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메이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밝게 대답했다.

“영애님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아주 기쁘죠. 무려 플로티나인데.”

이내 메이는 표정을 싹 지웠다.

“이번엔 제가 물을게요. 저도 궁금한 게 있거든요.”

“공자님도 떳떳하게 물을 수 있는 거면, 하세요.”

클라라는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았다.

“노예를 많이 사들이는 가문의 영애로 지내는 건 어떤 기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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