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1화
날이 저물어 갈 때쯤 일행은 황궁에 도착했다.
디아고는 밀로가 잠시간 사용할 게스트 룸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의원을 불러 밀로를 치료시켰다.
디아고가 밀로에게 말했다.
“귀한 약초를 사용하니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아카 대회 2라운드에서 디아고가 팔을 다쳤을 때 닷새 만에 흉터 없이 회복하게 해 준 그 약초다.
의원은 상처 부위에 으깬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두르거나 거즈를 붙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황자님.”
“그대의 아버지가 우리 형의 목숨을 구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응당 해야지.”
밀로가 치료할 동안 나와 제드는 복도에 나와 있었다. 둘만 있으려니 어쩐지 어색했지만 제드가 말을 걸어 준 덕에 어색함은 바로 사라졌다.
“메이,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딘데?”
“따라와.”
제드는 복도를 걷더니 어느 게스트룸으로 나를 데려갔다. 제드가 방문을 친히 열어 주었지만 나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무 데나 막 들어가도 돼?”
“여긴 괜찮아.”
방 안으로 들어간 그는 나를 테라스로 인도했다.
“이쪽으로.”
그의 안내에 따라 테라스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밖을 내다본 순간 내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우와…….”
분홍빛으로 젖어 든 하늘 아래, 유니콘 조각상과 큰 호수가 보인다. 그 주위로 흰 서리가 차곡차곡 내려앉은 것만 같은 이팝나무가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게스트룸 중엔 여기가 가장 경치가 좋아.”
“마치 휴양지에 온 것 같아……. 평화롭고 아름다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안 거야?”
“어렸을 때 황궁에 자주 왔었거든. 그래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맞아, 제드는 어려서부터 디아고와 친했으니 황궁에 자주 들렀겠구나.
나와 제드는 나란히 난간을 잡고 서서 경치를 구경했다. 내가 팔을 쭉 뻗어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 이팝나무 맞지? 이팝나무에 피는 흰 꽃은 봄에만 피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보존마법으로 꽃을 유지하는 걸까?”
“응. 마법으로 사시사철 꽃이 핀 상태로 보존되고 있어.”
“제드, 이팝나무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영원한 사랑.”
“어? 알고 있네?”
유명한 식물의 꽃말이 아닌지라 모를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꽃말이야.”
영원한 사랑.
제드가 천천히 덧붙였다.
“영원히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분홍빛 노을이 제드의 차가운 색감을 녹였다. 마치 따뜻한 사람인 것처럼, 포근한 사람인 것처럼. 겨우 노을 하나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내게 닿은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애틋해 숨도 쉬어지지 않을 무렵.
제드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나도 너만 바라볼 테니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겉은 수줍은 많은 소녀처럼 떨려 왔지만, 숱한 짝사랑의 경험일까. 생각보다 내 속은 의외로 침착했다.
여자의 직감으로 알 수 있다. 그는 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 또 진심이 아닌 말을 하는 건데?
내 마음을 얻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할 리 없으니까.
어쩌면 또 디아고를 위해 내 마음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제드에게 담담한 어조로 경고했다.
“너, 조심해야 해. 이러면 네가 날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제드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이 와중에도 웃는 모습은 예뻤다.
“웃지 마……. 진짜란 말이야.”
“알겠어. 안 웃을게.”
웃음을 멈춘 제드는 난간에 팔을 얹었다. 그가 다시 테라스 경치를 보는 동안 나는 다짐했다.
제드의 진심을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그와 거리를 두기로.
그가 내 마음을 어떠한 이유로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곧이곧대로 믿었다가는 후에 크게 상처받을 테니 말이다.
조금이나마 덜 상처받고자, 나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로 다짐했다.
***
치료를 마친 밀로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밀로는 디아고와 대화를 하다가 한 가지 알아냈다. 디아고는 제드와는 다르게 메이를 남자라고 생각한다는 것.
‘정신계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공녀님을 공자님으로 불러야겠구나.’
밀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정신계 마법이 걸려 있다지만, 공녀님의 미모를 보고도 남자라는 생각이 드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공녀님처럼 아름다운 분도 없는데.
밀로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메이와 제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는 곧장 밀로에게 다가왔다.
“밀로, 새 옷 입으니까 귀공자 같은데? 잘 어울려.”
“공자님께서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밀로는 입꼬리를 올리며 기분 좋은 티를 팍팍 냈다. 차가운 인상이지만 미소할 땐 이보다 따뜻할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디아고가 입을 열었다.
“나제트 공자는 몸을 회복할 때까지 여기서 머물기로 했다.”
