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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0)화 (80/127)

공작가 아들로 키워진 딸입니다

80화

간발의 차이로 제드는 절벽에 도착했다. 그는 어쩌면 밀로와 함께 있을지도 모를 메이를 찾고 있었다.

“메이! 어딨어!”

수호 기사들에게 물었을 때 분명 이쪽으로 갔다고 했었으니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이 위로는 더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말이다.

“메이!”

그 부름에 답이라도 하듯 풍덩―! 물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제드는 절벽 끝으로 달려가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제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단둘이 있지 않았으면 했던 메이와 밀로가 마력으로 만든 뗏목을 타고 함께 강물 위를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으니까.

***

무사히 강물 위에 착지한 우리는 기뻐하는 것도 잠시, 어색함이 찾아왔다.

생각해 보니까 멋대로 이름을 불렀네. 밀로는 나한테 존칭을 쓰는데.

“그…… 멋대로 이름 불러서 미안해. 앞으로는 나제트 공자라고 할게.”

내 말에 밀로가 시무룩해졌다.

“어째서입니까? 저는 이름으로 불러 주시는 게 좋은데…….”

그 뜻밖의 반응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 그래? 그럼 평소엔 이름으로 부를게.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에선 나제트 공자라고 부르고.”

“나제트 공자라고 부르시면 거리감이 느껴져서 싫습니다. 어디서든 상관없으니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밀로는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듯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부드러운 눈빛에 홀려 든다.

제드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는 딱히 부드럽진 않았지만.

“밀로, 라고 해 주세요.”

밀로가 건강한 상태였으면 퍽 유혹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내 눈엔 안쓰러운 환자의 작은 부탁일 뿐이었다.

“그래, 밀로.”

밀로는 만족했는지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펜소가에 있는 분신을 제외하면 저는 공녀님을 세 번째 뵙는 거예요.”

“세 번째?”

나는 우리가 언제 만났을지 기억을 거슬러 봤다.

“첫 번째 만남은 르라트 해변에서, 맞지?”

밀로의 표정이 급작스럽게 환해졌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당연하지. 나한테 소라도 줬었잖아. 집에 잘 보관하고 있어.”

“그때부터 쭉 보고 싶었습니다.”

“응?”

“그래서 우연히 뵀을 땐 그보다 기쁠 수 없었죠.”

원래는 복수를 마친 후 그리워하던 사람들을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며, 하지만 어느 날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참지 못하고 분신을 만들어 나제트가에 찾아갔었다고 알려 주었다.

눈에 띄는 은발을 숨기기 위해 가발을 쓰고 하인인 척 나제트가에 잠입해 몰래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어릴 때의 기억보다 핼쑥해진 아버지는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울고 계셨어요.”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죠. 제가 아닌 글리우곤의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곁에 있고 싶어서 며칠간 몰래 나제트가에서 지냈습니다. 스텔라 양의 존재도 그때 알게 되었어요.”

그보다 열흘 더 빨리 태어난 양누나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스텔라 양이 조금 질투가 났지만 반대로 스텔라 양이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스텔라 양 덕분에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슬픔을 덜어 낼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스텔라 양 덕분에 공녀님을 다시 뵙게 되었고요.”

그날은 내가 스텔라를 만나러 나제트가에 찾아온 날이라고 했다.

“그날 담소를 듣고 공녀님이 공작 각하와의 약속 때문에 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 알고 있었구나…….”

“그렇게 이번 만남이 세 번째입니다.”

“나제트가에 있으면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거야. 스텔라가 하나뿐인 단짝이라 자주 놀러 가거든.”

“저야 만날 수 있는 날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떠내려가는 속도가 느려, 걸어서 하산하는 것과 비슷하게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여기서 출발하면 나제트가까지 5시간은 걸리려나. 후작님께서 널 보시면 무척 기뻐하실 거야.”

밀로 또한 아버지와 만날 생각에 기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저…… 공녀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언가 결심한 것 같은 표정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 하류에 도착하니 제드와 디아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밀로를 부축한 날 보자마자 빠르게 다가왔다.

“메이, 어째서 글리우곤과 혼자 싸운 거야. 위험하잖아.”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걱정 끼쳤다면 미안해.”

제드는 무어라 더 말하고 싶었으나 내가 디아고에게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밀로가 나제트가에 가기 전에 몸을 치료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대요. 도와주실 거죠?”

“……당연하지.”

나제트가는 황태자를 구해 준 황실의 은인. 따라서 밀로를 치료해 주고 입을 옷을 마련하는 건 배려가 아닌 도리였다.

“마차로 가자, 밀로.”

“같이 부축하지.”

나는 디아고와 함께 밀로를 부축해 마차로 향했다.

제드는 밀로의 발목을 지혈하는 붕대를 보며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

우리는 마차가 있을 산 입구로 향했다. 그곳엔 수호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도 보였다.

아무래도 S급 마물을 상대로 일반인을 보낸 것이 걱정스러웠나 보다.