그 말에 메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한시라도 빨리 후작님께 가는 게 낫지 않아?”
“다친 몸을 아버지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밀로의 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종되어 몇 년 동안이나 만날 수 없었던 아들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 걸 보고 눈물을 그치지 못할 하인드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밀로는 배려심이 깊네.”
디아고가 장담했다.
“귀한 약초를 썼으니 보름 정도면 상처가 완전히 다 나을 거다.”
보름이라.
“한창 건국제를 진행할 때군요.”
디아고의 의도를 눈치챘다는 듯, 제드가 말했다.
“맞아. 건국제 때 펜소가를 몰락시키려고 해.”
밀로도 찾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게 없었다.
디아고가 다리를 꼬고선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도회를 장식하기 위해 열심히 물건을 옮기는 하인들이 보였다.
“이번 건국제에서는 펜소가의 처형식이 치러지겠군.”
***
플로티나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건, 메이가 밀로를 구한 바로 그날, 그녀가 나인 시종을 통해 편지 한 통을 플로티나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제 생일이 올 때까지는 나인에서 지낼게요. 정식 수호 기사가 돼서 할 일이 많아서요.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해 주세요.]
보고 싶은 자식을 대신해 온 편지는 페르시스에게 절망을 가져다주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치솟는 침울함을 이겨 낼 수 없어 이맛살을 구기니 곁에 있던 집사는 놀란 듯 쳐다보았다.
무감정하던 제 주인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십여 년만이었다. 그가 사랑하던 여인을 잃었을 때,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페르시스는 이러다 정말로 요한이 했던 말처럼 메이가 제 곁을 떠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외박은 허락하지 않겠다며 데려오고 싶었으나 그보다 더 큰 마음은, 실망하는 자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데려올 수 없다. 그래, 뭐. 생일까지 몇 주 안 남았으니까. 생일날 그 아이를 기쁘게 할 계획을 세우곤 준비하고 있으면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려고 해도 침울한 감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아인 이제 곧 성인이고, 번듯한 직장도 얻었고, 부모와 그다지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정말로 떠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서.
두통이 찾아와 혼자 있고 싶어진 페르시스는 집사도, 요한도 밖으로 내보내곤 침대에 몸을 맡겼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눈이 부셔 큼지막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두통이 올 때면, 그 여자도 같이 떠오른다. 예민해진 정신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꼭꼭 숨겨놨던 기억을 굳이 건드려 펼쳐본다.
……언젠가 그는 저를 두고 떠나려는 비체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고 협박했었다. 나를 이대로 두고 간다면 죽어 버리겠다고.
말뿐인 협박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죽을 생각이었다. 그 당시 비체는 그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바보같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동생의 아들을 친자식으로 들이는 게 흔치 않은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때까진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입양된 파스칼은 자신의 형이었고, 아버지는 차별 없이 두 명의 자식 고루 사랑해 줬었으니.
파스칼이 가주 자리를 탐내 아버지를 죽일 거란 건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파스칼을 죽이게 될 거란 것도.
페르시스는 파스칼을 죽인 후에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심각한 살인 후유증을 겪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온종일 자살 충동만 들었다.
그때 비체가 나타나 페르시스의 곁을 지키며 보살펴 주었다.
끈질기게 사랑을 갈구하던 엘리사 유리에트의 만행들로 인해 여자라면 질색했으나 어쩐지 그녀에게만큼은 기대고 싶었다.
‘당신이 죽인 게 아니에요. 신께서 당신의 손을 빌린 것뿐, 그 사람은 마땅한 벌을 받은 거랍니다.’
비체는 페르시스가 불안에 떨 때면 그리 말해 줬었다. 플로티나의 모든 이가 불행해졌음에도 페르시스의 탓이 아니라고 해 줬다.
그 덕에 페르시스는 생기를 되찾았다.
비체는 그의 구원자였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전부였다.
그녀가 없는 삶은 생각해 본 적 없었고, 그렇기에 청혼했으나.
‘미안해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끝내 거절했다.
속박되는 삶은 싫다는 둥 그가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그의 곁을 떠나고자 했다.
그의 유일한 구원자인데, 곁에서 평생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 페르시스를 미치게 만들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날 이대로 두고 가면 죽어 버리겠어.’
‘내가 죽는 게 좋으면 가든가.’
그랬더니 그녀가 무어라 했던가. 그 맑고 푸른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 눈을 마주하는 페르시스마저 쓰라리게 만들 애절한 목소리로.
‘죽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죽으면…… 제가 너무 슬플 거예요.’
‘죽지 말아요.’
그러고는 떠나 버렸다.
자신의 곁을 떠나면서,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