아이리스와 카시우스는 나를 발견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글리우곤 때문에 다치진 않았나 봐.”

수호 기사들은 내 주위로 몰려와서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공자님께서 글리우곤을 해치우신 건가요?”

“조사해 보니 한 명도 도와준 적 없다고 하던데 혼자서 물리치신 겁니까?”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 보니 저 혼자 글리우곤을 해치우게 되었네요. 하하…….”

멋쩍게 웃으니 수호 기사들은 화들짝 놀래며 칭찬을 쏟아냈다.

“공자님 대단하십니다!”

“저희도 못 찾던 본체를 찾으신 것만 해도 훌륭하신데 해치우기까지 하셨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수배금 2억 골드! 부럽습니다!”

나는 뿌듯해서 생글생글 웃었다.

수호신들의 시선은 나에게서 밀로에게로 옮겨졌다.

“네가 밀로구나.”

밀로는 아이리스와 카시우스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글리우곤을 죽이는 데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은 다른 이들이 다 했지.”

카시우스가 수호 기사들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밀로는 수호 기사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아이리스가 밀로의 상처 난 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너희 어서 밀로 치료하러 가야겠다.”

“우린 가 볼게.”

아이리스와 카시우스가 가자,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다가 밀로와 함께 마차로 걸어갔다.

디아고가 마차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치료를 위해 곧장 황궁으로 가도록 하지. 나제트 공자는 내 마차에 타.”

우리는 다 따로 마차를 타고 왔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밀로를 태우고 간다고 해도 이동 수단이 부족해질 일은 없었다.

그때, 밀로는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듯이 내게 착 달라붙어 손을 잡았다.

“나랑 가고 싶어?”

내가 묻자 밀로가 하룻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저와 말을 터서 제가 더 편한가 봐요. 밀로는 제 마차에 태워 갈게요.”

디아고는 메이와 밀로가 단둘이 마차에 타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뭐라 할 입장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그러라고 했다.

“……그러든가.”

그때, 제드가 내게 다가왔다.

“나도 같이 타, 메이.”

“같이 타자고?”

셋이서?

나는 굳이 왜? 라는 표정으로 제드를 쳐다봤다. 제드한텐 마차가 따로 있었으니까.

“……나제트 공자와 친해지고 싶어서.”

별로 그래 보이진 않았는데…….

“그래, 뭐……. 친해지고 싶을 수도 있지.”

그렇게 우리는 셋, 하나로 나뉘어 마차에 타게 되었다. 내 옆엔 밀로가, 마주 보는 자리엔 제드가 앉았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달그락달그락―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가득하니, 졸리기 시작했다.

마력을 사용하는 데엔 꽤나 많은 체력이 필요했는데, 그로 인해 졸음이 밀려온 것이었다.

꾸벅꾸벅, 나는 졸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자꾸만 떨궜다.

덜컹- 그러다 마차가 흔들려 내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기 직전.

밀로와 제드가 재빨리 나를 붙잡았다.

밀로는 내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붙잡았고, 제드는 내 머리를 붙잡았다.

얼결에 어깨와 머리를 붙잡힌 나는 멋쩍게 그들의 손을 떼어 냈다.

“미안. 졸았나 봐.”

밀로는 슬쩍 내 손을 잡았다.

“제 어깨에 기대셔도 됩니다.”

내 손이 밀로의 손에 감싸지는 걸 본 제드의 표정이 빠르게 썩어 갔다.

나는 환자한테 어떻게 그러겠냐는 듯이 거절했다.

“아픈 사람한테 어깨를 빌린 순 없지.”

제드는 기회다 싶어 자기 옆으로 오라는 듯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럼 내가 어깨 빌려줄게. 난 환자 아니잖아.”

하지만 난 그의 호의 역시 거절했다. 밀로가 있는 곳에서 그와 스킨십하기 낯부끄러워서였다.

“괜찮아. 안 자면 돼.”

그러나 10분 후. 나는 누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

밀로는 메이가 누워서 편히 잘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렇게 제드 옆자리에 밀로가 앉게 되었다.

밀로와 제드 사이에 은밀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 붕대, 메이의 것이지?”

밀로의 발목을 감싼 흰 붕대를 말하는 거였다.

“그렇습니다만.”

“그 붕대의 용도를 알면 발목을 지혈하게 뒀으면 안 되었을 텐데? 발목은 상의를 벗어서라도 지혈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기엔 보시다시피 옷이 누더기나 다름없어서요. 그리고, 공녀님께서 제가 막을 새도 없이 제 발목을 지혈해 주셨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드에게 지지 않는 밀로였다.

“메이에게 사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메이가 남장을 그만두면, 내가 청혼할 거거든.”

메이는 나를 좋아하니 그 청혼에 응할 것이고.

“임자 있는 사람은 탐내지 않습니다. 하나, 임자가 없는 상황에선 다르죠.”

제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겁니다.

선택은, 공녀님께서 하시겠죠.

“…….”

제드는 예상치도 못한 복병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내 삭였다.

어차피 메이는 자신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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